프랜시스 버넷의 소설 <소공녀>의 주인공 세라는 어린 나이에 역경을 겪으면서도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을 배려하고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는 소녀다. 무려 백 년도 더 전인 1888년 처음 세상에 나온 이 세라가 지금 우리 주변에 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스스로 더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해 분투하는 현대판 ‘소공녀’는 바로 ‘소수의 공대 여자’를 말한다.
일명 ‘로봇하는 여자들의 네트워크’, 여성 과학기술인이 행복한 사회를 지향하는 소셜벤처 ‘걸스로봇’의 이진주 대표가 소공녀들의 람다스, 베키로 나섰다. 이진주 대표는 남녀비율이 불균형하기로는 손에 꼽히는 분야인 이공계에서 '살아남은' 여성들과 남성 '동행자'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KAIST 여성들이 남긴, 조금 특별한 인터뷰 기록
이진주 대표는 카이스트에서 한국 인터넷의 아버지 전길남 명예교수, 김소영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을 비롯한 7명의 남녀 교수와 6명의 학생들을 만났다. 이 인터뷰에서 13명의 인터뷰이(인터뷰에 응하는 사람)들은 연구, 학문에 대한 생각뿐 아니라 어린 시절, 학창생활, 나아가 결혼, 육아에 관한 생각까지 나눴다. (인터뷰 전문은 "Women at KAIST" 프로젝트에 투자한 독자들에게 공개된다. 투자는 9월 9일 마감되었으며, 유료 콘텐츠 중 일부를 발췌한 미리보기 글을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다. 링크)
지난 토요일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학생 인터뷰이들과 이진주 대표는 독자와의 만남을 가졌다. '과학살롱'이라 이름 붙인 이 만남에는 남성과 여성, 이십 대부터 사십 대까지의 다양한 독자들이 모였다. 자신도 이공계 출신이라고 밝힌 한 참가자는 요즘 이공계 여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예전보다 지금은 좀 나아졌을까 궁금했다고 한다.
걸스로봇 크루이자 국민대학교 재학생 이세리씨는 여자가 둘 뿐인 공대의 로봇축구동아리 생활을 풀어놨다. 이세리씨는 "아무리 수평적인 분위기의 연구실이라고 해도 구성원 대부분이 남자면 구조의 유동성에 한계가 생긴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대학원의 경우 특히 군대에 다녀온 남학생들이 대부분이어서 소수인 여학생들이 익숙하지 않은 군대식 분위기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이 생겨요.”
이세리씨는 실제로 동아리에서 동기였던 여학생이 혼자서 로봇의 디자인부터 제작까지 도맡기도 했다며 여학생과 남학생의 능력 차이는 두드러지지 않음을 강조했다. 이공계의 특징적인 분위기와 구성비율 때문에 여학생에게 넘어야 할 산이 하나 더 생길 뿐이라는 얘기다.
카이스트 물리학과를 졸업한 김세정 박사는 여성과학자의 현재에 대해 궁금해할 것을 주문했다. 김박사는 “가장 사적인 것이 공적인 것이다. 나 혼자만의 고민이고 나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나누고 나면 모두에게 해당하는 얘기”라며 소수자인 이공계 여성들이 스스로 고립되지 말 것을 강조했다.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기로 결심한 것도 이 이유에서라고 한다.
이공계 여성은 항상 '여성을 대표한다는 부담감' 느껴
김세정 박사는 여성이 수적으로 적기 때문에 집단에서 항상 여성 전체를 대표하게 된다는 점도 꼬집었다. 기계에 많은 양의 콩을 쏟아 넣으면 두터운 가운데층을 이루며 넓게 떨어지지만, 몇 알 안 되는 콩을 넣으면 무작위로 아무 곳에나 떨어진다는, ‘빈 머신(bean machine)’처럼 말이다. 이 때문에 소수인 이공계 여성은 여성이라는 집단을 대표하게 되며 여느 남성보다 더 나은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 같은 여성 이공계인들의 어려움을 남성들이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팟캐스트 ‘과학기술정책 읽어주는 남자들’의 진행자인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사과정 박대인씨는 “남성으로서 여성 이공계인에 대해 어떤 태도와 인식을 가져야 하는지 늘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질적인 사회적 롤모델이 존재하지 않아 여성 이공계인들의 어려움을 알더라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재학생 정종혁씨와 석사 노세영씨는 디자이너 부부다. 노세영씨는 결혼 이후 변화한 남편의 여성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했다. 노세영씨는 “구조적인 차별은 피해자 측에서 더 잘 발견된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인격이 아닌 시스템의 문제를 찾게 되기 때문”이라며, 여성 과학기술인들이 목소리를 냄과 동시에, 그 목소리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 제시되어야 한다는 점을 얘기했다.
이어 김세정 박사는 “개인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접근할 때 남녀에 대한 무의식적 인식 차이가 더 잘 드러날 수도 있다”며 여성 과학기술인들의 고충에 대한 사회적, 구조적 접근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노세영씨는 또, 학생 신분으로 결혼을 한 자신들은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며 여성과 남성이 다를 것이라는 통념에서 벗어나기의 중요성도 얘기했다.
그러나 여성을 배려한다는 ‘할당제’가 오히려 성별에 대한 인식 차이를 드러내는 것 같아 좋지 않다고 말하는 여성도 있다. 이에 대해 김세정 박사는 같은 조건에서 여성도 남성과 동일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입증 받은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과학살롱' 참가자들은 여성 과학기술인의 삶에 대해 진솔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는 소감을 밝히며 앞으로 더 많은 관심과 변화가 필요하다는 데 동감했다. 이진주 대표와 인터뷰이들은 “이 기록이 과학기술 분야의 여성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되면 좋겠다”는 말을 전했다.
- 박솔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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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6-09-13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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