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부에서 전기장을 걸면 전기분극이 바뀌게 되면서 메모리 소자나 스위칭 소자로 활용될 수 있는 강유전 산화물. 특이한 성질 때문에 앞으로의 활용이 더욱 기대되는 신물질이다. 강유전체가 박막형 차세대 메모리 개발의 핵심소재로 떠오르면서 많은 과학자들은 간접적인 측정방법을 이용해 강유전체의 성질을 관찰하고 이러한 현상이 왜 나타나는지 연구했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물질에서 전기분극이 끝나는 계면부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아무도 관찰한 사람이 없었다. 강유전 산화물의 상당부분은 궁금증이 해결됐지만, 계면에서의 변화가 알려지지 않아 논란이 많았던 것이다.
계면에서 일어나는 일
국내 연구진이 강유전체 산화물의 계면(界面, interface)에서 일어나는 전기화학적 현상과 물질의 원자구조를 동시에 관찰할 수 있는 분석방법을 개발해 주목을 받고 있다. 김영민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전자현미경연구부 박사팀이 강유전체 산화물의 자발적 분극이 계면에서 전기화학적으로 조절되는 현상을 ‘수차보정 전자현미경’을 활용해 원자단위에서 직접 관찰한 것이다. 이는 세계 최초로 거둔 연구성과로, 향후 각종 산화물의 전자소자 개발 연구가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외부에서 전기적 변화가 일어나면 산화물 계면에서 전하가 축적됩니다. 그런데 물질의 에너지가 높아지는 것을 막으려면 계면에서 감극현상이 일어나야 해요. 종전에는 이러한 현상이 순수하게 물리적 관점에서 전자(음전하)와 정공(양전하)들이 계면에서 재배열함에 따라 일어난다는 해석이 주를 이뤄왔어요. 하지만 이번에 수차보정 전자현미경을 이용해서 계면을 직접 관찰해 보니 산화물 안에 존재하는 산소결함(빈자리)이 감극현상의 주요 요인임을 처음으로 확인하게 됐습니다. 이번 연구를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전자적인 모델보다 더 복잡한 전기화학적인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혔습니다.”
김영민 박사팀의 이번 연구는 ‘수차보정 전자현미경’의 극소 공간에 대한 이미징 기능을 극대화시킨 예로서, 고체 물질의 계면에서 일어나는 전기화학적 현상과 물질의 원자 구조를 동시에 관찰할 수 있는 획기적인 연구방법으로 평가받고 있다. 향후 이를 통해 강유전산화물을 활용한 기능성 소자 개발과 기초 과학 연구에 유용한 새로운 연구방법을 제시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받고 있다.
지금까지 ‘수차보정 전자현미경’을 활용한 연구는 물질의 원자 구조와 구성 성분만 관찰하는데 주로 그친데 반해 김영민 박사팀이 개발한 이번 분석법을 통해 산화물 계면에서 발생하는 전기화학적 현상을 동시에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그 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물리 현상을 직접 보면서 이해할 수 있게 됐고, 기초과학뿐 아니라 관련 신소재 개발 연구도 강력한 추진력을 얻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과학은 호기심과 관찰에서 시작합니다. 이번 연구는 이러한 전제를 충실하게 따른 성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밀레니엄 시대에 들어서면서 우리의 과학과 기술은 물질의 원자구조를 직접 볼 수 있는 수차보정(구면수차 보정을 통해 전자현미경의 분해능을 1 옴스트롬(100억분의 1미터)이하로 얻을 수 있게 하는 기술) 전자현미경을 가능케 했습니다. 이에 따라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현상들을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수단이 과학자들에게 주어진 셈이죠. 원자를 직접 본다는 것은 우리가 물질 안에 있는 원자의 움직임에 따라 물질의 성질이 왜 달라지는지 알 수 있는 근본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로 인해 기초과학의 진보에 있어 수차보정 전자현미경의 도래는 많은 과학자들의 기대와 관심을 모으게 됐습니다. 이번 연구성과 역시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저희 연구팀은 수차보정 투과전자현미경을 개발한 과학자들의 혜택에 힘입어 이것을 어떻게 잘 활용해 과학계의 숙제를 풀 수 있는지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연구를 카메라 개발과 사진작가에 비유한 김영민 박사는 “사진기를 개발한 사람과 사진기를 활용하는 사진작가와의 관계로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라며 “세부적인 연구 주제는 강유전 산화물의 계면 원자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관찰한 것이지만 이번 연구의 분석방법을 활용해 다른 고체 물질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현상도 직접 관찰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동안 풀리지 않던 재료과학적 문제들의 연구와 연관 신소재 개발에 모멘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앞서도 언급했듯 기존의 설명들은 유전체와 전극 계면에서 발생하는 실제 물리현상을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지난 20여 년 간 유전체 재료에서 감극현상이 발생하는 재료과학 및 물리학계의 집중적인 연구가 진행됐고, 최근에는 계면에서 산소빈자리가 존재할 때도 유전체의 분극거동이 달라질 것이라는 전기화학적 해석이 제시됐다.
김영민 박사는 대표적인 다중강성체(多重强性體)인 비스무스페라이트(BiFeO3) 박막의 계면에서 분극의 방향에 따라 감극현상이 일어나는 이유가 다르다는 사실을 원자단위에서 처음으로 규명했다. 이를 위해 ‘수차보정 투과전자현미경’을 활용, 원자의 위치 변화를 피코미터 단위로 추적했고 계면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변화를 직접 관찰하기 위해 ‘전자에너지손실분광기’를 활용해 계면에서 바뀌는 금속원소의 산화상태를 직접 이미징하는데 성공했다.
연구결과 양전하가 모인 계면에서는 산소 공공이 재배열함으로써 감극이 이뤄지는 반면, 음전하가 모인 계면에서는 전자-정공의 재배열에 의해 감극이 제어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실제 감극현상이 어떻게 이뤄지는지에 대해 과학적 논란이 지속됐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관찰이 어려웠던 이유는 앞서 언급한 대로 원자를 보는 전자현미경이 2000년 대 후반에 들어와서야 상용화됐기 때문입니다. 이 때부터 세계 각지에 설치되기 시작했죠. 때문에 지난 20여 년 간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를 관찰할 마땅한 수단이 없었다는 것이 명확한 원인을 밝히지 못한 주된 이유였죠. 수차보정 전자현미경을 활용하더라도 계면과 분극 도메인(전기적 현상에 의해 원자들의 위치가 수십 피코미터 이동하면서 서로 다른 전기적 방향을 갖는 영역이 만나는 경계면)이 정확히 만나는 현상을 발견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입니다. 수차보정 전자현미경 영상을 통해 원자 구조는 볼 수 있지만 분극 도메인에서 일어나는 원자들의 미세한 위치 변화는 눈으로 쉽게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감극 현상을 관찰할 수 있게 된 이유는 수 피코미터 범위에서 일어나는 원자들의 위치 변화를 통계적으로 측정하고 약 5 피코미터 범위의 측정 오차를 갖는 새로운 측정법을 개발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제 연구가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같습니다.”
원자분해 물성현미경 시대를 위해
결국 그 동안은 물질의 현상보다 구조를 보는데 그쳤던 셈이다. 김영민 박사는 연구를 통해 물질의 현상을 관측하는데 성공했고 이는 결국 많은 기대를 받게 됐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은 왜 물질의 구조와 현상을 얻으려고 하는 것일까
“과학자들이 물질의 구조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물질이 갖는 구조에 따라 물질의 성질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구조를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으면 새로운 성질을 갖는 물질들도 더욱 쉽게 개발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과학 연구에 있어 전자현미경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아요. 물질을 발견하거나 합성해 새로운 성질을 갖는 물질을 창조하려면 그 원인이 되는 원자 구조에 대한 명확한 정보가 가장 중요합니다. 때문에 전자현미경은 우리가 거시세계에서 관찰하는 물질의 성질과 그에 대한 원인이 되는 원자 구조 세계를 직접 연결해 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죠. 이번 연구는 이러한 전자현미경의 장점을 극대화 시킨 경우입니다. 원자 구조를 직접 관찰하는 것 이외에 분극현상 같은 물리적 현상도 관찰이 가능하게 됐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죠. 이것이 시발점이 돼서 종국에는 원자구조-물리 현상을 한꺼번에 관찰하고 물리 현상의 원인을 규명할 수 있는 이른바 ‘원자분해 물성현미경’이 도래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앞으로도 지속적인 연구 방향으로 잡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고요.”
수차보정 현미경으로 비스무스페라이트의 구조를 관찰하다가 발견한 연구. 어떤 뚜렷한 목적을 갖고 진행된 연구는 아니었지만 그렇기에 발견의 기쁨을 알게 해 준 소중한 기회였다는 게 김영민 박사의 이야기였다.
“이번 연구는 발견의 기쁨을 알게 해 준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연구 시료를 관찰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계면과 분극도메인이 만나는 영역을 발견했고 전자현미경으로 정신없이 자료를 획득했던 것 같아요. 전자현미경을 갖고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전자현미경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는 말이 있습니다. 즉, 현상을 발견한 다음 일단 두고 다음에 보자는 마음으로 미뤘다가는 그 영역을 다시 찾기 어렵다는 거죠. 뿐만 아니라 전자현미경의 정밀 분석 조건이 매일 매일 변화할 수 있기 때문에 훌륭한 데이터를 다음에 얻겠다는 기약을 할 수 없거든요. 이러한 이유로 인해 저녁도 먹지 않고 실험에 집중했어요. 그 결과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었죠. 연구를 진행하면서 제 아내가 자주 밤늦게 들어오는 저를 보고 연락도 없이 밥도 안 먹고 무슨 일 있냐며, 걱정 반 타박 반으로 말했을 때 저는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좋은 기분에 ‘뭔가 하나를 해낸 것 같아!’ 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방대한 자료를 얻고 자료를 하나하나 분석해 나가면서 주변의 산화물 물리 전문가들에게 데이터를 보여줬어요. 연구를 논의해 나가는 자리에서 제가 발견한 자료의 희소성을 재차 확인했을 때는 지금까지 분석과학자로서 살아온 자부심과 말 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죠.”
김영민 박사팀의 이번 연구는 그동안 과학계의 숙제로 남아 있던 감극현상의 원리를 원자단위에서 최초로 관찰하고 그 원인을 밝혀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를 위해 개발한 분석기술은 ‘수차보정 전자현미경’의 극소 공간에 대한 이미징 기능을 극대화시킨 예로서 고체 물질의 계면에서 일어나는 전기화학적 현상과 물질의 원자 구조를 동시에 관찰할 수 있는 획기적인 연구방법으로 과학계에서 평가받고 있다.
“재료 과학 분야에는 크게 창조적인 일을 하는 연구자들과 탐험적인 연구를 하는 연구자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전자는 말 그대로 사람들에게 유용한 새로운 물질을 개발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이죠. 대중들에게 바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중요한 연구 성과들을 산출하는 과학자들입니다. 반면 후자는 서쪽으로 가면 인도가 나올 것이다, 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호기심과 열정으로 탐험에 나선 콜럼버스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후자 쪽에 가까운 일을 하고 있는 셈이에요. 비록 콜럼버스가 인도라고 생각한 것이 아메리카 신대륙이었지만 그가 개척한 항로를 통해 더 많은 교역과 왕래가 이뤄지면서 인류 문화가 더욱 발전했듯이 탐험적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연구 방법을 개척하고 과학발전에 보이지 않는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호기심이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졌을 때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이죠. 저의 산타마리아호는 나노세계의 신항로를 개척하는 수차보정 전자현미경입니다. 이를 통해 앞으로도 물질의 구조와 성질 간에 일어나는 새로운 현상 발견과 해석 기술 개발에 더욱 매진할 생각입니다.”
- 황정은 객원기자
- hjuun@naver.com
- 저작권자 2014-08-2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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