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은 우리 삶을 편리하고 윤택하게 해준다. 세제, 표백제 하나에도 과학기술이 스며 있다. 물론 그 뒤에는 현장에서 기술개발과 연구로 밤을 새는 현장 과학기술자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 생활을 풍요롭게 해줄 뿐만 아니라 진정 국부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연구현장과 기술개발의 주역들을 만나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본다.<편집자주>
지난 79년 한국화학연구원에 갓 발을 들인 선임연구원 이정민 박사(당시 32세)는 한 기업체의 연구개발 과제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당시 국내 최대 기초화학 소재기업인 동양화학(주)으로부터 냄새 없고 표백력이 강한 신 개념의 세탁 표백제 개발을 의뢰 받았기 때문이다. 개발에는 조건이 붙었다. 동양화학에서 남아도는 탄산소다와 과산화수소를 이용해 달라는 주문이었다.
표백제의 원리는 간단했다. 탄산소다와 과산화수소를 결합하면 됐다. 그러나 그렇게 쉬운 과제를 제안할 리는 만무했다. 결정적으로 두 화합물을 결합하면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고 제안한 연구과제였다. 안정화 작업이 관건이 됐다. 실험을 했지만 번번히 실패. 잠 못 이루는 불면의 밤이 계속됐다.
이 박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수백 번의 실험 끝에 마침내 이 박사 팀은 안정화에 성공했다. 지금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사용하는 ‘소듐퍼카보네이트’(₂Na₂co₃H₂O₂)의 탄생이었다. 국내에서는 최초의 산소계 표백제다.
사실 70-80년대 국내 표백제 시장은 염소계 표백제가 시장을 장악했다. 불쾌한 냄새가 진동하고 어쩌다 잘못 세탁을 하면 옷감이 여기저기 탈색되는 것을 당연한 일로 감수해야만 했었다.
이런 시절에 ‘냄새를 없애고 기존 옷감의 색은 더욱더 선명하게 만들어주는’ 새로운 표백제 개발은 주부들의 꿈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롱프랑`사에서 만든 산소계 표백제는 일부 중산층 가정의 전유물이었다.
곧바로 ‘임상실험’에 들어갔다. 실험실이라야 자신의 집이다. 아내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삶지 않아도 된다는 이 박사의 말을 믿지 못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빨래 임상실험’이 수 십 차례 계속됐다. 결론은 대 만족이었다.
2600만원(현재 가치는 2억원 가량 추정)을 들여 1년 6개 월 간의 개발 과정을 거친 신개념 표백제 ‘옥시 크린’의 개발 배경이다.
‘옥시크린’은 개발 초기 국내의 굴지 대기업이 생산, 판매하는형태도 일반에 선보였다. 하지만 폭발적인 시장의 반응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게 된다. 91년에는 첫 제품의 이름을 따 ‘옥시’라는 별도 법인이 설립됐다. 현재의 (주)옥시 사장은 이박사의 연구개발 파트너였던 동양화학의 연구개발과장이었다.
표백제 단일 품목으로 지난 2002년 45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누적 매출만 해도 3000억원에 달한다.
옥시의 개발 주역 가운데 화학연에는 이 박사만 남아있다. 무기화학실장으로 진두지휘하던 박로학 박사(72)는 퇴직을 한 뒤 현재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에서 번역과 관련 소일을 하고 박도순 박사 역시 명예퇴직 한 이후 지금은 대덕교회에서 장로로 활동 중이다.
이 박사는 "70-80년대 까지만 해도 정부 출연연구기관의 가장 큰 역할은 기술의 국산화였다"면서 "기술을 이전받으려해도 꽁꽁 숨기던 선진국 과학자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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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남평 대전일보 기자
- 저작권자 2004-09-01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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