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인간의 언어 체계를 완벽히 모사하며 '생각의 결과물'을 자동 산출하는 시대, 인간의 고유 영토였던 '읽기'와 '사유'의 가치가 전례 없는 위협을 받고 있다. 기술이 지능을 복제하는 시대에 왜 우리는 다시 종이책과 대면해야 하는가. 이 근원적 질문에 답하고, 무너지는 문해력의 토대를 입법으로 보수하기 위한 정책 담론의 장이 열렸다.
지난 2월 23일, 국회의원회관 제9간담회실에서 ‘제1회 책문화정책포럼’이 개최됐다. 이번 포럼은 더불어민주당 문화예술특별위원회와 손명수·김교흥·임오경 의원, 책문화정책포럼연구회, 어린이청소년책문화연대, 책문화네트워크가 공동 주최·주관했다. 포럼은 AI가 가져온 인지적 격변을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법제도적 방안을 모색하는 심층 발제와 지정 토론으로 진행됐다.
행사를 주최한 손명수 의원은 "AI 기술이 일상에 침투하며 지식 습득의 패러다임이 전면 재편되고 있다"며 "편리함 이면에 은폐된 사고력 퇴화와 인지 불평등 문제를 직시하고, 인공지능 시대를 견뎌낼 사유의 근육을 키우는 독서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국회의 시대적 책무"라고 역설했다.
창작의 변화와 '딥 리딩(Deep Reading)'의 필요성
기조강연을 맡은 최연구 부경대 겸임교수는 생성형 AI 트렌드가 가져온 창작 생태계의 변화를 짚었다. 최 교수는 AI가 방대한 데이터를 조합해 유창한 답변을 내놓지만, 가치 있는 질문을 던지고 맥락을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힘은 여전히 인간의 영역임을 강조했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AI가 제공하는 결과값에 안주하는 ‘인지의 외주화’를 경고하며,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지혜를 가려내는 통로로서 '딥 리딩'의 복원을 제안했다.
이어 박수밀 한양대학교 교수는 AI 시대 '읽는다는 것'의 본질적 의미를 고찰했다. 박 교수는 AI가 텍스트 생산을 자동화함에 따라 인간의 문해력이 '해독' 수준으로 퇴보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진정한 읽기는 텍스트와의 대화이자 자기 성찰의 과정"이라며,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AI 요약 방식이 인간의 심층적 사유를 가로막고 있다고 분석했다. 결국 AI 시대의 문해력은 텍스트 배후의 의도를 검증하는 '비판적 판단력'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제언이다.
세 번째 발표자인 정윤희 책문화네트워크 대표는 독서 문화 활성화를 위한 구체적인 법제도 개선 방안을 발표했다. 정 대표는 "독서는 개인의 취미가 아닌 국민이 누려야 할 '기본권'이자 사회적 안전망"이라며, AI 시대를 반영한 '독서문화진흥법'의 전면적 개정을 촉구했다. 특히 도서관과 서점이 지역 사회의 '지혜 공동체' 거점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정책적 통합 관리 체계와 재정 지원의 제도화를 강조했다.
정 대표는 특히 대학가에서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는 AI의 후폭풍을 언급하며, 단순히 교재를 사고 안 사고의 문제를 넘어 수업과 시험, 심지어 교수의 자질까지 위협받는 현실에서 대학과 지식의 의미가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음을 지적했다.
학교 도서관, 'IT 시장'이 아닌 '지혜의 보루'여야
지정 토론 세션에서는 교육 현장의 실무 전문가들이 참여해 현행 정책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정책적 제언을 내놓았다. 특히 이덕주 송곡관광고등학교 사서교사를 비롯한 현장 전문가들은 교육 당국의 '기술 만능주의'가 초래한 학교 현장의 위기를 성토했다.
참석자들은 과거 '교단 선진화 사업'의 실패 사례를 상기하며, "현재의 AI 교육 열풍이 학교를 거대한 IT 기업들의 데이터 수집처이자 시장으로 전락시키고 있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기술 도입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의 사유를 지도할 전문의 배치가 외면받고 있는 현실도 비판했다.
현장 전문가들은 "유기농 무상급식이 아이들의 신체를 지키듯, 사서교사는 아이들에게 건강한 '지식의 급식'을 제공하는 전문가"라는 비유를 통해, 모든 학교에 전문 사서교사를 전면 배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초문해교사나 AI 튜터 등 단기 계약직 인력으로는 AI 시대의 비판적 독서 교육을 수행할 수 없으며, 실력 있는 전문가들이 학교에 머물 수 있는 안정적인 법적 지위 보장이 입법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과학의 지식보다 사회의 지혜가 앞서야
포럼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사회가 지혜를 모으는 속도보다 과학이 지식을 얻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경구로 마무리됐다. 기술이 인간의 지능을 앞지르는 속도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빠른 연산 장치가 아니라, 더 깊이 읽고 연대하는 인간의 지혜라는 것이다.
이번 '제1회 책문화정책포럼'은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협력하여, AI라는 거대한 파고 앞에서 독서가 '인간다움을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이자 '사회적 안전망'임을 선언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이제 국회는 현장의 목소리를 수렴하여 실질적인 입법 성과로 응답해야 할 차례다.
- 김현정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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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26-03-05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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