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예술계에서는 현시대를 나타내는 말로 '인류세'(人類世·Anthropocene)라는 용어가 자주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음 달 8일 열리는 광주비엔날레 심포지엄의 주제는 '새로운 울림: 인류세 시대의 예술과 기술'이다. 경남 창원시에 있는 경남도립미술관 1층에서는 냄비와 솥 등을 24m 탑 형태로 모아 만든 최정화 작가의 설치작품 '인류세'를 올해 말까지 볼 수 있다.
지난 11일 서울 강북구 북서울꿈의숲 아트센터 드림갤러리에서 막을 내린 김명중 작가의 사진전 '22세기 유물'도 플라스틱과 탄소 등 문명의 부산물로 인해 황폐해지는 '인류세'의 22세기 유물 발굴 현장을 상정했다.
인류세는 본래 현재 지질시대를 종전과 다른 시대로 구분하기 위해 제안된 지질학적 용어다. 마지막 빙하기 이후 지금까지 1만1천700년간 '현생누대 신생대 제4기 홀로세'가 이어지고 있지만, 최근 인간의 활동으로 지구환경에 큰 변화가 생긴 만큼 홀로세가 종료했고 현 지질시대는 인류세로 새로 규정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비롯됐다. 이 용어는 대기 오존 형성과 파괴 구조에 관한 연구로 1995년 노벨화학상을 공동 수상한 네덜란드 대기학자 파울 크뤼첸이 2000년 국제 지구권·생물권 프로그램(IGBP) 소식지에서 사용을 제안하면서 널리 쓰이게 됐다.
크뤼첸은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나 토양 속 질소 함량 등이 현 지질시대인 홀로세의 관측 범위를 벗어나고 있고, 그 원인이 인간의 활동에 있다며 현시대를 인류세로 규정할 것을 제안했다. 이후 지질학자들은 2009년 인류세 실무그룹(AWG)을 꾸려 정말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현재 지질시대가 바뀌었다고 볼 수 있는지 본격적 논의에 들어갔다.
AWG는 인간 활동이 지질 시대를 구분할만큼 지구환경을 바꾸었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했고, 그 대표적인 표지로 1945년 이후 이어진 핵실험을 포착했다. 핵실험으로 지구 지층에 방사능 입자들이 뿌려졌고 이것이 인류가 지구에 남긴 강한 흔적이라는 것이다.
또 인류가 플라스틱을 본격적으로 사용하며 이른바 '테크노 화석'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라는 것이 AWG의 의견이었다.
AWG는 인류세 표식지 후보지를 12곳 선정한 다음 퇴적물에 플루토늄 등 인류의 핵실험 흔적이 남아있는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크로퍼드 호수를 최종 후보로 택하고 올해 초 국제지질학연합(IUGS) 산하 제4기 층서 소위원회에 인류세 도입안을 회부했다. 하지만 소위원회는 6주 동안 논의 끝에 올해 3월 66%의 반대로 현 지질시대를 인류세로 규정하는 안건을 부결했다.
대한지질학회 인류세분과위원장인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남욱현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학계에서 지질시대를 인식하는 것은 지층 속 화석과 같은 퇴적물이고 최소한 50cm 이상, 통상 1m 이상은 되어야 지층으로 인식하는데 1950년대 이후 지금까지 쌓인 지층이 1m가 넘는 게 있는지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근본적으로는, 지구의 기준으로 봤을 때 지질 시대가 인류세로 바뀌었다고 할 만큼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은 것 아니냐는 반론이 강하다. 지구에 미친 인류의 영향을 꼭 핵실험에서 찾는 게 맞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컸다고 한다. 농업혁명, 신대륙 발견, 산업혁명 등 시기에 따라 인류가 지구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들이 있는데 가장 최근의 사건이라 할 핵실험을 기준으로 인류세를 논의하는 것이 적절하냐는 의견이다.
결국 이 같은 '시기상조' 의견이 더 많이 나오면서 적어도 앞으로 10년간은 공식적인 지질시대가 종전과 마찬가지로 '현생누대 신생대 제4기 홀로세'로 유지되게 됐다. IUGS에서 지질시대 변경에 관한 안건이 부결되면 10년이 지난 이후에야 재론할 수 있다는 게 남 박사의 설명이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지질시대 변경이 인정되지 않았을 뿐 인류의 활동이 지구 환경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인류세' 도입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지질학계에서 크게 논의되고 있다.
25일 부산에서 개막하는 세계지질과학총회(IGC 2024)에서 인류세는 주요 41개 주제 가운데 하나로 4개 세션에서 다뤄진다. 이들 세션에서는 층서적 측면에서 인류세를 규정할 수 있을지 재검토하고, 그 외에도 현시대를 인류세로 규정할 수 있는 증거가 무엇일지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 연합뉴스
- 저작권자 2024-08-28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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