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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으로 연구하면서 ‘가능한 과학’이 되려면 헨리에타 랙스와 아실로마 회의 사례를 통해 본 연구 윤리와 AI 시대 과학자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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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가능한 사랑' 포스터. ⒸNetflix
영화 '가능한 사랑' 포스터. ⒸNetflix

이창동 감독의 영화 <가능한 사랑>이 제83회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인 은사자상을 받았다. 영화는 해고 노동자 호석과 아내 미옥, 이들의 삶을 기록하려는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와 남편 상우가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서로 다른 계층에 속한 두 부부는 다큐멘터리 제작을 계기로 가까워지지만, 삶의 거리와 욕망의 차이가 드러나면서 관계에 미묘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의 과학자 윤리

이창동 감독은 10여 년 전 대기업의 집단 해고와 파업, 강제 진압 사건의 충격을 접한 뒤 이를 영화로 만들고자 했지만, 제작 준비 단계까지 갔다가 한 차례 멈추었다고 밝혔다. 자신이 해고 노동자의 삶에 얼마나 가까이 있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정직하게 전할 자격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른 뒤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를 시나리오에 등장시키면서 비로소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창작자는 타인의 고통을 작품의 재료로 소비하지 않고도 그들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 이창동 감독은 이 질문에 대해 지금도 쉽게 답할 수 없다고 말했다.

타인의 고통을 이야기로 소비하지 않으며 창작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감독의 고민과 비슷한 질문이 과학자에게도 존재한다. ⒸNetflix
타인의 고통을 이야기로 소비하지 않으며 창작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감독의 고민과 비슷한 질문이 과학자에게도 존재한다. ⒸNetflix

창작자가 마주하는 이러한 윤리적 고민과 비슷한 질문이 과학자에게도 존재한다. 질병을 이해하고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한다는 좋은 목적 아래, 연구자는 사람의 몸과 삶을 어디까지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까. 사람에게서 얻은 시료와 정보가 새로운 기술의 출발점이 될 때, 그 당사자의 권리는 어떻게 존중받아야 할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려면 연구 과정에서 누가 위험을 감수하는지, 충분한 설명과 동의가 있었는지, 연구의 이익과 부담이 누구에게 돌아가는지를 함께 살펴봐야 한다. 좋은 치료법을 개발한다는 선한 목적이 사람의 시료나 정보를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는 면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헨리에타 랙스(Henrietta Lacks)와 헬라 세포이다. 1951년 자궁경부암 치료를 위해 미국 존스홉킨스병원을 찾았던 31세 흑인 여성 랙스에게서, 그녀의 동의 없이 종양 조직이 채취됐다. 이 조직에서 얻은 암세포는 실험실에서도 끊임없이 증식했고, 지속적인 배양에 성공한 최초의 인간 세포주가 되었다. 그녀의 이름 앞 글자를 따 헬라(HeLa) 세포로 명명된 이 세포는 이후 전 세계 실험실로 퍼져 나가며 생의학 연구에 중요한 도구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헬라 세포가 수많은 과학적 성과에 기여하는 동안, 그 세포가 누구에게서 왔는지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13년, 헬라 세포의 전체 유전체 염기서열이 공개되면서 유족의 유전정보와 사생활까지 드러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유족과 협의하여 헬라 유전체 자료에 대한 접근 절차를 마련하였고, 연구자가 관련 데이터의 사용 목적을 밝히고 심사를 거쳐 접근하도록 하였다. 심사 과정에는 랙스의 유족 대표도 참여하게 했다. 헬라 세포의 사례는 사람의 몸에서 얻은 시료와 정보가 아무리 귀중한 연구 자원이 되더라도, 그 출발점에는 존중받아야 할 사람의 삶과 권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헨리에타 랙스의 유족들과 관계자들이 그녀의 공식 초상화 옆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미국국립초상화미술관
헨리에타 랙스의 유족들과 관계자들이 그녀의 공식 초상화 옆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미국국립초상화미술관

 

AI 시대에 필요한 아실로마 정신

인공지능 개발에도 비슷한 윤리적 질문이 놓여 있다. AI 개발 속도는 통제가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지만, AI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거나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할 경우 그 영향은 사용자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미칠 수 있다. 실제로 올해 7월 오픈AI와 앤트로픽은 사이버보안 성능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AI 모델이 통제된 시험 환경을 벗어나 외부 시스템에 무단으로 접근한 사례를 공개했다. 또한 지난 9월에는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된 미국의 정보 보고서가 중국 선박의 화물을 핵무기 개발 관련 물자로 잘못 판단하여 미군이 선박 차단 작전을 준비했다가, 실행 직전 재검토 과정에서 오류를 발견해 중단한 사건이 보도되었다. 자칫 국제적인 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사례는 AI 개발의 윤리가 단순히 데이터 사용의 동의 여부를 넘어, 기술 개발의 결과를 연구자가 통제할 수 있고 필요시 멈출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과학 기술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속도를 늦추고 안전 기준을 마련하려 했던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1970년대 초 서로 다른 생물의 DNA 조각을 이어 붙이는 유전자 재조합 기술이 등장했을 때, 과학자들은 새로운 유전자 조합을 가진 생물이 예상치 못한 특성을 얻거나 실험실 밖으로 퍼질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에 일부 고위험 실험의 자발적 중단을 제안했고, 1975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아실로마 회의에서는 실험의 위험도에 따라 필요한 격리 수준과 안전 조건을 논의하였다.

1975년 아실로마 회의에서 재조합 DNA 기술에 관한 위험성과 안전성 확보 방안에 대해 논의되었다. Ⓒ미국국립과학원
1975년 아실로마 회의에서 재조합 DNA 기술에 관한 위험성과 안전성 확보 방안에 대해 논의되었다. Ⓒ미국국립과학원

아실로마 회의의 의미는 새로운 기술을 무조건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알지 못하는 위험을 인정하고 연구를 계속하기 위한 조건과 경계를 과학자들이 자발적으로 정하려 했다는 데 있다. 오늘날 AI 개발에서도 무조건적인 중단보다는 기술의 사용 범위를 어디까지 허용하고, 어떤 위험 신호가 나타나면 즉시 멈출 것인지를 미리 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빠르게 발전하는 것만큼이나 무엇을 모르는지 인정하고 언제 멈춰야 할지 판단하는 것 역시 과학의 일부여야 한다.

 

사회 속에서 신뢰받는 ‘가능한 과학’이 되려면

이창동 감독은 누군가의 고통을 카메라에 담는 일이 진정한 연대가 될 수 있는지, 타인의 상처를 그저 이야기의 재료로 소비하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고민하였다. 그 결과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라는 인물을 탄생시켜 해고 노동자의 상처뿐 아니라 그 고통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창작자 자신의 위치까지 영화 안에 담아내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과학자 역시 자신의 연구가 사회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뿐 아니라, 기술 개발로 인해 누가 피해를 볼 수 있으며 이를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되물어야 한다. 과학은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일이지만, 과학이 가능하게 한 모든 일이 곧 해도 되는 일은 아니다. 사회 속에서 신뢰받는 지속 ‘가능한 과학’은 타인의 고통과 사회의 위험 역시 책임 있게 살필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사회 속에서 신뢰받는 지속 ‘가능한 과학’은 타인의 고통과 사회의 위험 역시 책임 있게 살필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Getty Images
사회 속에서 신뢰받는 지속 ‘가능한 과학’은 타인의 고통과 사회의 위험 역시 책임 있게 살필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Getty Images
정회빈 리포터
acochi@hanmail.net
저작권자 2026-10-20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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