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천만 관객 신화를 새로 썼다. 올해 2월 4일 개봉한 이 영화는 3월 6일, 개봉 31일 만에 천만 영화 반열에 올랐다. 2024년 <범죄도시4> 이후 2년 만에 나온 기록이자 역대 34번째, 한국 영화로는 25번째, 사극 영화로는 <왕의 남자>, <광해, 왕이 된 남자>, <명량>에 이어 네 번째 기록이다. 영화는 1457년 강원도 영월 청령포를 배경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된 어린 선왕 이홍위(단종)와 그를 맞이한 촌장 엄흥도, 그리고 광천골 사람들이 함께한 마지막 4개월을 다룬다. 우리에게 익숙한 계유정난의 전면전보다 패배한 왕의 그 이후를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영화의 첫인상이 남다르다.
유튜브와 OTT에서 콘텐츠가 넘쳐나는 요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극장을 찾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장항준 감독이 직접 인터뷰에서 밝힌 문제의식에서 중요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실패한 정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때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며, 미완성된 정의의 뒷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계유정난 자체보다 그 뒤에 남겨진 단종의 삶, 그리고 기록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보려 했다는 뜻이다. 승자 중심으로 역사가 기록되고 결과가 좋으며 과정의 흠도 덮어지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왕과 사는 남자>는 수양대군이라는 '성공한 불의'와 단종이라는 '실패한 정의'를 나란히 세워 놓고 뒤늦게라도 누구의 편에 설 것인지 묻는다. 아마 많은 관객들이 이 점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DNA 이중나선 뒤에 가려진 이름, 로절린드 프랭클린
과학사에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현대 생명과학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의 DNA 이중나선에 관한 이야기다. 흔히 DNA 구조를 밝힌 사람들을 제임스 왓슨(1928~2025)과 프랜시스 크릭(1916~2004)이라고 배우지만, 그 결정적 장면 한가운데에는 로절린드 프랭클린(1920~1958)이 있었다.
1952년, 프랭클린은 대학원생인 레이먼드 고슬링과 함께 킹스 칼리지 런던의 연구실에서 DNA 구조를 밝히기 위해 X선 회절 사진을 찍고 있었다. 당시 과학자들은 DNA가 유전과 관련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정확히 어떤 모양인지 몰랐다. 구조를 알아야 유전 정보가 자손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 설명할 수 있었는데, X선 회절은 분자에 부딪힌 X선이 만든 규칙적인 무늬로 내부 구조를 밝혀내는 기술이다. DNA 구조를 설명할 때 자주 언급되는 'Photo 51'은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상징하는 결정적 사진이었다. 사진에는 십자가 모양의 점무늬가 선명하게 찍혔는데, 이는 나선구조일 때 나타나는 지그재그 패턴의 특징이다.
승자의 서사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문제는 사진이 찍힌 그다음이었다. 킹스 칼리지의 설명에 따르면 프랭클린과 함께 DNA 구조를 연구한 동료였던 모리스 윌킨스는 1953년 1월 프랭클린의 허락 없이 Photo 51의 복사본을 친구인 왓슨에게 보여주었다. 당시 윌킨스는 프랭클린과의 성격 차이로 인해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마침 프랭클린은 킹스 칼리지를 떠나 버크백 칼리지로 옮길 준비를 하고 있었고, 연구가 다른 경쟁자 그룹보다 늦어지는 것을 걱정하여 데이터를 공유했다는 설명이다. 사진을 본 왓슨과 크릭은 DNA의 화학적 구조를 모델링하는데 결정적 단서를 얻고 불과 두 달 만에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표했다.
프랭클린 역시 1953년 3월 작성한 원고 초안에서 DNA가 나선 구조일 가능성이 높다고 적었으며, 그녀도 거의 정답에 가깝게 접근해 있었다. 하지만 며칠 뒤 왓슨과 크릭이 이중나선 모델을 발표했고, 1953년 4월 25일 <네이처>에는 왓슨·크릭의 논문과 프랭클린·고슬링의 논문이 나란히 실렸다. 겉으로 보면 프랭클린의 논문이 DNA 이중나선 모델을 확인해 준 보조 자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모델을 세우는 데 핵심 근거가 이미 그녀의 데이터 안에 있었던 것이다.
이후 승자의 서사가 만들어지는 이야기에서 프랭클린은 단종과 많이 닮아 있다.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은 왓슨, 크릭, 윌킨스 3인에게 돌아갔고, 프랭클린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녀는 이미 1958년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노벨상은 사후 수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왓슨의 1968년 회고록 <이중나선>이 더해졌다. 그는 프랭클린을 본명 대신 '로지'라는 별명으로 불렀고, 그녀가 사진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서술했다. 또한 그녀가 감정을 좀 더 잘 통제했다면 윌킨스를 더 잘 도왔을 것이라며, 과학적 통찰을 지닌 연구자를 까다롭고 감정적인 인물로 묘사했다. 왕좌를 차지한 사람의 기록이 패배한 사람의 얼굴까지 다시 그려버린 셈이다.
프랭클린을 복권시키려는 움직임
단종은 유배와 죽음을 거친 뒤 오랫동안 잊혀 있다가, 240여 년 뒤 숙종 때 단종의 복권 여론에 힘입어 1698년 정식으로 왕의 지위를 회복하고 묘호 '단종'을 되찾았다. 프랭클린 역시 과학사의 변두리에서 중심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만든 조력자들이 있었다.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아론 클루그는 1968년 <네이처>에 기고한 '로절린드 프랭클린과 DNA 구조 발견'이라는 글에서 그녀가 단지 사진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구조 해석에 매우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브렌다 매덕스의 전기 (2002)에서는 프랭클린을 잊혀진 조연이 아닌 사건의 핵심 과학자로 다시 세웠고, 단순한 피해자 이미지에만 가두지 말고 그녀의 지적 역량을 제대로 보자고 제안했다.
영국 왕립학회는 2003년부터 로절린드 프랭클린 상을 제정해 매년 우수 과학자를 선정하고, 수상자들이 여성 과학자의 역할을 홍보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연극 〈Photograph 51〉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2008년 미국에서 초연되고 2015년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니콜 키드먼이 프랭클린 역을 맡아 화제를 모았다. 그녀의 이름을 딴 책과 상, 강연, 그리고 대중문화 속 프랭클린의 재조명은 실패한 정의가 시간이 지나 다시금 제자리를 찾는 과정을 보여준다.
늦었지만 기억해야 할 실패한 정의들
최근 영화의 흥행 덕분에 단종이 유배되었던 영월 청령포를 찾는 방문객이 5배 이상 늘어나고, 4월 열리는 단종문화제와 정순왕후 선발대회(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의 절개와 지혜를 기리는 행사)가 새롭게 주목받는다고 한다. 세조의 능과 단종의 능을 둘러싼 디지털 추모와 규탄, 영월을 향한 기부 참여도 뒤따랐다. 이는 과거가 현재를 바꾸는 힘이 있음을 보여준다. 프랭클린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오랜 시간 그늘에 묻혀 있었지만 연구자와 작가, 예술가들의 노력으로 그녀의 업적이 다시 널리 알려지고 있다. <왕과 사는 남자>가 실패한 정의의 가치를 상기시켰듯, 과학계에도 잊힌 인물들을 재조명하는 일이 계속되길 기대한다.
- 정회빈 리포터
- acochi@hanmail.net
- 저작권자 2026-03-12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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