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까(태명)가 어느 정도 크고 나니,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다. 힘이 넘쳐나는 아이를 데리고 주말에 집에서 머무르다 보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절로 생각난다. 긴 연휴가 다가올 때마다 ‘아이랑 가기 좋은 여행지’를 자꾸 검색하게 되는 이유다. 우선 여행 소식을 알리면 주변 어른들의 “기억도 못 할 거 뭣 하러 데려가냐”라는 잔소리가 찾아온다. 영 틀린 말도 아니다. 필자 역시 어릴 적 부모님의 노고를 썩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까까도 여러 번의 해외여행을 다녀왔지만, ‘우리 여기 다녀온 거 기억나?’라고 말하면 빤히 쳐다보며 눈알을 굴릴 뿐이다. 원정 육아까지 하며 고생한 노고, 아이들은 왜 잊게 되는 걸까.
돌 아이는 기억을 저장할 수 있다
생애 첫 몇 년 동안 우리는 매우 많은 것을 배운다. 태어난 날, 처음 엄마를 부른 날, 첫걸음마를 한 날 등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장면들은 부모에게 ‘구전’처럼 전해 들을 뿐, 직접 기억하지는 못한다. 이처럼 생애 초기 몇 년 간의 구체적인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 현상을 과학자들은 ‘유아기 기억상실(infantile amnesia)’이라 정의한다.
유아기 기억상실 연구는 19세기에 시작됐다. 1985년 미국의 심리학자 캐롤라인 마일스는 성인 89명에게 인생의 첫 번째 기억이 무엇인지 물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약 3세 이전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후에도 지그문트 프로이트, 장 피아제 등 당대의 유명 심리학자들이 여러 가설을 통해 유아기 기억상실을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유아기 기억상실의 원인을 명확하게 설명하진 못했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연구자들은 아기가 기억을 남기지 않는다고 봤다. 일화 기억(episodic memory)을 형성하고, 오랫동안 기억을 저장하는 데 중요한 뇌 부위인 해마가 청소년기까지 계속 발달하기 때문에 생애 초기에는 기억을 제대로 부호화하지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일화 기억은 첫 돌잔치, 친구나 가족들과 놀러 간 기억 등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기억을 말한다. 그러나 설치류 연구에서 해마에서 기억 흔적(engram)이 형성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접근할 수 없게 된다는 결과가 나오며 가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해 3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는 유아기 기억상실에 관한 기념비적인 연구가 실렸다. 미국 예일대 연구진은 생애 첫 몇 년 동안에도 기억이 뇌에 부호화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연구를 이끈 닉 터크-브라운 미국 예일대 심리학 교수는 지난 10여 년간 깨어 있는 영아를 대상으로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 검사를 수행하는 방법을 개척해 왔다. 그는 “일화기억의 핵심 특징은 그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말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지만, 말을 못 하는 영아를 대상으로는 이런 방식의 실험이 불가능해 그간 검증이 어려웠다”라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풍경, 얼굴, 사물 등 사진을 생후 4~24개월 된 영아 26명에게 보여준 뒤, 나중에 다시 사진을 보여주며 뇌 fMRI로 뇌 활동을 기록하는 동시에 시선 반응을 추적했다. 아기가 특정 사진을 이전에 본 적이 있으면, 다시 볼 때 더 오래 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영아들이 해마에 일화 기억을 저장할 수 있다는 게 드러났다. 사진을 더 오래 볼수록, 해마의 활동이 더 강했다.
이러한 결과는 26명의 영아 전체에서 관찰됐지만, 12개월 이상 된 영아들에서 특히 뚜렷하게 나타났다. 생후 1년 이상의 아기는 사진을 기억으로 저장하는 순간에 해마 중에서도 후방 해마에서 신경 활동이 증가했다.
해마는 크게 전방과 후방으로 나눌 수 있는데, 두 부위 모두 기억 처리에 관여한다. 후방 해마는 일화 기억, 전방 해마는 ‘통계적 학습’이라 불리는 또 다른 형태의 기억을 처리한다. 일화 기억이 구체적인 사건을 다룬다면, 통계적 학습은 여러 사건에 걸쳐 패턴을 추출하는 능력과 관련된다. 집의 구조. 먹고-놀고-잠드는(먹놀잠) 전형적인 하루의 흐름 등이 통계적 학습에 속한다. 이를 바탕으로 연구진은 일화기억은 생후 약 1년 이후에 나타날 가능성이 크며, 통계적 학습 경로는 이보다 더 이르게 발달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유아기를 모두 기억할 수 있게 될까
지난 1월 20일 국제학술지 ‘플로스 바이올로지(PLOS Biology)’에는 유아기 기억상실의 작동 메커니즘을 분자 수준에서 규명한 연구도 게재됐다. 아일랜드 트리니티칼리지 연구진은 ‘미세아교세포(microglia)’라 불리는 뇌의 면역세포가 어린 쥐에서 이러한 ‘기억상실’을 조절한다고 보고했다.
연구진은 어린 쥐에서 뇌의 주요 면역세포인 미세아교세포의 활성을 억제하고, 공포 자극에 대한 기억을 얼마나 잘 유지하는지 조사했다. 그 결과, 미세아교세포의 활성이 억제되어 해마와 편도체의 활동이 감소했을 때 어린 쥐들은 공포 경험을 더 잘 기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 연구진은 형광 표지를 이용해 엔그램 세포를 식별했다. 영아기 쥐에서 미세아교세포를 억제하자 엔그램 세포의 활성도가 더 높아졌다. 기억 회상이 강화되었다는 의미다.
2023년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Science Advances)’에 게재한 연구에서 연구진은 면역계가 활성화된 어미에게서 태어난 쥐는 영아기 기억상실을 겪지 않는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임신 중 인위적으로 염증을 유도해 태아의 뇌 발달을 변화시키면, 영아기 기억상실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영아기 기억상실이 없는 새끼 쥐에서 미세아교세포의 활성을 억제하면, 다시 영아기 기억상실이 나타나기도 했다. 즉, 미세아교세포는 영아기 기억상실을 끄고, 켜는 ‘스위치’ 역할을 한다.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축복’이라는 말이 있다.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과연 슬픈 일인지에 대해서는 답하기 어렵다. 다만, 일련의 연구를 살펴보며 우리 아이의 기억 어딘가에, 해외여행에 대한 추억이 담겨있길 바란다면 돌 이후에 여행을 떠나자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항공사는 24개월 미만 유아에 대해 운임을 거의 받지 않는다. 까까의 경우 18개월에 첫 해외여행을 다녀왔는데, 다녀오고 나서 ‘한참 클 때까지 다신 여행을 가지 않겠다’라고 다짐한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오늘도 필자는 가족여행을 어디로 떠날지 자꾸 검색해 본다. 유아기 기억상실보다 강력한 ‘부모 기억상실’도 있는 것이 틀림없다.
- 권예슬 리포터
- yskwon0417@gmail.com
- 저작권자 2026-01-28 ⓒ ScienceTimes
관련기사

뉴스레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