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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 과학
김현정 리포터
2025-09-29

[30th BIFF 특집] ‘대홍수’의 시대, AI는 답을 줄 수 있을까 김병우 감독 신작, '대홍수'가 던지는 기술과 윤리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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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부산국제영화제가 9월 17일부터 26일까지 해운대 영화의 전당을 비롯한 부산 각지에서 개최된다. 올해로 30주년을 맞는 부산국제영화제에는 64개국 241편의 작품이 초청되어 아시아 최대 규모의 영화제로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사이언스타임즈는 이번 영화제 화제작들을 최신 과학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분석해 독자들에게 영화와 과학의 흥미로운 접점을 소개한다.

 

빙하 붕괴를 다룬 블록버스터 재난 영화가 온다

김병우 감독의 신작 '대홍수'가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부문에서 베일을 벗는다. 남극 빙하 붕괴로 물에 잠긴 도시, 고립된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생존 드라마, 그리고 시간을 되돌리는 기이한 현상. 언뜻 장르영화의 문법으로 포장된 이 작품은 사실 현재 인류가 직면한 가장 첨예한 과학적 질문들을 담고 있다.

주인공 안나(김다미)는 AI 재난 시뮬레이션 연구자다. 그녀는 대홍수에 고립된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AI 시뮬레이션을 가동한다. 하지만 시뮬레이션이 반복되면서 매번 다른 선택을 하며,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는 극적인 다른 결과를 맞을 수밖에 없다. AI가 제시하는 최적의 생존 전략과 인간의 직관적 판단이 충돌할 때, 과연 어느 것이 더 옳은 선택일까?

김병우 감독이 던지는 이 질문은 현대 과학기술이 직면한 근본적 딜레마를 담고 있다. 때문에 이 영화는 재난을 단순한 스펙터클로 소비하지 않고,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현실적 시나리오로 접근한다. 실제로 김병우 감독은 "3년간 기후과학자들과 AI 연구자들을 인터뷰하며 시나리오를 다듬었다"고 밝혔다.

그 결과 영화 속 재난 상황은 허무맹랑한 상상이 아닌, 과학적으로 검증 가능한 근미래의 시나리오로 구성되었다. 화려한 CG 대신 과학적 사실성에, 개인적 영웅담 대신 집단적 윤리 딜레마에 집중함으로써 한국 영화만의 독창적인 재난 영화 가능성을 모색한다.

남극 빙하 붕괴로 물에 잠긴 도시, 고립된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생존 드라마를 다룬 영화 ‘대홍수’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다. ⒸNetflix
남극 빙하 붕괴로 물에 잠긴 도시, 고립된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생존 드라마를 다룬 영화 ‘대홍수’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다. ⒸNetflix

 

빙하 붕괴 시나리오, 실제 진행 중인 현실

남극 대륙의 거대한 빙하가 급속히 무너져 내린다는 영화의 시작은 영화적 상상일까? 최신 극지과학 연구들이 제시하는 현실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한국 극지연구소가 2024년 10월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남극 서부의 스웨이츠 빙하와 파인아일랜드 빙하는 해마다 845억 톤의 얼음이 집중적으로 유실되고 있으며, 이는 남극에서 매년 사라지는 얼음량의 70%에 달한다. 두 빙하가 차지하는 면적은 남극 전체의 3%에 불과하지만 융해 속도는 전례 없이 빠른 상황이다.

에릭 리그노(Eric Rignot) 캘리포니아 대학교 교수는 "남극에서 사라지는 빙하의 양이 지난 40년 사이 6배나 늘어났으며, 1979-1990년 연간 40기가톤에서 2009-2017년 연간 252기가톤으로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특히 그는 "스웨이츠 빙하 같은 주요 빙하들이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지점(point of no return)'을 넘어섰을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영화처럼 몇 시간 만에 도시 전체가 물에 잠기는 상황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민기홍 교수는 "빙하 붕괴로 인한 해수면 상승은 수십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며 "다만 태풍이나 폭풍해일과 결합될 경우 단시간에 극심한 침수가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2012년 허리케인 샌디는 뉴욕 맨하탄 남부를 완전히 침수시켰고, 2021년 허리케인 이다는 뉴욕 지하철을 폭포로 만들었다.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이 이런 극한 기상 현상과 결합한다면 영화 같은 상황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2024년에 발표된 남극 빙하량 변화. Ⓒ극지연구소
2024년에 발표된 남극 빙하량 변화. Ⓒ극지연구소

 

침수된 건물,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영화 ‘대홍수’는 홍수라는 재난과 고립된 공간이라는 극한 상황을 설정해 놓았다. 안나와 생존자들이 홍수로 고립된 아파트 건물에서 탈출구를 찾아 헤매는 이중의 공포는 재난 영화의 고전적 공식이다. 바깥으로는 나갈 수 없고, 안에서는 자원과 시간이 한정된 상황에서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는 클로즈드 서스펜스의 전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영화적 설정을 넘어서 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흥미로운 질문이 남는다. 과연 현실에서 건물이 물에 완전히 잠긴다면 어떤 물리적 변화가 일어날까?

건물이 침수되면 두 가지 주요 물리적 힘이 작용한다. 첫째는 아르키메데스 원리에 따른 부력이다. 물에 잠긴 건물 부피만큼의 물 무게에 해당하는 상향력이 건물을 들어 올리려 한다. 둘째는 물의 정수압으로, 깊이에 비례하여 건물 벽면을 안쪽으로 밀어붙인다.

수치로 계산해 보면 그 위력이 실감난다. 10층 높이(약 30미터)까지 침수된 아파트의 경우, 1층 바닥면에는 제곱미터당 약 300kN의 부력이 작용한다. 이는 30톤 트럭이 1㎡ 면적을 누르는 힘과 같다. 동시에 1층 벽면에는 수심 15미터 지점 기준으로 150kN/㎡의 수평 압력이 가해진다. 

수위 상승으로 인한 정수압력이 건물 기초에 미치는 부력과 측면압력을 보여주는 단면도. ⒸSmart Vent Products
수위 상승으로 인한 정수압력이 건물 기초에 미치는 부력과 측면압력을 보여주는 단면도. ⒸSmart Vent Products

그렇다면 실제 상황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건물 침수의 물리적 영향을 이해하려면 두 가지 시나리오를 구분해야 한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건물 외부만 물에 잠긴 경우다. 이는 말 그대로 재앙적 상황이다. 건물 외벽에는 물의 엄청난 압력이 가해지지만, 내부는 여전히 공기로 차 있어 대기압만 작용한다. 예를 들어 15미터 깊이에서는 외부에 147kN/㎡의 압력이 작용하는 반면 내부는 101kN/㎡에 불과하다. 이 46kN/㎡의 압력차는 벽체를 안쪽으로 밀어 붕괴시킬 수 있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건물 내부까지 완전히 침수된 경우. 이 때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내외부의  수위가 같아지면 벽면에 가해지는 압력차가 사라진다. 이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부력이다. 건물 전체가 물에 잠기면 아르키메데스 원리에 따라 위쪽으로 부력을 받게 된다.

여기서 핵심은 부력 대 건물 무게의 대결이다. 철근콘크리트의 밀도는 약 2400kg/㎥로 물(1000kg/㎥)보다 2.4배 무겁다. 즉, 건물이 완전히 침수되어도 자중이 부력보다 훨씬 크므로 떠오르지 않고 바닥에 안착된 상태를 유지한다.

문제는 건물이 이 과정을 견딜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일반 아파트는 애초에 완전 침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설계되었다. 건축구조기준에서도 최근 2024년에야 홍수하중이 추가될 정도로 기존에는 이런 상황을 상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대부분의 기존 건물이 완전 침수를 견뎌낼 가능성은 매우 낮다.

다만 특수하게 설계된 건물들은 다르다. 네덜란드의 일부 건물들은 홍수에 대비해 1층을 의도적으로 개방형으로 설계하여 물이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했고, 일본의 일부 츠나미 대피 건물들도 비슷한 원리를 적용했다. 이런 건물들은 압력차를 최소화하여 구조적 손상을 줄인다.

영화 ‘대홍수’의 한 장면. ⒸBIFF
영화 ‘대홍수’의 한 장면. ⒸBIFF

 

AI와 인간, 극한 상황에서의 선택

영화의 핵심인 '시간 반복' 현상을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열쇠는 주인공 안나가 AI 연구자라는 설정에 있다. 만약 이 반복이 초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첨단 기술의 결과라면 어떨까?

현재 AI는 이미 인간이 상상하기 어려운 속도로 무수한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구글 딥마인드의 'GraphCast'는 40년간의 기상 데이터를 학습하여 10일간의 날씨를 1분 내에 예측하며, 기존 시스템보다 90% 이상 높은 정확도를 보인다. 재난 대응 분야에서 사용되는 몬테카를로 시뮬레이션은 동일한 상황에서 무수한 변수를 적용해 최적의 결과를 찾아낸다.

흥미롭게도 인간의 뇌도 비슷한 작업을 수행한다. KAIST 뇌과학과 정재승 교수는 "인간의 뇌도 결정을 내리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수많은 가능성을 시뮬레이션한다"며 "렘수면 중 뇌는 하루 경험을 재조합하여 가상 상황들을 만들고 미래 대비책을 마련한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기술이 발달하면서 뇌 내부의 시뮬레이션 과정을 외부에서 관찰하거나 조작하는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는 원숭이가 생각만으로 컴퓨터 게임을 하도록 했고, 메타는 뇌파를 텍스트로 변환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런 맥락에서 안나의 시간 반복 경험은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 그녀가 개발한 AI 재난 예측 시스템이 BCI를 통해 수천 가지 시나리오를 그녀의 뇌에 직접 전송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컴퓨터 내부의 가상 실험이지만, 당사자에게는 실제 경험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여기서 진짜 갈등이 시작된다. AI가 계산해낸 '최적해'와 인간이 느끼는 '옳은 선택' 사이의 충돌 말이다.

AI가 기상 예측에도 활용되고 있다. ⒸGettyImagesBank
AI가 기상 예측에도 활용되고 있다. ⒸGettyImagesBank

 

생존 선택과 알고리즘 윤리학

영화에서 가장 긴장감 넘치는 순간들은 역설적으로 가장 조용한 장면들이다. 제한된 구조 기회를 놓고 누가 먼저 탈출할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안나의 AI는 수학적으로 최적화된 답을 제시한다. 하지만 인간들의 직관적 판단과는 종종 충돌한다.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의 '트롤리 문제'가 바로 이런 딜레마다. 다섯 명을 구하기 위해 한 명을 희생시키는 것이 옳은가? AI는 '다수의 생명을 구하는 선택'을 최적해로 제시하지만, 인간은 그 한 명이 누구인지에 따라 다른 판단을 내린다.

서울대 철학과 김희정 교수는 "AI의 계산적 합리성과 인간의 직관적 도덕성 사이의 간극은 앞으로 더욱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될 것"이라며 "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다움의 본질을 묻는 질문이 더욱 절실해진다"고 분석했다.

영화에서 안나가 수십 번의 시뮬레이션을 거쳐 내린 최종 선택은 AI가 제시한 최적해와 다르다. 수학적으로는 비효율적이지만 인간적으로는 더 의미 있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영화적 결말이 아니라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직면할 근본적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생존을 위한 극한 상황에서 ‘사람’의 선택과 ‘인공지능’의 선택은 어떻게 달라질까. ⒸBIFF
생존을 위한 극한 상황에서 ‘사람’의 선택과 ‘인공지능’의 선택은 어떻게 달라질까. ⒸBIFF

 

기후위기 시대의 영화적 상상력,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과제 

영화 '대홍수'가 던지는 궁극적 질문은 기술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에 대한 것이다. AI가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해 낼 수 있는 시대에, 인간은 여전히 자신만의 기준으로 선택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선택이 과연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김병우 감독은 "재난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절망적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의지"라며 "AI가 아무리 정확한 답을 제시해도, 결국 선택하는 것은 인간"이라고 강조했다.

영화는 또한 기후변화라는 전 지구적 위기 앞에서 개인의 선택이 갖는 의미를 묻는다.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서 개인의 노력이 무의미해 보일 수 있지만, 그 작은 선택들이 모여 인류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영화가 서구의 개인주의적 영웅 서사가 아닌, 동아시아적 집단주의 윤리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작은 양보와 배려가 모여야 비로소 해법이 보이는 구조로 설계되었다.

이는 기후변화 대응에서도 마찬가지다. 개별 국가나 개인의 영웅적 행동보다는 전 지구적 협력과 연대가 필요하다는 현실적 인식을 반영한다. 영화 속 시간 반복 구조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 번의 완벽한 선택보다는 계속된 시행착오를 통한 점진적 개선이 현실적 해법이라는 것이다.

김현정 리포터
vegastar0707@gmail.com
저작권자 2025-09-29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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