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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 과학
김현정 리포터
2025-09-24

[30th BIFF 특집] 꿈 잃은 세상에서 ‘기억’을 되찾다 中 비간(Bi Gan) 감독의 '광야시대'가 제시하는 인간 의식의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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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부산국제영화제가 9월 17일부터 26일까지 해운대 영화의 전당을 비롯한 부산 각지에서 개최된다. 올해로 30주년을 맞는 부산국제영화제에는 64개국 241편의 작품이 초청되어 아시아 최대 규모의 영화제로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사이언스타임즈는 이번 영화제 화제작들을 최신 과학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분석해 독자들에게 영화와 과학의 흥미로운 접점을 소개한다.

 

칸이 주목한 미래 비전, 과학은 어떻게 답할까

"꿈을 잃으면 인간은 과연 무엇이 되는가?" 중국의 젊은 거장 비간(Bi Gan, 35세) 감독이 던진 이 질문이 2025년 칸영화제에 큰 울림을 남겼다. 그의 신작 '광야시대(Resurrection)'는 올해 칸 영화제 특별상 수상과 함께 로튼 토마토 90%, 메타크리틱 82점이라는 압도적 호평을 받으며 세계 영화계의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북미 배급사 야누스 필름스는 이 작품을 "데이비드 린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왕가위를 잇는 비전을 가진 감독의 만화경적 오디세이"라고 극찬했다. 하지만 일부 비평가들은 "꿈의 논리로 작동하는 난해한 서사"라며 해석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칸에서 전 세계의 시선을 모은 이 작품은 이제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한국 관객과 만난다. 아시아 최대 규모 영화제인 부산국제영화제가 마련한 이 자리는 세계적 주목작을 국내에 가장 먼저 소개하는 특별한 무대가 될 전망이다.

과연 〈광야시대〉가 그려낸 인간과 미래의 풍경에는 어떤 과학적 상상력과 근거가 깔려 있을까. 영화의 질문은 단순한 서사의 차원을 넘어, 꿈과 의식, 그리고 인류의 미래를 탐구하는 철학적·과학적 논의를 불러일으킨다.

"꿈을 잃으면 인간은 과연 무엇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비간 감독의 영화 ‘광야시대’가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공개된다. Ⓒfestival-cannes
"꿈을 잃으면 인간은 과연 무엇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비간 감독의 영화 ‘광야시대’가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공개된다. Ⓒfestival-cannes

 

160분간 펼쳐지는 인간 의식의 실험

'광야시대'는 인류가 꿈꾸는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이 세상의 인간들은 영생이라는 선택의 대가로 꿈을 포기했다. 정부 기관인 '빅 아더'는 꿈을 꾸는 자들을 시간과 역사를 교란하는 위험 분자로 간주하며 철저히 관리한다.

주인공 '판타스머'(잭슨 이 분)는 이런 세상에서 유일하게 꿈꾸는 능력을 간직한 인물이다. 빅 아더는 그를 찾아내 마지막 네 번의 꿈을 꾸도록 허락한다. 이때 특별한 임무를 맡은 여성 요원(서기 분)이 등장한다. 그녀는 타인의 기억과 환상을 시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초감각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영화는 그녀가 판타스머의 네 번의 꿈 속에 들어가면서 전개된다. 각각의 꿈에서 그녀는 판타스머의 과거와 기억, 그리고 이 세상이 어떻게 꿈을 잃게 되었는지에 대한 진실을 하나씩 발견해 나간다. 동시에 두 사람 사이에는 예상치 못한 감정적 연결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비간 감독은 이 서사를 인간의 오감과 정신을 상징하는 6개 장으로 구성했다. 각 장은 서로 다른 시대적 배경과 영화 장르의 특성을 띤다. 1920년대 독일 표현주의 영화처럼 촬영된 장면이 있는가 하면, 1940년대 필름 누아르의 음영과 분위기를 재현한 시퀀스도 등장한다. 또 다른 장에서는 1960년대 슬랩스틱 코미디나 1980년대 스릴러의 문법을 차용하기도 한다.

영화의 절정은 1999년 신정 전야를 배경으로 한 35분간의 단일 롱테이크 시퀀스다. 이 장면에서는 낡은 영화관이 무너져 내리고 관객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나는 가운데, 여전히 스크린을 바라보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려 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렇다면 이런 환상적인 설정들이 단순한 공상에 불과할까? 현대 신경과학은 꿈의 상실이 인간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어떤 답을 제시하고 있으며, 타인의 꿈을 경험할 수 있다는 여성의 능력은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현상일까? 비간 감독이 그려낸 미래 비전을 최신 연구 성과와 함께 분석해본다.

비간 감독의 '광야시대'에서 판타스머의 꿈 속에서 재구성된 과거 중국의 집단적 기억을 시각화하고 있다. Ⓒfestival-cannes
비간 감독의 '광야시대'에서 판타스머의 꿈 속에서 재구성된 과거 중국의 집단적 기억을 시각화하고 있다. Ⓒfestival-cannes

 

렘수면 차단과 감정 기억의 붕괴 

영화 속 '꿈을 잃은 인류'라는 설정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이에 대한 답은 수면과 기억 연구의 최신 성과들에서 찾을 수 있다.

렘수면은 우리가 꿈을 꾸는 주요 수면 단계로, 뇌파 활동이 각성 상태만큼 활발해진다. 이 시기에 뇌는 하루 동안 경험한 정보들을 정리하고 통합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특히 감정적으로 중요한 기억들이 장기 기억으로 전환되고, 트라우마적 경험들이 처리되어 정신적 안정을 되찾는 과정이 일어난다.

지금까지 여러 연구들이 렘수면의 중요성을 입증해왔다. 최근에는 헬싱키 대학 한니넨 박사와 연구진이 29명의 참가자들에게 사회적 스트레스를 경험하게 한 후 렘수면을 차단하는 연구를 수행하여 지난해 eNeuro 저널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렘수면이 차단된 그룹은 다음 날 스트레스 반응이 제대로 조절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또 렘수면 중 나타나는 세타파(4-8Hz) 뇌파가 감정 기억의 통합과 재조직화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즉, 사람에게 단기 렘수면을 박탈하면 감정 조절 장애, 집중력 저하, 우울감 증가 등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헬싱키 대학 연구진의 렘수면 차단 실험 설계. 참가자들이 노래방에서 사회적 스트레스를 경험한 후, 수면 중 렘단계가 시작될 때마다 소리 자극으로 깨워 꿈을 꾸는 수면을 선택적으로 차단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실험 프로토콜. ⒸeNeuro
헬싱키 대학 연구진의 렘수면 차단 실험 설계. 참가자들이 노래방에서 사회적 스트레스를 경험한 후, 수면 중 렘단계가 시작될 때마다 소리 자극으로 깨워 꿈을 꾸는 수면을 선택적으로 차단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실험 프로토콜. ⒸeNeuro

이러한 연구 결과들을 통해 렘수면 상실의 장기적 영향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단기간의 렘수면 차단만으로도 감정 조절과 기억 처리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면, 만약 인류 전체가 렘수면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감정적 트라우마를 처리할 수 없게 되면서 정신적 부담이 계속 축적되고, 새로운 경험을 장기 기억으로 공고화하는 과정에 지속적인 장애가 발생할 것이다. 또한, 일상적인 스트레스 상황에 대한 적응 능력도 점진적으로 저하될 가능성이 높다.

이를 바탕으로 영화 '광야시대'의 설정을 해석해 보면 더욱 흥미로워진다. 

영화에서 인류가 꿈을 포기했다는 것은 단순히 환상적 경험을 잃은 것이 아니다. 감정을 조절하고 기억을 정리하며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는 기본적인 인간의 기능 자체를 상실한 것이다. 영생을 얻은 대가로 정신적 성장과 회복 능력을 포기한 셈이다.

반면 판타스머가 마지막 꿈꾸는 존재라는 설정은 그가 유일하게 건강한 정신적 기능을 보유했음을 의미한다. 그의 특별함은 신비로운 초능력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정신적 회복력과 적응력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온다. 과학적으로 볼 때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있는' 마지막 인간인 것이다.

비간의 '광야시대'의 35분 롱테이크 시퀀스 한 장면.  꿈과 현실 사이의 경계에서 기억을 통합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BIFF
비간의 '광야시대'의 35분 롱테이크 시퀀스 한 장면. 꿈과 현실 사이의 경계에서 기억을 통합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BIFF

 

기억의 재구성과 시간적 통합의 신경과학

한편, '광야시대'에서 가장 독특한 설정 중 하나는 주인공의 꿈이 서로 다른 시대와 장르로 구현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간적 층위의 복합체는 단순한 영화적 기법이 아니라 기억과 시간 인식에 관한 최신 뇌과학 연구의 핵심 개념들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수잔나 마르티네즈-콘데(Susana Martinez-Conde) MIT 뇌인지과학과의 연구팀이 2023년 네이처 뉴로사이언스 저널에 발표한 연구는 우리의 시간 인식이 어떻게 기억과 결합되는지를 밝혀냈다. 

연구진은 82명의 참가자를 대상으로 서로 다른 시대적 배경의 영상을 보여주면서 뇌파와 fMRI를 동시에 측정했다. 그 결과 참가자들이 과거의 기억과 연관된 영상을 볼 때 해마와 내측 전전두피질 사이의 세타파(4-8Hz) 동조화가 급격히 증가한 것을 발견했다. 해마는 새로운 기억을 형성하고 저장하는 뇌의 핵심 부위이고, 내측 전전두피질은 기억에 의미와 맥락을 부여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 동조화가 일어났다는 것은 과거 기억을 떠올릴 때 뇌는 단순히 저장된 정보를 꺼내는 것이 아니라 기억과 현재 상황을 연결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적극적인 재구성 작업을 수행한다는 의미다. 

'광야시대'의 필름 누아르 스타일 장면. 1940년대 범죄 영화의 시각적 문법을 통해 판타스머 꿈 속 또 다른 시대적 층위를 구현하고 있다. ⒸBIFF
'광야시대'의 필름 누아르 스타일 장면. 1940년대 범죄 영화의 시각적 문법을 통해 판타스머 꿈 속 또 다른 시대적 층위를 구현하고 있다. ⒸBIFF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런 뇌파 동조화가 시간적으로 먼 기억일수록 더 복잡한 패턴을 보였다는 점이다. 이는 뇌가 개인적 기억을 시대적 맥락과 통합하여 하나의 일관된 서사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알파파(8-12Hz), 베타파(13-30Hz) 등 여러 주파수 대역의 뇌파를 동시에 활용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판타스머의 꿈이 1920년대 표현주의부터 1980년대 스릴러까지 다양한 장르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런 기억 재구성의 신경과학적 메커니즘을 시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각 시대의 문화적 형식은 그 시기의 집단적 트라우마와 욕망이 응축된 기억의 외적 표현이며, 판타스머의 뇌에서는 이런 시대적 층위들이 꿈을 통해 하나의 통합된 서사로 재조직되고 있다.

특히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35분 롱테이크 시퀀스는 이런 과학적 원리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실험이다. 편집 없는 연속 촬영은 관객의 뇌에서 파편화되지 않은 통합적 기억 경험을 만들어낸다. 이는 렘수면 중 일상 경험들이 장기 기억으로 통합되는 신경학적 과정을 영화 관람 경험으로 재현한 것이다.

매튜 워커(Matthew Walker) UC 버클리 교수 연구팀이 2021년 사이언스지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렘수면 중 뇌는 하루 동안의 경험들을 시간적 순서로 재배열하고 감정적 의미에 따라 재조직한다. 이 과정에서 해마와 신피질 사이의 연속적인 신경 활동이 핵심 역할을 담당한다. 롱테이크는 바로 이런 연속적 신경 활동을 모방하여 관객이 판타스머의 기억 통합 과정을 직접 체험하도록 유도한다.

결국 '광야시대'는 개인의 기억이 집단의 역사와 만나는 지점에서 벌어지는 신경학적 드라마를 영화 언어로 번역한 작품이다. 비간 감독이 구현한 시간의 층위와 기억의 재구성은 허구적 상상력이 아니라 뇌과학이 밝혀낸 인간 의식의 실제 작동 원리에 기반하고 있다.

 

인간다움의 조건: 꿈과 기억, 그리고 영화

'광야시대'가 제기하는 "꿈을 잃으면 인간은 무엇이 되는가?"라는 질문은 이제 단순한 철학적 사변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답할 수 있는 문제가 되었다. 꿈의 상실은 감정 조절 능력의 상실이며, 기억 정제 기능의 마비이고, 개인적 경험을 집단적 역사와 연결하는 능력의 소멸을 의미한다.

비간 감독이 "영화를 보는 모든 사람은 영화 속 괴물과 같은 생태계의 일부가 된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과학적 이해에 기반한다. 관객들은 160분의 상영시간 동안 자신의 뇌에서 일어나는 기억과 꿈의 과정을 스크린을 통해 직접 경험하게 된다.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될 '광야시대'는 단순한 실험 영화를 넘어서서, 현대 신경과학이 밝혀낸 인간 의식의 본질을 영화적 언어로 번역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과학과 예술이 만나는 지점에서의 새로운 영화적 체험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

김현정 리포터
vegastar0707@gmail.com
저작권자 2025-09-24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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