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계 최고 권위의 국제학술지 ‘사이언스(Science)’는 매년 연말이면 한 해를 빛낸 과학계 혁신적인 사건 10가지를 꼽아 발표한다. 15일(한국시간) 공개된 올해의 최고의 혁신적인 사건으로는 인슐린 분비 조절 호르몬인 ‘글루카곤 유사 펩티드-1(GLP-1)’을 타깃하는 비만 치료제가 꼽혔다.
개발자도 몰랐던 비만 치료제의 혁신
GLP-1 작용제는 본래 1980년대 당뇨병 치료를 위해 개발된 약물이다. 1990년대에는 GLP-1을 쥐의 뇌에 조사했더니 식욕이 떨어진다는 내용의 연구도 나왔다. 2005년 ‘엑세나티드’, ‘리라글루타이드(삭센다)’ 등의 약물이 당뇨병 치료를 위해 승인됐는데, 2014년에는 비만 치료 목적으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다. 2021년 세마글루타이드(위고비)가 승인되면서 GLP-1 기반 비만치료제 붐이 일었다. 위고비는 하루 1~2회 주사해야 하는 다른 약물과 달리 일주일에 한 번만 맞아도 효과를 보이기 때문이다.

올해 진행된 임상 시험에서 체중 감량 외 다른 건강상 이점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비만 및 심부전 환자 500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실험에서 세미글루타이드를 접종한 환자가 심장 관련 질환 개선이 2배 더 좋았다. 또한 과체중 및 심혈관계 질환 환자 1만7,000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대규모 임상 실험에서도 GLP-1 작용제 투여가 심장 마비 및 뇌졸중 위험을 20% 가량 낮추는 것으로 확인됐다. 더 나아가 담배나 약물 중독 치료를 위한 임상 시험도 진행 중이다. 연구자들은 GLP-1 작용제가 쾌락에 대한 욕망을 조절하는 뇌 수용체에 결합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개발자도 몰랐던 다양한 효과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사이언스’는 GLP-1 작용제를 올해의 혁신으로 꼽았다.
약해진 바다의 심장
바다의 심장은 남극에 있다. 남극 저층수는 수온이 낮고 염분이 높은 고밀도 해수로 수심 4,000m 이하에서 해저를 따라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으로 퍼져 나간다. 그 과정에서 열, 탄소, 산소, 영양분 등을 순환시킬 뿐만 아니라 대기 중의 탄소를 심해에 격리해 기후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때, 연간 지구에서 배출되는 탄소의 3분의 1가량이 포착된다. 그런데 기후변화로 인해 남극 주변 만년설과 빙하 용융수가 해양에 다량 유입되면서 해저까지 도달하는 해수가 줄어들고 순환 속도가 느려지고 있다. 지난 3월 미국 연구진은 1970년대 이후로 순환 속도가 최대 20% 감소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고, 호주 연구진은 1992년부터 2017년까지 심해 물의 순환이 30%가량 감소했다고 발표했다. 왜 순환이 감소했는지, 그리고 감소에 미친 인류의 영향은 얼마나 되는지, 이 감소가 기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수소 에너지 혁명의 신호탄
1859년 에드윈 드레이크는 미국 펜실베이나주에서 원유를 채취했다. 이날은 현대 석유 사업의 원년으로 기록됐다. 올해는 수소 사업의 원년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독극물이 된 석유 사업과 달리 수소 사업은 지구의 치료제가 될 것이다.

1987년 서아프리카 말리의 한 마을에서 가뭄으로 물이 말랐다. 우물을 만들기 위해 주민들은 인부를 불러 땅을 팠지만 지하수를 찾는 데 실패했다. 한 인부가 담배를 피우려고 불을 붙이는 순간 큰 화재가 발생했다. 수주 만에 불길을 잡고 구멍을 다시 메웠다. 2012년 말리의 석유회사 ‘페트로마’가 봉인됐던 구멍을 25년 만에 다시 열었다. 분석 결과, 구멍에서 나오는 기체의 98%가 수소였다. 페트로마는 이곳에 300kW급 소형 화력발전소를 건설했고, 주민들은 수소를 태워 나온 전기를 사용했다. 10년이 지난 현재까지 가스 압력이 감소하지 않았다. 심도 깊은 곳에서부터 수소가 계속 나온다는 것이다.
석유와 천연가스는 과거 살았던 동식물의 사체가 변해 만들어진다. 즉, 매장량이 정해져 있다. 반면 천연수소는 지질 활동에서 만들어진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은 천연 수소의 추정 매장량은 1조t(톤) 이상으로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수소를 연료 및 비료 성분으로 사용하기에 충분한 양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천연 수소는 ‘골드 수소’라 불리는데, 이를 추출하는 곳이 재생에너지 등을 이용해 만드는 ‘그린 수소’보다 경제적이다. 전 세계에서 천연 수소를 찾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으며 한국석유공사 역시 국내 다섯 곳에서 의미 있는 수준의 수소 발생을 확인했다.
날씨를 예측하는 AI
오늘날 일기 예보는 수주 뒤의 날씨 변화까지도 꽤 정확하게 예측한다. 날씨 예측을 위해서는 복잡한 방정식을 계산해야 하는데, 백만 개 처리장치를 가진 슈퍼컴퓨터가 수행해도 수 시간이 소요된다. 그만큼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 구글, 후아웨이, 엔비디아 등은 올해 딥러닝을 통해 날씨를 예측하는 인공지능(AI)을 개발했다. 이들 AI는 지난 40년간의 날씨 데이터를 훈련하고 기온, 바람, 온도, 습도 등 날씨 변수 간의 연결을 학습하여 10일 이후까지의 날씨를 예측한다. 복잡한 방정식을 풀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일반 컴퓨터 1대로 1분 내 기상을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고 유용하다. AI 예보가 당장 기존의 기상예보를 대체할 수는 없지만 기존 날씨 예측을 보완하는 유용한 도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말라리아에 대항하는 강력한 무기
2021년 세계 최초의 말라리아 백신 ‘모스퀴릭스’가 출시된 지 2년 만에 두 번째 백신인 ‘R21(메트릭스M)’이 지난 10월 세계보건기구(WHO)의 승인을 받았다. 1940년대부터 지금까지 140건의 말라리아 백신 임상시험이 진행됐지만, WHO가 승인한 백신은 모스퀴릭스가 유일했다. 모스퀴릭스의 말라리아 예방 효과는 우수하지만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점이 문제였다. 말라리아 영향 지역에서 태어나는 어린이는 4000만 명인데, 모스퀴릭스는 고작 450만 명에게만 접종을 할 수 있는 수준이다.
메트릭스M은 모스퀴릭스와 마찬가지로 말라리아 열대열원충을 유발하는 기생충 항원 단백질을 기반으로 한다. 1회분 가격은 2~4달러로 모스퀴릭스의 절반 정도고, 적은 용량을 투여해도 같은 효과를 낸다. 말리, 케냐, 탄자니아 등 말라리아 감염이 많은 지역에서 진행된 대규모 임상 시험에서 75%의 말라리아 예방 효과를 확인했다. 무엇보다 메트릭스M은 1년에 1억 회 분을 생산할 수 있다. 말라리아 백신 수요와 공급 간의 격차를 메울 것으로 기대된다.
알츠하이머 치료제 시장 활짝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알츠하이머 항체 치료제 ‘레카네맙’을 승인한 데 이어, ‘도나네맙’도 승인 가시권에 들었다. 레카네맙은 초기 알츠하이머 환자 대상 임상 3상에서 위약군 대비 인지 저하를 27% 늦추는 것으로 확인됐다. 도나네맙은 알츠하이머 환자 대상 임상 3상에서 인지 저하를 위약군 대비 35% 지연하는 효과를 나타냈다. 두 약물 모두 정맥 주사 방식으로 레카네맙은 2주마다, 도나네맙은 4주마다 투약이 필요하다.
치료의 부작용은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다. 알츠하이머 환자 중 APOE4라는 알츠하이머 유전자 변이를 가진 경우 부작용에 취약하다. 뇌졸중을 예방하거나 혈전을 용해하기 위해 혈전 예방 약물을 복용하는 사람들도 부작용 위험이 높다. 그래서 레카네맙의 경우 치료 전 치매 유전자 검사를 받도록 권고된다.
인류의 북미 대륙 진출, 생각보다 빨랐다

지금까지 북미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간의 흔적은 약 1만3000년 전에 쓰였던 석기 창과 바늘 등이었다. 이를 토대로 약 1만6000년 전 시베리아에서 거주하던 원시 인류가 빙하기 동안 알래스카로 이주한 뒤, 빙하기가 끝나며 아메리카 대륙으로 유입됐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인류의 북미 대륙 진출은 최소 5000년 이상 앞당길 증거가 올해 나왔다. 뉴멕시코주 화이트 샌즈 국립공원에서 발견됐던 고대 인류의 발자국이 약 2만1,000~2만3,000년 전에 찍힌 것으로 추정된다는 연구가 나왔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발자국 주변 지면에서 발굴된 식물 종자의 탄소 연대 측정 등을 통해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 한편, 일각에서는 주변에 호수가 있어 식물 종자들이 물에서 나온 오래된 탄소를 흡수해 실제보다 더 오래된 것처럼 나올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연구진은 화로나 돌 도구 등 추가 증거를 발견하길 기다리고 있다.
우주 진화의 비밀 알려준 배경 중력파 관측
우주 곳곳에 퍼져 있는 배경 중력파가 올해 처음 관측됐다. 미국, 캐나나 등 190명 이상의 과학자가 소속된 ‘북미 나노헤르츠 중력파 관측소’ 연구진은 총 68개의 펄서에서 나온 중력파를 15년간 관측한 결과를 6월 발표했다. 중력파는 질량을 지닌 물체가 가속운동을 할 때 생기는 중력 변화가 시공간을 전파해 가며 물결처럼 출렁이는 것을 의미한다. 강력한 자기장을 갖는 중성자별 펄서를 통해 중력파를 관측한다.
최초 중력파 관측은 2015년 레이저간섭계중력파관측소(LIGO)에서 이뤄졌다. 이후 지금까지의 중력파 관측은 급격하고 순식간에 발생하는 현상으로 우주에 무수히 존재하는 중력파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반면, 북미 나노헤르츠 중력파 관측소 연구진은 15년간 저주파인 배경 중력파를 검출했다. 연구진은 초거대질량 블랙홀 쌍성이 합쳐지면서 중력파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배경 중력파 관측은 우주의 진화나 은하가 얼마나 자주 병합되는 지 등 정보를 줄 단서다.
신진 연구자들의 반란
이공계 대학원생이나 박사후연구원의 낮은 처우는 오래도록 문제였다. 지난 해 말과 올해는 이들이 결집하여 불만을 직접적으로 내놓는 사건들이 있었다. UCLA, UC어바인 등 미국 캘리포니아대(UC) 산하 10개 캠퍼스의 소속 교직원 4만8000명은 지난 해 11월 더 나은 급여와 혜택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학문 파업으로 기록됐다. 파업은 대학원생과 박사후연구원의 상당한 급여 인상을 이끈 뒤 종료됐다. 미국뿐만 아니라 캐나다에서는 수천 명의 학문 종사자들이 지난 5월 대학원생과 박사후연구원에 대한 정부의 자금 증액을 요구하며 대규모 1일 시위를 벌였다. 졸업 후 수익성이 높은 산업으로 가는 이공계 인력 증가로 인해 최근 몇 년간 많은 교수들이 공석인 박사후연구원 자리를 채우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독일 역시 대학의 변화를 촉구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엑사 스케일의 시대 개막

최초의 엑사 스케일 컴퓨터가 올해 탄생했다. 미국 오크리지국립연구소의 ‘프론티어(Frontier)’는 지난 11월 발표된 슈퍼컴퓨터 순위 톱500(Top500)에서 성능 1위를 차지했다. 프론티어의 실측 성능은 1.194엑사플롭스(EF)로 1초에 119.4경 번 연산이 가능하다. 중국도 엑사 스케일 컴퓨터를 가동 중이라는 잠정적 보도가 있었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된 바는 없다.
프런티어는 약 3년 뒤쯤 과학자들이 사용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별들의 폭발을 시뮬레이션하고, 아원자 입자의 특성을 계산하고, 핵융합과 같은 새로운 에너지원을 조사하고, 질병의 진단과 예방을 위한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목표를 우선시한다. 내년에는 아르곤국립연구소를 비롯한 독일, 프랑스, 일본 등에서 엑사 스케일 컴퓨터가 개발될 것으로 전망된다.
- 권예슬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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