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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성의 발원지, 베리에이션 산책으로 무한한 베리에이션 세계 즐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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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왔다. 환경의 변화가 클수록 인간은 신체적 동질성을 제외한 다른 면에서는 크게 변화하였다. 넓은 의미에서의 인류의 변형은 인종적, 민족적, 문화적, 종교적 차이에서 비롯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인류의 변형을 따진다면 지역적, 학문적, 철학적 차이에서 생겨난다. 창의성의 시작은 이러한 차이의 존재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한글의 기본 자음과 모음 스물넷으로 그리고 26개의 영어 알파벳으로 얼마나 많은 다른 의미의 단어가 만들어지는가. 그 단어를 사용하여 계속 새로운 소설과 시가 쓰여지고 있다. 피아노의 88개 음을 이용해서 음계에 따라 얼마나 많은 연주곡과 노래들이 작곡되어 왔는가.

궁중음악에서 클래식, 현대 음악, 대중 가요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노래는 계속 발표되고 있다. 인간의 신체는 있는 그대로이다. 팔과 다리 등 지체들을 박자에 맞게 움직여 표현하는 춤은 안무가의 상상에 따라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다. 이처럼 베리에이션(variation)은 창의성의 발원지이다.

베리에이션의 표현

구체적으로 베리에이션은 다양하게 드러난다.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바그너, 브람스 같은 독일의 낭만주의 작곡가들을 보자. 그들은 같은 나라 출신이지만 저마다의 음악세계는 판이하다. 성장 배경과 가르침을 받은 스승, 영감을 느끼고 전달하는 방식, 교우 관계 등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또 한 연주자가 같은 곡을 연주할 때도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수 있는데, 이는 외적 환경과 내적 환경 모두 베리에이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외적 환경은 연주하는 시간, 습도, 풍향, 온도 등 인체의 오감(청각·시각·후각·미각·촉각)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다. 내적 환경은 신체와 심리 상태이다. 잠을 충분히 잤는지, 식사를 했는지, 칭찬을 들은 뒤인지, 기쁜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슬픈 일을 겪었는지 등에 따라 달라진다.

이것은 음악만이 아니고 문학이나 무용, 미술 등 예술 전반에 해당한다. 베리에이션을 이해하고 존중한다는 것은 곧 창의력을 중시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양한 조건에 따라 무수한 개성을 지닌 창조물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베리에이션이 무시된, 고정된 하나의 틀만을 인정하고 존재하도록 강압했다면 인류는 현재와 같은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비단 예술만에 국한된 일은 아니다. 창조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이 인류 문명 발전에 박차를 가했기에 자동차가 달리고 비행기가 날고 인공위성도 떠 있는 것이다. 결국, 창의성은 베리에이션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산책은 무한한 베리에이션의 장소

같은 산책로를 매일 걷더라도 매번 느낌이 다르다. 왜냐하면 먼저 오감이 받아들이는 산책로의 주변 환경이 다르고, 주변 환경을 받아들이는 내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평생 매일 다른 하늘을 보고 산다.

마주치는 풀과 나무도 어제와 다르다. 계절에 따라 일기의 변화에 따라 초목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걸으면서 발에 닿는 흙, 잔디, 풀, 작은 돌이 빚어내는 베리에이션은 정해진 알파벳이나 음표의 수보다 다양하기 때문에 훨씬 더 많은 베리에이션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산책은 무한한 베리에이션의 세계로 초대한다.

일정한 속도와 보폭을 반복하다 보면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걷게 된다. 마치 자동차의 크루즈(cruise) 기능이나 비행기의 자동항법장치(auto-pilot)가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인류가 오랜 세월 반복해 온 동작이기에 새가 둥지를 만드는 것처럼 본능에 의해서 걷고 있는 것이다. 새가 학습하지 않고도 둥지를 짓는 것처럼, 유전인자(DNA) 속에 이미 프로그램화되어 있어 의식하지 않고도 걷게 된다.

눈에 보이는 것들, 피부에 느껴지는 습도, 바람의 세기, 들렸다 안 들렸다 하는 자신의 발소리, 숨소리, 풀잎이나 나뭇잎에 바람이 스치는 불규칙한 소리, 새소리, 지나가는 행인 소리. 이 모든 것들은 동시에 벌어지지만 의식하고 느끼는 것은 한두 가지뿐이다. 하지만 무의식 중에 느끼는 것들 또한 자신이 경험하게 되는 베리에이션이다. 집중해서 의식적으로 들었건(인지), 무심코 느꼈던(감지) 다 자신의 뇌리 속에 자리 잡는 것이다. 산책 중에 걷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떠오르는 영감’을 잡는 순간, 산책의 묘미를 느끼게 된다.

오감으로 느끼는 산책

산책 중에는 자연미와 인공미를 모두 느낄 수 있다. 걸으면서 집, 건물, 다리, 벤치, 가로등을 지나치고, 하늘과 맞닿는 산등성이나 지평선, 또는 나무, 숲, 개울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정보화 시대의 우리는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10분 이상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다.

한적한 오솔길을 걸으면서 자연을 감상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도시의 공원과 골목을 따라 산책할 수 있다. 산책하면서 돌, 나무, 꽃을 보기만 해도 된다.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되새겨 기억에 담고, 때로는 메모하면서 생각도 물 흐르듯이 흘러가게 둔다. 원치 않는 기억이 되살아나거나 떨치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의식적으로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쉬면서 걸으면 어느 순간 무의식적으로 호흡하게 된다. 그것을 인지했을 때, 의식적으로 오감을 작동하면 원치 않는 기억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평평하고 단조로운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된 길보다 흙이나 잔디 위를 걷는 것이 좋다. 훨씬 다채로운 베리에이션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흙으로 이루어진 땅은 아스팔트처럼 일률적이지 않고 미세한 요철이 있어 발에 느껴지는 감촉이 변화무쌍하다. 다양한 감촉은 다양한 베리에이션을 낳아 두뇌 작용까지 원활하게 해준다. 이는 사고의 베리에이션으로 이어진다.

산책하며 머리와 마음 사색

근대 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이작 뉴턴은 케임브리지대 시절인 1664년, 페스트가 영국 전역에 퍼져 2년 동안 고향인 링컨셔의 울즈소프에 있었다. 2년간의 한적한 시골 생활에서 산책을 통해 과학과 철학에 대한 사색과 실험에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 사과 일화로 유명한 ‘만유인력의 법칙’도 이때 발견했다.

또 산책은 인간이라는 우주의 작은 존재를 인정하고 직시하게 만든다. 높은 창공을 보며 경탄하지만 저 멀리 창공의 높이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거대한 우주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스스로 겸허해질 수 밖에 없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철학자들이 산책을 통해 영감을 얻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안동에는 ‘퇴계 녀던 길’이 있다. 이 길은 청량산에 이르는 길인데, 퇴계는 주자가 무이산을 예찬했듯 청량산을 벗 삼았다. 퇴계 선생은 녀던 길을 걸으며 사색했다. 퇴계는 ‘유산(遊山)은 독서와 같다’고 했다. 산에 가는 것 자체가 마음 수행, 지식 수행이란 뜻이다.

루소는 “나는 걸으면서 명상에 잠길 수 있다. 나의 마음은 나의 다리와 함께 작동한다”고 했다. 키르케고르는 “걸으면서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고백했으며, 니체는 “심오한 영감, 그 모든 것을 길 위에서 떠올린다”고 했다.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에는 헤겔, 야스퍼스, 막스 베버, 괴테가 걸었던 ‘철학자의 길’이 있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에게 산책은 생활의 기준이었기에 정확히 정해진 시간에 산책에 나섰고, 이웃들은 칸트를 보고 시간을 맞추었다. 다산 정약용도 유배지 다산초당에서 강진 백련사까지의 오솔길을 걸으며 ‘목민(牧民)’을 생각했다. 산책은 단순한 다리 운동이 아니라 머리와 마음을 깨우쳐주는 사색의 방법이다.

산책하며 떠오른 아이디어는 실에 구슬을 꿰듯이 하나하나 이어져 새로운 아이디어가 창작과 발명으로 이어진다. 같은 산책길을 걸어도 갈 때는 못 보았던 것을 올 때 발견하기도 한다. 바로 보는 각도가 다르기 때문에 갈 때는 보이지 않았거나 가려졌던 것이 보이는 철학으로의 길을 열어준다. 이와 같이 산책은 인생의 이치도 사물의 관점도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게 만든다.

조명진 유럽연합 집행이사회 안보전문역
저작권자 2011-03-25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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