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방식이 경제불황을 일으켜”
이 말은 또 일본이 이제는 불황의 늪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도 있다. 한편, 일본이 경기침체에서 벗어나 회복세로 돌아서고 있는 반면 한국은 일본처럼 장기 불황으로 빠져들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미 시작됐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세계를 제패했던 소니와 아이와의 신화가 무너진 것은 이 ‘잃어버린 10년’ 기간 동안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파나소닉, 토요타 등 세계시장을 호령했던 일본의 대표적 브랜드들의 명성이 무참히 깨지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다.
물론 한국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수출은 잘되고 있다. 중국이 무섭게 추격하고 있지만 기업의 국제경쟁력도 지금까지는 괜찮은 편이다. 문제는 내수침체 장기화에 따른 불황이다. 국내경기가 시원치 않은데 해외경기가 계속 좋을 수는 없다. 한국이 경기침체에 빠지면 일본처럼 잘 나가고 있는 삼성과 LG의 신화도 무참히 깨질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좋은 신기술도 빛을 보기 어려울 것이다. 과학기술의 원동력은 경제다.
“10년 동안 유명 브랜드들 다 깨져”
일본이 과학기술이나 신기술이 없고 한국, 홍콩과 같은 후발주자의 추격으로 장사가 안돼 불황에 빠졌다면 중학생 수준의 논술이다. 경기가 없으면 산업이 없고 과학기술도 없다는 교훈을 일본에서 배워야 한다. 요즘 불고 있는 한류로 우리가 일본에 대해서 우쭐대며 폼을 재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일본은 여전히 엄청난 경제대국이며 신기술 보유국이다. 콧대 높은 미국이나 유럽은 일본을 아시아의 한 국가(an Asian country)로 보지 않고 그렇게 표현하지도 않는다. 아시아에서 독립된 ‘재팬’이다. 그들에게 일본은 만만한 아시아 황인종 국가가 아니다.
우리나라에는 ‘잃어버린 30년’이라는 말이 있다. 트롯 가수 설운도 씨가 80년대 초에 부른 노래 제목이다. 그동안 입국이 금지됐던 친북한 단체인 일본 조총련계 한국인들이 서울을 방문해 이산가족을 만나 상봉하는 슬픈 상황을 노래한 것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지금도 나이든 사람들이 즐겨 부른다. 설운도 씨를 화려한 무대로 등장시켰고 여전히 그의 간판 브랜드인 노래이다. 30년은 6.25가 일어난 1950년과 1980년 사이의 갭을 말한다.
일본의 ‘잃어버린’과 한국의 ‘잃어버린’ 속에는 공통점이 있다. 빼앗겼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의 ‘30년’은 북한에 빼앗겼다는 의미도 되고 아니면 주변 강대국에 빼앗겼다는 뜻도 된다. 그래서 30년 동안 떨어져 살아야 하는 고통을 참아야만 했다.
일본은 그들의 고유한 정통성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지난 10년 동안 경제불황을 겪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경영방식을 고수하지 않고 미국의 경영방식을 따르다 보니 이것저것도 아닌 어정쩡하게 세월만 보냈다는 이야기다. 반미정서도 자리잡고 있다. 지난 10년은 ‘일본의 것’을 잃어버린 기간이라는 거다. 그래서 ‘잃어버린 10년’을 극복하기 위해 이제 일본 방식대로 가자는 이야기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풍요로웠던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다.
“일본적 방식으로 되돌려라”
마쓰다 박사는 “오늘날 소위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것은 미국적 방식”이라고 지적하면서 “일본은 사실상 지난 10년 동안 일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미국적 방식을 고집해 왔으며 이제는 그 불편한 옷을 과감히 벗어 던질 때”라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마쓰다 박사는 주주자본주의, 성과제 등 미국적 방식이 일본 경제와 사회에 어떤 악영향을 끼쳤는지를 세부적으로 분석하고 왜 그러한 방식이 일본 사회에서 철회돼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또 고유한 경영문화로 ‘일본경영의 혼’이라는 종신고용제와 집단주의가 왜 우수한 시스템인지를 설득력 있게 분석하고 있다.
종신고용제와 집단주의는 일본 ‘경영의 혼’
몸에 맞지 않는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일본. 일본은 그것을 벗으려고 한다. 그것은 비단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또한 한국적 방식을 상당부분 버리고, 글로벌 스탠다드를 지향해 왔다. 그 결과 막대한 국부유출을 실감하고 있다. 고용에 대해 불안한 심리감, 조기퇴직 등 사회시스템의 훼손도 경험하고 있다.
이 책은 일본의 사례를 거울로 삼아 우리가 어떻게 세계 경제의 파고를 이겨내야 할지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일본을 강 건너 불 구경하듯이 바라볼 수만은 없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은 절실하고도 중요한 교훈이다.
경제가 추락하면 과학기술도 없다. 물론 과학기술이 없으면 경제도 추락한다. 산업과 경제에 연결시키지 못하는 과학기술은 사장될 수밖에 없다. 시장가치를 창조하는 과학기술만이 존재한다. 그 시장을 만드는 것은 바로 경제다.
미국에 대해 혹독하리만치 냉소적인 글로 유명한 마쓰다 박사는 지난 10년 동안 미국을 본받은 기업들은 다 무너졌지만 일본식 경영을 고집한 기업들은 살아 남았다고 꼬집는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살아 남은 명문 브랜드는 오직 캐논뿐이다.
“미국식 경영을 거부한 캐논만 살아 남아”
사실 소니의 신화가 무너진 것은 그들의 기술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신기술 개발이 없어서도 아니다. 경제가 무너지면 산업이 무너진다. 과학기술도 빛을 보지 못한다. 똑똑한 젊은 천재 5명이 모여 그야말로 신기한 만병통치 신약(新藥)을 개발했다고 해서 바이오 산업이 우뚝 설 것이라는 주장은 천만의 말씀이다.
독일 최대 통신사 DPA의 고더 서울 지국장의 지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국 여성과 결혼한 그는 본지와 만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처음에는 한국의 가족중심의 문화가 너무 보수적이고 현대사회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영토가 작고 자원 빈국의 성장동력은 가족중심에 의한 단합과 응집에 있다고 생각한다”
또 국민적 영웅인 히딩크 감독의 지적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월드컵 4강은 ‘가문의 영광’이라는 한국 특유의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선수들이 그 영광을 위해 금전적으로 풍요한 대접을 받지 못하면서도 노력한 덕분에 그 신화를 이루어 낼 수 있었다.”
한국의 블루오션은?
선진국의 경제를 모방하는 ‘재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이론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블루오션의 창시자인 김위찬 교수와 르네 모보안 교수의 베스트셀러 ‘블루오션 전략’에서 이미 지적했다. 그러나 그 전략을 따라 가느라고 우리나라 모두가 부산하다.
일본은 신(新)재패니즈 스탠더드로 향하고 있다. 재패니즈 스탠더드가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주장이다. 여기에는 일본의 과거 전통과 문화로 돌아가자는 ‘르네상스’운동이 깔려 있다. 한국은? 우리의 모델은 계속 미국이어야 하는가? 한국적 스탠더드는? 세계화(globalization)는? 좀더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도 시대에 뒤떨어졌다며 이미 벗어 던져버린 바지 저고리를 찾아 다시 세탁해 입는 신(新)코리언 스탠더드를 추구할 때는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은 경제의 성장동력이다. 경제 또한 과학기술 발전의 중요한 성장동력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해서도 경제가 추락해서는 안 된다. 창피하다고 생각할 필요 없이 일본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 김형근 편집위원
- 저작권자 2006-03-09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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