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연구개발(R&D) 예산이 19조원 가량 투입되지만 대부분 상위 20%를 위한 연구에 그치고 있다. 나머지 80%까지 포괄하는 새로운 R&D 패러다임이 필요하다."(성지은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우크라이나는 핵기술 세계 3위, 인공위성 분야 세계 6위의 과학 강국이다. 그런데 국민들 대다수는 매우 어렵게 산다. 국민들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R&D가 필요한 이유다."(송기민 한양대학교 산학협력단 R&SD 전략센터 부센터장)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사회적 기업이라는 말을 굳이 쓰지 않는다. 기업이라면 크든 작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익만 좇는 기업을 재무적 기업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김재현 크레비스 대표)
2일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주최로 국회도서관에서 열린<과학기술+사회혁신 포럼> '사회문제 해결형 연구개발 사업 국회 대토론회'에서는 기술 개발 자체가 목적이 아닌 복지, 안전, 고령화 등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술을 개발하고 수혜자인 시민을 리빙랩에 직접 참여시키는 형태의 R&D에 대한 열띤 토론이 전개됐다.
김성수 제윤경 국회의원이 공동으로 마련한 이 행사는 산업경쟁력 강화와 기초 원천 연구에 치우쳐 그동안 소홀히 했던 사회문제 해결형 R&D에 대해 종합적인 문제제기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이날 참석한 전문가들은 이 분야에 국가 R&D 비중을 꾸준히 늘리고 연구개발이 실제 일반 국민의 생활 개선과 사회 시스템 혁신으로 이어지도록 법제도 개선, 인프라 구축, 부처간 협업과 시민사회 참여 등의 생태계 조성이 필요하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김성수 의원은 "사회문제 해결형 R&D는 시민들의 참여를 전제로 하고 그 효과가 국민들의 일상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며 "아직은 속도가 더디지만 기존 관행을 극복하고 평가시스템을 정비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종국 STEPI 원장도 "앞으로 환경, 보건, 고령화 등 여러가지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연구개발의 패러다임 전환 뿐 아니라 국정 어젠더 전체를 바꿔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구자는 사회로 달려나가고, 시민은 연구실로 들어오는 '리빙랩'
성태현 한양대학교 전기공학과 교수가 발표한 사례는 사회문제 해결형 R&D 사업이 기존 R&D와 어떻게 얼마나 다른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성 교수는 야간에 공사, 청소 등을 하는 작업자들이 상대적으로 안전에 취약하다고 보고 '야간 작업자의 사고 예방을 위한 발광형 안전 키트 개발'에 착수했다. 일반적인 R&D라면 초기 요구분석 정도만 거친 후 최적의 기술을 찾아 관련 제품을 개발하고 관리감독 기관의 승인을 받으면 그만이다. 이후 이 기술과 제품이 어떻게 활용되는지는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이에 반해 이 과제의 경우 수요자를 만나고 설문조사를 하는 의견 수렴 과정을 R&D 전 과정에 걸쳐 진행한다. 야간작업에 필요한 최적의 발광 소재 기술을 찾는 것은 차라리 쉬운 작업이다. 시제품을 제작해 불만 사항을 체크하고 새벽에 달려가 환경미화원에게 직접 옷을 입혀서 반응을 듣고 평생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은 성동구 청소행정과, 서울시 생활환경과, 세종시 도시청결과 담당자들과 만나 의견을 나누는 등 해보지 않은 일들을 해야 했다.
수요자, 관계자가 직접 참여해 함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리빙랩(Living Lab)을 수행한 것만도 11개월간 35차례에 달한다.
성태현 교수는 "연구 성과물로만 보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하는데도 수요자들에게 물어보면 눈이 부시다, 무겁다, 덥다 등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동안 해왔던 연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며 "그래도 환경미화원들이 '우리를 위해 신경써줘서 고맙다'고 말할 때는 정말 보람이 있다"고 말했다.
송위진 STEPI 사회기술혁신연구단 단장은 "사회문제 해결형 R&D를 수행하는 것이 힘들기는 하지만 개발한 기술이 쓰여지는 것을 직접 보고 수요자로부터 감사의 말을 들어본 연구자들은 '인생 연구개발사업'이라고 할 정도로 큰 보람을 느낀다"고 전했다.
다수를 위한 R&D, 사회를 위한 R&D
이날 참석자들은 세계 5~6위를 달리고 있는 우리나라 국가 R&D 예산을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부분에 비중을 좀 더 늘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성지은 STEPI 연구위원은 "유럽의 경우 R&D의 40%가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쓰여지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미흡한 수준"이라며 "저성장과 양극화가 뚜렷해지는 시대에 R&D가 더 이상 상위 20%를 위한 투자가 아닌 나머지 80%의 국민들에게도 도움을 주는 부분에 보다 더 투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성위원은 "그동안 정부 부처들이 복지, 환경 등 각 부처 소관의 사회 문제해결보다는 유관 산업을 육성하는데 치중해왔다"며 "이제부터라도 부처의 진정한 미션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그 역할에 충실할 때"라고 강조했다.
토론자로 나선 고영주 한국화학연구원 대외협력본부장은 "최근 정부 출연연구기관 혁신위원회에서 출연연 혁신에 필요한 의제를 찾고 있는데 원천 기술과 사회문제 해결, 이 두 가지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다"며 "R&D에서 사회 문제 해결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미래 가치를 만드는 새로운 R&D
사회문제 해결형 R&D가 가져올 미래 가치에 대한 논의도 이어졌다. 고영주 본부장은 "일반적으로 산업 R&D는 돈을 만들고 문제 해결 R&D는 그것과 거리가 멀다고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게 않다"며 "사회 문제를 해결하면서 새로운 일자리, 새로운 방식의 비즈니스 모델 등이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
최근 출연연 연구소 기업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사회적 기업이 기술로 무장해 새롭게 거듭난다든지, 리빙랩 자체가 사회적 기술기업으로 전환되는 등의 변화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고 본부장은 장기 불황을 겪으면서 기업들의 성장률이 떨어지고 있는 일본에서 유독 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히타치를 사례로 들었다. 히타치는 기업의 전사적인 미션을 사회문제 해결로 바꾸고 빅데이터로 국민의 요구를 분석해 대응하면서 비즈니스적으로도 성공하고 있다고 전했다.
사회문제 해결형 금융사업을 벌이고 있는 크레비스 김재현 대표는 "중국 VC(벤처캐피털)를 많이 만나는데 그들은 더 이상 한국의 기술 기업에 대해 투자할 의사가 없다"며 "그러나 중국이 여전히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회적 기업에 대해서는 매우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크레비스가 투자한 12개 기업 가운데 상당수가 해외에서 매출을 올리는 등 사회적 기업의 비즈니스적인 가치도 입증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김대표는 "가장 사회적인 기업이 가장 경제성이 있는 기업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실현되고 있다"고 말했다.
사회문제 해결형 R&D를 위한 과제
아무리 작은 사회 문제도 해결이 쉽지 않은 것처럼 R&D 사업 역시 여러가지 난제가 많다. 이수범 서울시립대 교수는 횡단보도에서 보행자, 특히 노인의 사망 부상 사고가 잦아 이를 해결하기 위해 횡단보호 신호등 체계를 바꾸는 R&D 사업을 진행한 경험을 발표했다. 보행자 유무에 관계없이 기계적으로 켜졌다 꺼지는 신호등은 운전자로 하여금 방심이나 착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에 보행자가 있을 때만 켜지는 신호등을 연구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연구가 끝나 신호등 설치를 하려고 보니 인증 기관은 있지만 인증을 어떻게 해야할지 프로세스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송위진 단장은 "이 같은 문제까지 해결이 돼야만 비로소 R&D 사업이 끝나는 셈이니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라며 "그래서 사회문제 해결 R&D를 사회 시스템 혁신 프로젝트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말한다.
송기민 교수는 법제도 등 실용화에서 요구되는 여러가지 요소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우선 원격의료처럼 법제도가 R&D의 결과물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거나 소방 장비처럼 공익성은 있으나 상업성이 없어 개발이 위축되는 경우, 공익성과 사업성 모두 있지만 인프라가 마련돼있지 않아 단가가 높아지는 경우 등 상황에 맞게 대응책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 R&D 결과물을 테스트하고 실증할 수 있는 인프라가 부족한 점, 부처간 협업 문제 등도 반드시 해결돼야 하는 과제라고 지적했다.
- 조인혜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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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6-11-03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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