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폐사율 100%에 달하는 돼지 전염병인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발병 양상이 심상치 않다. 국내에서는 2019년 9월 파주시의 양돈농장에서 첫 돼지열병 양성으로 확진된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발생 사례가 나오고 있다. 전염성이 높고 파괴적인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지며 식품 안보와 생태계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 지난 1월 19일 최고 권위의 국제학술지 ‘사이언스(Science)’는 재앙적인 상황에 비해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아프리카돼지열병에 주목해야 한다는 내용의 서한(Letters)이 실렸다.
치사율 100%의 ‘돼지 흑사병’
아프리카돼지열병은 지름이 약 200nm 정도인 바이러스가 멧돼지과 동물의 면역세포를 공격하면서 생긴다. 1921년 케냐에서 처음으로 보고됐다. 돼지가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죽기 때문에 ‘돼지 흑사병’으로도 불린다. 일반적으로 감염된 야생 멧돼지로 인해 자연적으로 전파되거나, 감염된 돼지고기가 들어간 음식물, 오염된 물건, 바이러스를 지닌 흡혈 곤충 등에 의해 전파된다.

멧돼지과 동물들만 감염되는 질병이라 사람에게는 전염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병이 무서운 이유는 무서운 생존력 때문이다.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는 산성도(pH) 4~10 사이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고, 배설물 속에서는 11일, 냉장된 고기에서는 최소 15주, 훈제 햄이나 소시지 안에서는 무려 3~6개월 동안이나 살아남는다. 발생국에서 구입한 돼지고기나 햄, 소시지 등을 국내로 가지고 들어오면 돼지들에게 치명적인 전염병을 퍼뜨릴 수 있다.
음식물 쓰레기도 위험하다. 음식물 쓰레기가 아프리카돼지열병을 전파하는 매개원이 될 수 있다. 국내에서는 아프리카돼지열병 예방을 위해 남은 음식물(잔반)을 사료로 활용하지 못하도록 ‘폐기물 관리법’을 2019년 개정했다. 실제로 중국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의 피해를 입은 농가 중 44%가 잔반을 먹여온 농가였다.
세계 3번째로 큰 섬의 돼지들에게 닥친 재앙

아시아 최대의 열대 우림이자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섬인 보르네오섬에 미친 영향은 더 심각하다. 사이언스에 게재한 서한을 통해 전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의장인 에릭 마이야르드 교수는 “아프리카돼지열병은 2018년부터 아시아 지역 돼지 개체 수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으며, 특히 보르네오섬에서는 개체 수가 100%까지 무너졌다”며 “특히, 멧돼지과의 포유류인 수염 돼지(Beard Pig)는 멸종 직전에 놓였다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지역 원주민들에게 수염 돼지의 의미는 꽤 크다. 우선, 사냥한 야생 동물 총 무게의 81%가 수염 돼지일 정도로 주 식량이다. 뉴기니 섬에서 수염 돼지는 가족이다. 부족 여성들은 돼지 새끼를 자식처럼 키우는 사회적 문화가 있다. 마이야르드 교수는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돼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생활하는 다른 지역까지 확산하지 않도록 국제적인 연구와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프리카돼지열병 백신 개발을 위한 임상 시험 결과는 긍정적이다. 문제는 현재 연구 중인 백신은 접종식으로 가정용이나 사육용 돼지에게는 적용할 수 있지만, 야생 돼지에게 적용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서한을 공동 저술한 베누아 고센스 교수는 “야생 돼지에 대한 백신은 현재 연구 중인 방식과는 전적으로 다른 체계가 필요하다”며 “가령, 섭취하는 형태의 백신을 야생 동물들이 섭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보르네오섬 전체에 서식하는 야생 돼지를 먹이로 유인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작업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구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상황에 대한 국제적 공감대다.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에 치명타를 입고 있는 지역은 주로 저소득 국가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사회경제적 중요성을 인정해야 생태계를 보호하고, 지역사회의 불가역적인 손실을 예방할 수 있다. 마이야르드 교수는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가 현재 상태에서 인간에게 감염되지 않더라도, 자연과의 뿌리 깊은 관계를 고려했을 때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 권예슬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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