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 남극 세종기지 주변의 옥빛 빙하와 유빙, 자신의 앞마당처럼 겁 없이 기지를 방문하는 펭귄과 물개를 바라볼 때마다 “아 여기가 남극이구나”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하지만 남극의 정취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백미는 바로 불청객 눈폭풍(블리자드)이 불 때였다.
블리자드가 불기 시작하면 세상은 순식간에 그 자취를 감춰버린다. 뿐만 아니라 갑작스럽게 불어 닥친 블리자드는 사람을 순간 당혹스럽게 만든다. 차갑고 거센 바람 때문에 0도 근처를 맴돌던 체감기온이 순식간에 영하 20도 가까이 뚝 떨어지기 때문이다. 추위가 뼈 속을 파고들어 “얼어 죽을 수도 있겠구나”는 두려움을 난생 처음으로 느끼기도 했다.
물론 사물을 분간할 수 없어 방향조차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야외에서 채집활동을 할 때 블리자드를 만나게 되면 조난을 당할 확률이 커지는 이유다.
강한 바람에 날려 온 미세한 깨진 눈은 모든 지형을 평평하게 만든다. 눈은 땅 위의 작은 웅덩이는 물론이고 얼음이 갈라져 만들어진 위험한 크레바스도 순식간에 감춰버린다. 깊이가 수 십 미터 이상 되는 깊은 크레바스에 빠지면 살아남기가 힘들다.
실제 몇 년 전 아르헨티나 대원 2명이 세종기지로 대피하기 위해 빙원을 건너다 크레바스에 떨어져 목숨을 잃었는데, 가장 큰 원인으로 블리자드가 지목됐다.
때문에 세종기지 월동대에는 기상청에서 파견 나온 기상 예보 전문가가 반드시 상주한다. 그는 세종기지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상변화를 살펴보고 예보하는 일은 맡는다. 세종기지에서 상주하는 대원들 모두 없어서는 필수 인력들이지만 다른 대원들과 달리 기상담당 대원은 조리담당 대원과 함께 하루도 쉬지 못하는 보직이다.
세종기지에서 겪은 블리자드의 추억
필자도 세종기지에 머무르는 동안 몇 차례의 블리자드를 경험했다. 블리자드가 불 때면 기지대장은 연구활동을 포함한 모든 야외활동을 금지한다. 연구도 좋지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날이면 대원들은 모두 기지에서 이전에 채집한 표본을 분류하거나 자료를 정리한다. 기지유지반 소속대원들은 발전기를 비롯한 장비를 점검하기도 한다.
하지만 블리자드가 잦아들지 않고 며칠씩 계속될 때는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시간에는 대원들끼리 모여 탁구를 치거나 당구를 치기도 한다. 그래서 반복되는 작업에 지친 일부 대원들은 가끔 블리자드를 기다리기도 한다.
대원들과 달리 그들의 생활을 취재해 글을 쓰던 필자는 밖으로 나다닐 수 없어 상대적으로 아쉽기는 했다. 필자는 조용히 책을 쓰기 위해 다른 대원들의 숙소와 100미터 이상 떨어진 비상숙소에서 혼자 머물렀는데, 블리자드가 불면 무섭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식당으로 이동을 해야 했는데 강한 바람과 눈 때문에 이동이 쉽지 않았다.
특히 맞바람을 맞으며 움직일 때에는 숨쉬기조차 쉽지 않았다. 그래서 블리자드가 심하게 불 때는 식사를 거르기도 했다. 하지만 차츰 요령이 생겼다. 일기예보를 보고 블리자드가 불 것으로 예상되는 날이면 미리 식당에서 라면이나 간식꺼리를 챙겨 비상숙소에 가져다 놓기도 했다. 하지만 화장실은 어떻게 할 방도가 없어 아무리 블리자드가 심하게 불어도 큰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칼바람을 헤쳐나가야 했다.
이렇게 블리자드 때문에 불편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남극의 정취를 제대로 느낄 수 있도록 하늘이 배려해주는구나” 하는 고마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가끔 펭귄들이 배를 깔고 비상숙소 주변의 바람이 약한 곳에 모여 블리자드를 피하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다.
한국과 계절이 정반대인 남극세종과학기지는 이제 가을을 지나 겨울에 접어들었다. 그 만큼 블리자드도 심해지고 대원들의 생활도 힘들어질 것이다. 연구를 위해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과 수만리 떨어진 대원들이 혹독한 남극의 자연환경 속에서도 건강하게 지내길 간절히 기원할 따름이다.
- 글: 박지환 자유기고가
- 저작권자 2010-06-18 ⓒ ScienceTimes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