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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에너지
꿈꾸는 과학 김민지
2006-10-12

200년 전의 바다가 담긴 『자산어보』 학문에 대한 열정과 지식인의 양심이 돋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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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5월 첫발을 내디딘 '꿈꾸는 과학'은 과학의 대중적 글쓰기와 일러스트레이션을 함께 고민하고 생각하는 글쓰기 공동체입니다. 꿈꾸는 과학은 모두가 즐거운 과학을 이야기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꿈꾸는 과학은 다양한 과학책들을 읽고 토론함으로써 비판적 사고와 과학적 상상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또한 꾸준히 과학 글쓰기를 연습함으로써 자신만의 글쓰기 스타일을 구축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퍼져나가는 꿈꾸는 과학의 소망이 다양한 계층의 독자들에게 과학의 즐거움을 전하고 이러한 즐거움들이 모여 건전한 과학문화를 만들어 나아가길 희망합니다!

[편집자 註]


점잖은 선비 한 사람이 파도가 찰싹거리는 해변에 쪼그리고 앉아 무엇인가를 골똘히 쳐다보고 있다. 가까이 가보니 검푸른 것이 돌에 달라붙어 흐느적흐느적 움직이고 있다. 선비가 손가락으로 슬며시 가운데 부분을 찔러본다. 그것은 손가락을 잡으려 살짝 오므라들었다가 선비가 놀라 손을 빼내자 화난 듯 물을 찍 쏘아댔다.


“모양은 오랫동안 이질을 앓은 사람이 탈항한 것 같고 빛깔은 검푸르다. 조수가 미치는 곳의 돌 틈에서 산다. 모양은 둥글고 길쭉하게 생겼다. 그러나 붙어 있는 돌에 따라서 그 모양이 달라진다. 다른 물체가 닿으면 조그맣게 오므라든다.”


집으로 돌아간 선비는 방금 보았던 생물에 대해 위와 같은 글을 썼다. ‘석항호’라는 이름도 붙여주었다. 石(돌), 肛(항문), 蠔(굴). ‘돌에 붙어 사는 항문과 같은 굴’이라는 뜻이다.


섬사람들은 이것을 ‘말미잘’이라고 부른다. 말미잘은 ‘말’과 ‘미주알’의 합성어이다. ‘미주알’은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놔 봐!’할 때 그 미주알인데 창자의 끝부분, 즉 항문을 일컫는 우리네 옛 말이다. 결국 말미잘은 말의 똥구멍이 되는 셈이다. 좀 지저분하긴 하지만 ‘이질을 앓은 사람의 탈항한 항문’과 ‘말 똥구멍’과 말미잘의 생김새가 기막히게 들어맞는다.


유배생활 하던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지어


해변에 쪼그리고 앉아 말미잘에 똥침을 주고 있던 선비는 『자산어보』로 유명한 정약전이다. 그는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다양한 해양 생물들을 관찰하여 그 생김새와 습성, 분포, 나는 시기와 쓰임새 등을 연구하고 정리했다.


이전에도 『경상도지리지』, 『동국여지승람』, 『우해이어보』등 해양생물을 다룬 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자산어보』앞에서 이들은 감히 책장 한번 소리 내어 넘기지 못한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물고기뿐만 아니라 갯지렁이, 해삼, 말미잘, 갈매기, 물개, 고래, 미역에 이르기까지 총 226개의 표제 항목을 다루고 있으며, 각 항목마다 등장하는 근연종들까지 더한다면 그 수는 훨씬 많아진다.


항목 하나하나의 내용도 대단히 훌륭하다. 이제까지의 책들이 단순히 생물의 이름만을 죽 나열하거나 중국 문헌에 나온 기록들을 그대로 옮기는 데 그쳤다면 정약전은 직접 생물을 채집·관찰하고 해부까지 해가며 얻은 사실적이고 정확한 지식들을 상세히 책에 실어놓았다. 뿐만 아니라 각 생물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어떻게 조리하여 먹는지, 어떻게 기르는지, 어디가 아플 때 좋은 것인지 등의 쓰임새에 대해서도 정성스레 언급해놓은 것을 보면 민중을 사랑했던 학자의 마음도 엿볼 수 있다. 먼 미래에 살고 있는 우리들도 덩달아 『자산어보』를 통해 선조들이 바다에서 난 생물들을 실생활에 어떻게 활용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정약전의 독창적인 작명법과 분류법


『자산어보』 각 항목의 첫머리에는 한자로 된 이름이 적혀 있다. 가령, 그는 망둥이의 일종인 짱뚱어를 ‘철목어(凸目漁)’라고 하였다. 비록 우리말이 아닌 한자로 썼지만 이름만 들어도 눈이 툭 튀어나온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으니 재치가 넘치는 작명이 아닐 수 없다. 『자산어보』에 나오는 이름의 절반 이상이 그가 손수 지어낸 이름들이라고 한다.


원래 부르던 이름을 두고 구태여 새로 이름을 지었던 이유는 물고기가 어느 종과 유에 속하는지를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오늘날 학자들의 연구방법에 빗대면 학명을 따로 지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예컨대 종 단위에서 가자미과에 속하는 넙치의 경우, 접어라는 대표종 옆에 소접, 장접, 우설접, 금미접, 박접과 같은 유사종을 대등하게 다루고 있다.

이 종들은 ‘접’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모여 ‘접어류’가 된다. 그리고 접어류는 ‘비늘 달린 어류’, 즉 ‘인류’라는 상위 범주로 묶인다. ‘우설접’을 예로 든다면, ‘우설’이라는 수식을 통해 이 종이 소 혓바닥만한 두께와 크기로 되어 있으며 접어류에 속하고 비늘이 달려 있음을 단박에 파악할 수 있다.


정약전은 인류(鱗類), 무린류(無鱗類), 개류(介類), 잡류(雜類)의 네 가지의 ‘류’로 물고기들을 분류했다. 비늘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인류와 무린류, 껍질이 단단한 것은 개류,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은 잡류에 해당된다. ‘류’ 아래에는 각각의 특징에 따라 분류된 ‘어’들이 있다. ‘인류’ 중 민어와 조기, 돗돔은 ‘석수어(石首魚)’라는 하위 항목으로 묶이고 있다. 한자의 뜻 그대로 풀이하면 ‘머리에 돌이 들어있는 물고기’가 되는데 이는 곧 물고기의 귓속에 들어있는 석회질의 돌, 이석(耳石)을 뜻한다. 몸의 평형을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이석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인데, 그보다 훨씬 이전에 정약전이 이석을 기준으로 물고기를 분류했던 것이다.


그림 그리듯 자세히 묘사해


처음 정약전의 머릿속에 들어 있던 『자산어보』의 모습은 설명과 그림이 함께 들어있는 ‘어류도감’ 형식의 어보였다. 그는 ‘설명만으로는 물고기의 모습을 자세히 알 수 없을 테니 그림을 덧붙이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동생 정약용에게 편지를 썼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정약전의 편지 글 중에는 ‘해족도설’이라는 말이 나온다. ‘바다 어류에 대한 그림과 설명’이라는 뜻이다. 그림이 있는 어보를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형의 물음에 아우는 ‘책을 저술하는 한 가지 일은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되니 반드시 십분 유의하심이 어떻겠습니까?’라며 그림 그리는 것을 만류했다. 그 때문인지 『자산어보』에서 그림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정약전의 묘사는 눈을 살짝 감으면 눈앞에 그 물고기의 모습이 스르르 그려질 만큼 세밀하다. 세밀한 묘사를 위해서는 그만큼 치밀한 관찰이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겠다.


“큰 놈은 길이가 7~8자나 되는데, 동북 바다에서 나는 놈은 길이가 사람의 두 키 정도까지 된다. 머리는 둥글고, 머리 밑에서 어깨뼈처럼 여덟 개의 긴 다리가 있다. 다리 밑 한쪽에는 국화꽃 모양의 둥근 꽃무늬가 두 줄로 늘어서 있다. 이것으로 물체에 달라붙는데 일단 물체에 달라붙고 나면 그 몸이 끊어져도 떨어지지 않는다... 여덟 개의 다리 한가운데에는 구멍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입이다.”


무엇에 대한 설명인지 쉽게 알아맞힐 수 있었을 것이라 믿는다. 문어의 빨판을 국화꽃에 비유한 우리네 옛 선비의 낭만에 마음이 짠해지지 않는가?


『자산어보』의 공동저자들


학자들이 쓴 책이나 논문의 뒷부분에는 ‘참고문헌’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연구에 도움을 준 책이나 인용해 온 글의 출처를 밝히는 것이 오늘날에는 당연히 지켜야 할 연구자의 양심이다. 정약전도 『자산어보』의 서문에서 연구에 도움을 주었던 이의 이름을 밝혀두었다.


“나는 섬사람들을 널리 만나보았다. 그 목적은 어보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섬 안에 장덕순, 즉 창대라는 소년이 있었다. 두문불출하고 손을 거절하면서까지 열심히 고서를 탐독하고 있었다... 성격이 조용하고 정밀하여, 대체로 초목과 물고기와 물새 가운데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을 모두 세밀하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여 그 성질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믿을 만했다. 나는 드디어 이 소년을 맞아 함께 묵으면서 물고기의 연구를 계속했다.”


창대는 청어의 척추 마디 수를 세어 영남산 청어와 호남산 청어가 다른 부류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잔가시가 많기로 유명한 청어의 뼈마디를 셀 만큼 꼼꼼한 성격의 이 청년은 『자산어보』의 전반에 걸쳐 자주 등장한다. 창대의 말이 직접적으로 인용된 것은 아홉 번 정도이나 간접적으로 인용되어 드러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한다면 그 횟수는 훨씬 많을 것이다. 정약전이 그의 이름을 서문에서부터 밝혀 놓은 것으로 보아 창대는 아마도 정약전의 믿음직한 제자였을 것이다.


그 밖에도 더 많은 인용문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것은 창대의 말일 수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섬사람들의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도미가 해파리를 만나면 두부 먹듯이 빨아먹는다”와 같은 대목은 물에 직접 들어가 도미가 해파리를 먹는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하지 않으면 알 길이 없다. 정약전이 물질을 했을 리는 없으니, 물질을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자산어보』속에는 창대와 여러 섬사람들의 경험이 녹아 있다. 정약전은 이 해양 생물지가 혼자만의 힘으로 쓰인 것이 아님을 ‘인용’을 통해 분명히 밝혀두고 있다. 권위적이고 자존심 강한 당시 지식인들의 풍토대로라면 창대나 섬사람들의 이름쯤은 하찮게 여기고 마치 혼자 힘으로 연구해 낸 듯 꾸몄을 것이다. 정약전은 양심을 지킬 줄 아는 반듯한 학자였다.


“더욱 갈고 닦아 빛내도록 하라”


정약전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정약용은 『자산어보』가 한 장 한 장 뜯겨져 어느 섬 집의 벽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하마터면 벽지가 되어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을 책을 모아 그것을 제자에게 필사케 한다. 그 제자의 이름은 ‘이 청’이다. 이 청은 필사만 한 것이 아니라 『본초강목』과 같은 여러 중국 문헌들을 참고로 하여 각 항목 아래에 주석을 달았다. 『자산어보』에서 ‘청안’이라는 말 뒤에 따라오는 인용들이 바로 그것이다. 필사본은 또 다른 필사본을 낳고,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쳐 지금까지 전해져 왔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의 서문에서 후학들에게 ‘더욱 갈고 닦아 빛내줄 것’을 당부한다. 자신의 저작을 개인의 창작물이 아닌 공동의 유산으로 남기고자 했던 정약전의 깊은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어쩌면 지금 하늘 저편에서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당신이 생전에 바라보던 그 바다를 당신과 꼭 닮은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오늘날의 연구자들을 응원하고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우리 후손들의 품에 남겨준 것은 한 권의 책뿐이지만 그 책 속에는 민중을 사랑하는 선비의 마음과, 식을 줄 모르는 학문에 대한 열정, 지식인의 양심, 그리고 살아 움직이는 바다가 담겨 있다.


◎ 참고문헌


-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 손택수, 대한교과서, 2006.

- 현산어보를 찾아서, 이태원, 청어람미디어, 2002.

꿈꾸는 과학 김민지
deadend116@empal.com
저작권자 2006-10-12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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