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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세계의 신비로운 난초를 구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여정 세계에서 유일하게 햇빛을 모르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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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을 모르는 세계 유일의 꽃

호주 서부의 메마른 대지 아래 6~12센티미터 깊이에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바로 한 번도 햇빛을 보지 못한 채 크림색과 붉은색의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는 것이다. 뿌리도 잎도 없는 이 신비한 식물의 이름은 서호주 지하난초(Western Australian underground orchid; Rhizanthella gardneri)이다.

뿌리도 잎도 없는 이 신비한 식물의 이름은 서호주 지하난초이다. © Jean and Fred Hort
뿌리도 잎도 없는 이 신비한 식물의 이름은 서호주 지하난초이다. © Jean and Fred Hort

이 난초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발아부터 개화, 결실까지 전 생애를 완전히 지하에서 보내는 식물이다. 1928년 5월, 존 트로트라는 농부가 코리긴 근처 농장에서 쟁기질을 하던 중 우연히 발견한 이 꽃은 전 세계 식물학계를 뒤흔들었다. 밀랍으로 제작된 모형이 영국 전역을 순회 전시될 정도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하지만 발견 후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 이 경이로운 식물은 완전한 멸종의 문턱에 서 있다. 최근 몇 년간 야생에서 발견되는 개체수는 고작 3개체에서 심지어 전혀 발견되지 않는 해도 있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다.

참고로 서호주 지하난초는 5월 말에서 6월 초 사이에 최대 100개의 작은 꽃을 피운다. 안쪽을 향해 피는 이 꽃들은 6~12개의 큰 포엽으로 둘러싸여 튤립 모양의 꽃머리를 형성한다. 꽃머리는 토양 표면에 작은 구멍을 만들어 곤충들이 드나들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한다. 이 난초의 수분 방식도 독특하다. 일반적인 난초들이 나비나 벌에 의존하는 것과 달리, 지하난초는 흰개미에 의해 수분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대부분의 난초가 바람으로 퍼지는 먼지처럼 작은 씨앗을 생산하는 반면, 지하난초는 20~150개의 씨앗이 들어있는 살찐 열매를 만든다. 이 열매는 포유동물의 배설물을 통해 씨앗이 퍼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생명을 이어주는 신비한 삼각관계

서호주 지하난초가 햇빛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비밀은 놀라운 '삼자동맹'에 숨어 있다. 이 난초는 멜라루카 운키나타(Melaleuca uncinata)라는 지상 관목, 그리고 이 둘을 연결하는 흰색 실 모양의 균류와 함께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공생 관계 중 하나를 형성한다. 모든 난초는 균근 공생에 의존하지만, 지하난초의 경우 그 정도가 극도로 높다. 난초 씨앗은 매우 작아서 발아에 필요한 영양분을 거의 저장하지 못한다. 따라서 토양 속 균류와 결합해야만 생명을 시작할 수 있다. 로열 보타닉 가든 큐의 자코포 칼레보 박사는 "균류 없이는 난초가 장기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지하난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다른 난초들이 보통 하나의 균류와만 관계를 맺는 반면, 지하난초는 균류와 관목이라는 두 파트너 모두를 필요로 한다. 균류는 멜라루카 관목의 뿌리에서 영양분을 흡수해 지하난초에게 전달하는 생명의 다리 역할을 한다. 만약 관목에 문제가 생기면 이 정교한 영양 공급망이 무너지고 난초는 생존할 수 없게 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 관계가 단순한 일방통행이 아님을 밝혀졌다. 균류는 멜라루카 관목으로부터 탄소를 받아 지하난초에게 전달하는 동시에, 토양에서 직접 획득한 질소를 두 식물 모두에게 공급한다. 즉, 자연계에서 보기 드문 완벽한 '삼각 영양교환 시스템'인 셈이다.

 

기후변화와 산불의 이중 위협

현 시점 우려스러운 점은 기후변화가 서호주 지하난초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복잡하다는 점이다. 자코포 칼레보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1970년부터 2070년까지 100년간 최대 5도까지 기온이 상승할 경우를 모델링한 결과, 서호주의 26종 난초들은 호주의 극한 더위에 적응해 진화했기 때문에 생존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된다. 예를 들어 거미난초는 괴경을 토양의 더 깊고 시원한 곳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

물론 문제는 기온 상승만이 아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더 빈번한 산불이 호주 난초들에게 더 큰 위협이 되고 있다. 2025년 연구에 따르면 17종의 서호주 난초 중 3분의 2가 산불로 인해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오직 3분의 1만이 산불로부터 이익을 얻었다. 불난초(Pyrorchis nigricans)처럼 꽃을 피우기 위해 불이 필요한 종도 있지만, 청태양난초(Thelymitra macrophylla)처럼 산불 지역에서 거의 완전히 사라진 종도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더 빈번한 산불이 호주 난초들에게 더 큰 위협이 되고 있다. © Getty Images
기후변화로 인한 더 빈번한 산불이 호주 난초들에게 더 큰 위협이 되고 있다. © Getty Images

칼레보 박사와 동료들이 2022년 산불이 지하난초와 관련 균류, 멜라루카 관목에 미친 영향을 연구한 결과는 흥미롭다. 산불 1년 후 불탄 지역의 균류 군집은 원시 지역과 완전히 달라졌으며, 최근 불타거나 개간된 지역에 서식하는 균류가 우세했다. 지하난초는 이런 변화된 균류 군집에서는 자랄 수 없었다. 멜라루카 관목들도 완전히 타버렸다.

하지만 산불 2년 후 균류 군집은 원시 서식지와 비슷한 수준으로 회복되었고, 멜라루카 관목들도 다시 싹을 틀었다. 실제로 연구에 따르면 산불은 장기적으로 멜라루카 관목의 건강을 향상할 수 있다. 지하난초는 수년간 휴면 상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균류와 관목이 회복되면 지하난초도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산불이 너무 빈번해져 유익한 균류와 관목이 지하난초가 휴면 상태에서 깨어날 만큼 충분히 재성장 할 시간이 없을 때다. 또한 호주에서 산불 예방을 위해 사용하는 계획된 소각도 난초에게 해로울 수 있다는 점인데, 식물이 꽃을 피워야 할 시기에 불을 지르면 난초들이 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휴면 상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식지 파괴라는 더 큰 대재앙

기후변화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바로 서식지의 파괴이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식물들이 더 뜨거운 기온에 대응해 더 시원한 지역으로 서식지를 확장하고 있지만, 이는 충분한 적합한 서식지가 남아있을 때만 가능하다. 서호주대학교 킹슬리 딕슨 교수는 "이것이 바로 전 세계에서 생존을 위협받는 종들이 직면한 대재앙이다."라고 설명하며 "이들은 갈 곳이 없다. 교외지역이 되고, 고속도로가 되고, 농장이 되어 개간되고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인다. 

이러한 상황은 지하난초를 더욱 취약하게 만든다. 딕슨 교수가 어렸을 때만 해도 야생에서 약 180개체의 지하난초가 있었지만, 4년 전부터 조사팀들이 돌아오는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야생 개체군이 "붕괴한 것 같다"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 발견되는 개체수는 3개체에서 심지어 전혀 발견되지 않는 해도 있었다.

 

하지만 실험실에서 피어나는 희망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딕슨 교수는 새로운 꿈을 품었다. 바로 지하난초를 멸종에서 구하는 것이다. 그는 균류, 멜라루카 관목과 함께 완전한 지하난초를 실험실에서 키우려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사실 딕슨 교수와 그의 팀은 1990년대에 이미 지하난초의 살아있는 사육 집단을 균류 및 관목과 함께 키우는 데 성공한 바 있다. 하지만 2000년경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 중 급수 일정의 혼선으로 식물들이 말라죽는 인적 오류가 발생했다. 당시에는 야생에 여전히 상당한 수의 지하난초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재앙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야생 개체군이 급격히 감소한 현재, 사육 집단은 지하난초가 정말로 야생에서 멸종할 경우 중요한 백업 역할을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이 과정은 희망적으로 보인다. 1990년대에 성공적으로 사용된 것과 같은 과정을 사용하여 화분에서 멜라루카 관목을 키우고, 저장된 균류를 실험실에서 되살리고, 균류와 난초 씨앗을 멜라루카의 뿌리에 놓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마음속에서 자란 난초에 대한 큰 사랑 때문에" 이 일을 한다고 밝힌 딕슨 교수에게는 균류, 관목, 씨앗을 신중하게 조합하는 이 느리고 세심한 과정이 분명히 가치 있는 일이다. © 킹슬리 딕슨
"어릴 때부터 마음속에서 자란 난초에 대한 큰 사랑 때문에" 이 일을 한다고 밝힌 딕슨 교수에게는 균류, 관목, 씨앗을 신중하게 조합하는 이 느리고 세심한 과정이 분명히 가치 있는 일이다. © 킹슬리 딕슨

딕슨 교수는 이미 퍼스의 서호주대학교 난초연구시설 실험실에서 균류를 성공적으로 되살렸다. "어릴 때부터 마음속에서 자란 난초에 대한 큰 사랑 때문에" 이 일을 한다고 밝힌 딕슨 교수에게는 균류, 관목, 씨앗을 신중하게 조합하는 이 느리고 세심한 과정이 분명히 가치 있는 일이다. 그의 어린 시절 꿈이었던 지하난초를 실제로 발견한 지 4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는 이 신비로운 식물을 구하기 위한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다.

화분의 관목들도 잘 자라고 있다. 마지막 단계는 귀중한 저장된 지하난초 씨앗을 조금 사용하여 발아하고 자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지하난초의 서식지를 연구하고 보호하는 작업에는 다양한 연구자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하지만, 실험실에서 난초를 키우는 일에 관해서는 현재 딕슨 교수와 "열정적인 지역사회 자원봉사자들의 일단"만이 참여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희귀하고 신비로운 이 식물의 생존은 이제 한 과학자의 열정과 지역사회의 헌신,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전에 달려 있다. 땅속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작은 꽃 하나가 인류에게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바로 자연의 복잡한 네트워크를 이해하고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지구 생물다양성을 지키는 열쇠라는 점이다.

김민재 리포터
minjae.gaspar.kim@gmail.com
저작권자 2025-10-13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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