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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학·의학
이한음 과학칼럼니스트
2010-09-13

비유로서의 DNA 식상한 ‘유전자’ 대체할 ‘DNA’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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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사회 전반에 많은 영향을 미쳐 왔다. 기기묘묘한 온갖 새로운 물건을 통해서만이 아니다. 다양한 사상과 개념, 용어를 통해서도 영향을 미친다. 최근에 그 방향의 선두에 선 분야는 뭐니뭐니해도 생물학이다. 이제 연예인의 얼굴, 미모, 키, 각선미, 신체 비례 등 뛰어난 외모를 이야기할 때면 으레 ‘우월한 유전자’라는 말이 수식어로 따라붙는다.

더 최근 들어서는 또 하나의 생물학 용어가 여러 분야의 뉴스 제목에 흔히 쓰이고 있다. 바로 DNA이다. DNA라는 말만 들어도 어떤 의미로 쓰일지 지레 짐작할 수 있을 듯도 한데, 이 단어가 들어간 기사 제목을 몇 개 뽑아보자. “레이싱 DNA 입은”, “책 읽는 건 인류의 DNA”, “북방 DNA 간직한 홍산문화”, “실망스런 신한 DNA”, “개성상인 DNA 물려받은 온라인 거상들” 등등. 왠지 쓰임새가 아주 다양한 듯하다.

‘DNA'의 다양한 활용

“레이싱 DNA를 입은”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자동차의 겉모습을 레이싱 카처럼 만들었다는 내용인데, DNA라는 용어를 좀 과하게 썼다. 굳이 풀어보자면 레이싱 카의 DNA가 발현된 표현형을 택했다는 뜻인데, 왠지 표현형과 유전형이 따로 노는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알다시피 DNA의 일부인 유전자들은 유전형을 이루고, 유전형이 발현되어 겉으로 드러난 것이 표현형이다. 몸을 기계 부품 같은 것으로 교체한 사이보그가 아닌 이상, 유전형과 표현형은 분리될 수 없다.

그러면 “책 읽는 건 인류의 DNA”는 어떨까? 인터뷰 기사의 제목인데, 전자책이든 태블릿 PC든 아무리 새로운 전자 기기가 쏟아져도 책은 없어지지 않는다면서 한 말이다. 책을 읽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편 “북방 DNA 간직한 홍산문화”는 중국이 자기 문명의 발원지라고 최근에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는 요하문화, 홍산문화가 본래 우리 민족과 문화의 근원임을 역설하는 기사다.

“실망스런 신한 DNA”는 안정된 지배 구조를 토대로 위기에도 승승장구하던 신한은행이 최근 경영진의 불화로 심각한 혼란을 겪고 있다는 기사의 제목이다. 신한은행의 이른바 DNA인 끈끈한 조직 문화가 해체되기 직전인 상황에 와 있다는 것이다. “개성상인 DNA 물려받은 온라인 거상들”은 세계의 온라인 상품 판매 시장을 개척하는 기업들을 격려하는 기사로서, 개성상인의 도전 정신, 정직함, 신용 등을 이어받자는 의미이다.

그밖에도 “한국인의 피에는 빼어난 스토리텔러의 DNA가 숨쉬고 있다”, “메모리반도체는 한국인 DNA에 적합”, “프라이빗 뱅킹의 성공 DNA”, “행복 DNA를 확산”, “주인 의식 DNA를 갖자”, “상생 DNA” 등 다양한 기사에서 DNA라는 말을 찾을 수 있다. 최근에는 경제경영 쪽에서 이 용어를 자주 쓰는 듯하다.

이런 제목과 기사를 보면, DNA라는 말이 대강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우수한 전통이라는 의미로 쓰인 것도 있고, 한 조직이 중시하는 핵심 가치라는 의미로 쓰인 사례도 있다. 또 민족성을 뜻하기도 하고, 지향하는 중요한 목표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렇게 보니 참으로 다양한 의미로 쓰인다. 아마 초창기 DNA 연구자들은 DNA라는 말이 이렇게 다양한 용도로 쓰이리라는 것을 짐작조차 못하지 않았을까? 지금의 DNA 연구자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왜 ‘유전자’가 아닌 ‘DNA’일까?

그런데 왜 DNA일까? 연예인의 빼어난 외모를 가리킬 때 ‘우월한 유전자’라는 말을 쓰듯이, ‘DNA’보다는 ‘유전자’라는 용어가 그런 의미로 쓰기에 더 알맞지 않을까? 알다시피 DNA는 디옥시리보핵산의 약자로서, 세포핵 안에 들어 있는 실처럼 긴 분자를 가리킨다. 사람의 DNA는 약 30억 개의 염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전체에서 몸을 구성하는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약 2%에 불과하다. 나머지 대부분은 표현형과 거의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는 손상되어 더 이상 쓰이지 않는 유전자, 옛 유전자의 흔적, 만들어지다 만 유전자, 별 의미 없는 염기 서열, 반복되는 서열 등이 있다. 그러니 DNA 자체는 유용한 것, 쓸모 없는 것, 잠재적인 것, 별 의미 없는 것 등을 모아놓은 잡탕인 셈이다.

사실 DNA 중에서 갖가지 신체 대사 활동을 진행하고, 병원체와 맞서 싸우고, 상처를 치료하면서 생명을 유지하는 일을 하는 것은 유전자이다. 게다가 언어, 두뇌, 운동 능력 등 좋은 쪽으로 뿐 아니라, 당뇨병, 심장병, 근육 질환, 암 등 안 좋은 쪽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유전자들이 나날이 발견되고 있다. 우리의 건강과 외모, 성격 등을 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DNA 중에서 별 의미는 없으면서 많은 부위를 차지하는 서열이 아니라 극히 일부분을 차지하는 유전자 부위이다. 그러니 DNA라는 용어보다는 ‘우월한 유전자’처럼, ‘기업 유전자’, ‘성공 유전자’ 같은 식으로 표현을 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리처드 도킨스도 중요한 것은 유전자라고 역설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유전자의 생존과 증식을 위한 도구라고 말이다. “한 기업의 직원들은 기업 유전자의 생존과 증식을 위한 도구다”라는 식의 표현도 가능할 테고, “행복 유전자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자”라는 표현도 쉽게 와 닿을 듯한데…….

하지만 유전자라는 말은 이제 좀 식상해진 느낌이 있다. 언론 기사 제목만 잠깐 살펴보아도 훤히 드러난다. “착한 유전자가 따로 있다? 과학으로 풀어본 선과 악”, “손담비, 경쟁자 없는 몸매 공개… 축복받은 유전자” 같은 표현뿐 아니라, 무슨무슨 질병 유전자가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너무나 흔하다. “정가은, 유전자계의 신상녀”, “나르샤, 타고난 주당, 알코올 유전자 발견” 같은 기사까지 등장한다. 그러니 새롭고 눈에 확 띄는 표현을 찾는 사람들에게 ‘유전자’라는 용어는 이제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을 성싶다. 그보다는 DNA라는 용어가 더 참신하게 와 닿지 않을까?

그런데 방금 말했듯이, DNA는 좋은 것, 안 좋은 것, 쓸모 없는 것이 섞인 일종의 잡탕이다. 그러니 무언가 중요한 가치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기에는 좀 부적절하지 않을까?

정크 DNA의 재발견

꼭 그렇지는 않다. 그런 걱정은 하지말고 마음껏 비유로 들라고 권장하듯이, 과학자들은 최근 들어 DNA 전체, 즉 게놈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내놓고 있다. 예전에는 DNA 중에서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를 제외한 나머지 부위를 정크(junk) DNA라고 했다. 즉 DNA의 98% 이상이 거기에 속했다. 정크는 쓰레기나 폐물이라는 뜻인데, 쓸모 없어 완전히 버려지는 쓰레기는 아니고, 그래도 혹시나 나중에 쓸 만한 구석이 있을지 모른다는 뜻으로 그 용어를 쓴 듯하다. 그래도 재활용되기 전까지 쓰레기는 쓰레기일 것이다.

하지만 DNA를 연구할수록, 정크 DNA가 사실은 다양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단백질 발현을 조절하는 일도 하고, 구조적인 안정성도 제공하며, 진화를 거쳐 새로운 유전자를 만들기도 한다. 특히 각 염색체의 끝에 달라붙어 있는 텔로미어는 유전자가 아니면서도 유전자 못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밝혀져 있다. 텔로미어는 단순한 염기 서열이 반복되어 있는 것에 불과하지만, 세포의 분열 횟수를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세포가 한 번 분열할 때마다 텔로미어는 길이가 짧아진다. 세포 분열이 계속되어 텔로미어가 다 닳아 없어지면, 유전자가 들어 있는 염색체 자체가 짧아지게 된다. 그러면 유전자도 손상되고 해서 세포는 제 기능을 못하고 더 이상 분열도 하지 못한다. 배양을 해보면 노인의 세포는 아기의 세포에 비해 분열이 가능한 횟수가 훨씬 적다. 따라서 줄기세포나 암세포처럼 텔로미어의 길이를 다시 늘리는 텔로머라아제 효소가 없는 일반 체세포는 처음부터 분열이 가능한 횟수가 정해져 있는 셈이다. 그 횟수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텔로미어다.

한편 우리는 염색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ATATAT 식으로 단순히 반복되어 있는 염기 서열을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DNA에는 이렇게 반복된 서열이 아주 많다. 현재 우리가 아는 한 이런 서열은 별 역할을 안 한다. 어떤 중요한 일을 한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질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으로서는 정크 DNA에 해당한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이 반복 서열을 이용하여 신원을 확인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1번 염색체의 A 부위에 어떤 사람은 AT 서열이 4번 반복해서 나타나고, 어떤 사람은 AC 서열이 7번 반복해서 나타날 수 있다. 여러 염색체에서 몇몇 부위를 골라서 이런 반복 서열의 종류와 반복 횟수를 비교하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신원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방법은 친자 확인, 범인 확인, 먼 조상과의 관계 등 다양한 용도로 쓰인다.

이처럼 DNA의 쓸모 없다고 여겨졌던 부위도 연구하면 할수록 미처 몰랐던 기능을 지니고 있음이 드러나곤 하며, 우리는 점점 더 다양한 용도로 그런 부위를 활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니 DNA라는 용어를 무언가 중요한 것을 가리키는 데 써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대물림되는 것은 어느 한 유전자가 아니라, DNA 전체이니까, 중요한 가치의 전수와 전파라는 포괄적인 의미도 지닐 테고.

생물학에는 그 외에도 여러 분야에 두루 쓸모 있는 용어들이 많이 있다. 언어를 좀 더 풍성하게 하고 싶은 분은 한 번쯤 최신 생물학을 접해보시기를…….

이한음 과학칼럼니스트
저작권자 2010-09-13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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