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에서 참혹함으로 악명을 떨친 3가지 전염병으로 보통 '유스티니아누스 역병(The Plague of Justinian: 541–542 AD)', 흑사병과 더불어 1918년의 스페인 독감이 거론된다. 앞의 두 가지 전염병은 박테리아에 의한 감염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인류사에서 가장 최근에 이르러 의학사에 기록된 전염병 참사 중 스페인 독감만이 유일하게 바이러스성 질환인 셈이다1.
상하수도의 보급 및 위생여건의 개선으로 공중보건이 발달한 현대에 이르러 인류가 다시금 흑사병과 같은 박테리아성 전염병으로 인해 위기를 겪을 것이라고 예측하기는 어렵다. 항생제 내성 박테리아들로 인해 문제가 생기고는 있지만, 박테리아는 이제 인류에게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다. 이제 문제는 바이러스다.
종(SPECIES)의 장벽을 넘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의해 유발되는 독감은 현재 대유행으로 인류를 위협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질병이다. HIV나 에볼라 바이러스, SARS 등이 또 다른 위협으로 거론되긴 하지만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처럼 빠르고 광범위한 전염력을 가진 병원균들은 아니다.
특히 가장 최악의 경우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단 한 달 만에 인류 전체의 30%를 감염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치사율이 낮은 편이긴 하지만, 2%의 치사율을 지닌 바이러스가 등장했다고 가정하면 약 1억3천5백만 명이 발병 첫 해에 사망하게 되는 셈이다. 이러한 수치는 지난 30년간 에이즈로 인해 사망한 환자의 4배에 이른다2.
자연상태에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보유 숙주는 대부분의 경우 물가에 서식하는 철새로 알려져 있다. 바이러스와 숙주는 오랜 기간 동안 공생하며 진화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강력한 바이러스라 해도 종간 장벽을 뛰어 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세포 안으로 파고 들어 스스로를 복제해야 하는 바이러스에게 다른 종의 숙주가 지닌 면역계도 문제이지만, 바이러스가 세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숙주의 수용체들이 종마다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종간 장벽을 뛰어 넘어 전파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까지 18종의 포유류에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존재가 보고되었고, 포유류끼리의 전파도 자주는 아니지만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9년의 신종플루는 현재까지의 보고로 미루어볼 때, 돼지에서 인간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진화의 속도: RNA를 유전체로 가진다는 것
천연두 바이러스에 어린 시절 감염된 사람은 평생 동안 면역력을 갖게 된다. 계절성 독감의 비극 중 하나는 이러한 장기 면역력이 생기지 않는다는데 있다. 올해 유행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이 생겼더라도 내년에 유행할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은 생기지 않는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한번에 독감을 치료할 수 있는 백신 개발이 어려워진다는 데 있다. 이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가진 독특한 특징 때문이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RNA 바이러스다. 좀더 자세히 분류하자면 한 줄로 된 RNA 유전체를 지닌 Negative-sense3 바이러스로 분류된다. DNA는 이중나선 구조로 되어 있고 두 줄의 핵산이 꼬여 만들어진다. RNA는 지구역사에서 최초로 나타난 생명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는 RNA가 유전정보를 저장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를 복제하고 조립하는 효소의 역할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RNA세계 가설'이라고 부른다.
진화의 역사가 거듭되면서 유전정보의 저장이라는 기능은 DNA라는 구조적으로 안정적인 물질에 넘겨졌고, 유전정보를 복제하고 신진대사를 수행하는 복잡한 일들은 단백질이 떠맡게 되었다. RNA는 유전정보의 저장이라는 기능을 수행하기엔 DNA보다 불안정하고, 단백질이 수행하는 복잡한 일을 담당하기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유전정보로서 RNA의 불안정성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대한 장기 면역력이 생기지 않는 1차적인 원인이다. 일반적으로 DNA에서 RNA로, 그리고 RNA에서 단백질로 정보가 흐르는 생명체의 경우에는 유전체를 이루는 DNA만이 복제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유전체로 RNA를 지니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자손을 만들기 위해 RNA로부터 RNA를 복제해야만 한다.
RNA가 유전정보의 저장고로 부적절한 이유는 RNA라는 물질 자체가 불안정하기도 하지만, RNA 복제효소가 복제오류를 잘 수선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와 같은 RNA 바이러스들은 복제오류라는 치명적 결함을 지녔으면서도, 진화의 역사 속에서 일부러 RNA를 유전체로 택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손해에도 불구하고 빠른 돌연변이를 획득함으로써 숙주의 방어체계가 진화하는 것보다 빠르게 진화할 수 있는 선택적 이점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진화: 항원 표류(항원 소변이)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 개발이 어려운 두 번째 이유는, 우리 몸의 면역체계가 주로 바이러스의 껍질에 존재하는 두 가지 단백질을 항원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헤마글루티닌(HA)과 뉴라미니데이즈(NA)라는 두 종류의 껍질 단백질을 가진다. HA는 세포에 침투하기 위해서, NA는 복제를 마친 바이러스가 세포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필요하다. 2009년의 신종플루는 H1N1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H가 바로 HA 단백질을, N이 NA 단백질을 뜻하는 약어다.
HA 단백질은 세포막에 존재하는 사이알릭 산(sialic acid)와 결합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종마다 사이알릭 산의 구조가 조금씩 다르고, 한 종 내에서도 기관과 조직의 세포별로 세포막에 존재하는 사이알릭 산의 구조가 다르다. 따라서 바이러스가 지닌 HA 단백질과 숙주의 세포막에 존재하는 사이알릭 산의 결합이 바이러스가 전염될 수 있느냐 아니냐를 구분 짓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특히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조류에서 인간을 전염될 수 있는 이유가 인간의 호흡기에 존재하는 세포 중 일부가 조류에서 발견되는 종류의 사이알린 산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 몸의 면역계가 바이러스의 껍질에 존재하는 단백질들에 반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껍질 단백질은 밖으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바이러스로서는 세포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필요한 NA 단백질보다 세포에 침입하기 위해 필요한 HA 단백질을 면역계로부터 지키는 것이 이익이다.
대부분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아형4을 보유하고 있는 조류에서 16가지 종류의 HA 단백질과 9가지 종류의 NA 단백질들이 발견되고 있다. 또한 HA 단백질의 아형이 독감의 대유행에서 결정적 요인이라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지겹게 인류를 찾아오는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이유들이 동시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즉, RNA라는 불안정한 물질을 유전체로 가지고 있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필연적으로 숙주의 면역계에 항원으로 인지되는 HA 단백질에 잦은 돌연변이를 갖게 되고, 이러한 빠른 돌연변이 때문에 숙주의 면역계가 대응할 준비를 갖추기 어려워 진다.
항체가 항원을 인식하는 부위를 항원결정기(epitope)라고 부른다. HA 단백질의 항원결정기(epitope)는 바이러스 유전체의 다른 부분에 비해 잦은 돌연변이율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돌연변이가 해롭다는 상식을 생각해 볼 때, HA 단백질의 돌연변이율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돌연변이가 유지되는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즉, 이러한 잦은 HA 단백질의 돌연변이로 인해 바이러스가 선택적 이점을 분명히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HA 단백질의 잦은 돌연변이로 인해 바이러스는 숙주의 면역계를 혼란에 빠지게 만든다.
이처럼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HA 혹은 NA 단백질의 항원결정기에 돌연변이가 발생하는 현상을 '항원 표류(antigenic drift)' 혹은 '항원 소변이'라고 부른다. '표류(drift)'라는 단어는 진화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인 '유전자 표류(genetic drift)'에서 따온 것이다. 사실 바이러스를 생명체로 규정할 수 있다면 , 또 진화란 유전자 집합의 변화라고 정의된다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바이러스는 진화의 속도가 가장 빠른 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진화가 유전자 풀의 변화로 정의된다는 것은, 유전자 수준에서의 변화가 자연선택에 의해 안정화되는 과정이 진화에 필수적이라는 뜻이다.
대부분의 경우 진화는 유전자 염기서열 변화의 점진적 누적에 의해 일어난다. 돌연변이란 유전자 염기서열의 변화를 지칭하는 하나의 기제일 뿐이고, 유전자 표류(genetic drift), 유전자 이동(genetic flow) 등의 다양한 기제가 진화, 즉 유전자 집합의 변화에 기여한다. 자연선택도 이러한 진화의 기제 중 하나일 뿐이다.
유전자 표류는 유전학자 서얼 라이트(Sewall Wright)에 의해 도입된 개념으로 무작위적인 진화의 과정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된다. 선택압에 노출되지 않는 중립적인 돌연변이들은 유전자 표류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진화학의 개념인 '유전자 표류'는 분명한 선택압에 의한 만들어진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항원 표류'와 전혀 다른 과정이다. 일반적으로 유전자 표류는 자연선택에 반대되는 과정으로 기술되기 때문이다. 용어의 잘못된 선택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이러한 오해를 막기 위해 '항원 소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
항원 소변이로 인해 한 종류의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은 다음 해의 바이러스에 무용지물이 된다. 백신도 마찬가지다. 올해 유행한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은 내년에 항원 소변이를 거친 바이러스에 대해서는 거의 무용지물에 가깝다. 따라서 매년 유행하는 바이러스의 아형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이에 대한 백신을 최대한 빨리 생산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계속)
1. Waring, J.I. (1971) A History of Medicine in South California 1900-1970. 2. The 2009 H1N1 influenza outbreak in its historical context. Derek Gatherer. Journal of Clinical Virology. Volume 45, Issue 3, July 2009, Pages 174-178. Special section: Novel 2009 influenza A H1N1 (swine variant) 3. RNA 유전체가 바로 전령RNA로 사용되어 바이러스의 단백질들을 합성할 수 있을 때, 이를 Positive sense RNA virus라고 부르고, 전령RNA를 만들기 위해 유전체를 반대쪽에서 전사할 필요가 있을 경우를 Negative sense RNA virus라고 부른다, 4. 일반적으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아형(subtype)에 따라 분류하지만, 아형의 분류 기준은 항원-항체 반응을 기초로 한 혈청형(serotype)이다. 이에 관해서는 신종플루의 과학 (하)에서 설명한다. |
- 김우재 UCSF 박사후 연구원(포스텍 바이러스학 박사)
- korean93@postech.ac.kr
- 저작권자 2009-12-02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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