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플루가 기승이다. 하지만 신종플루에 대한 국내의 정보는 대부분 치료제나 백신, 그 위험성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사이언스타임즈>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대한 과학적인 사실들과, 백신 치료제의 개발에 관해 국내에서 조명하고 있지 않은 이야기들을 준비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지닌 강력함은 빠른 돌연변이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단순해 보이는 바이러스는 자신의 유전체를 조합하는 방법으로 숙주를 농락하기 때문이다. 쉽게 비유하자면 조금 규격이 맞지 않는 부품을 마구 교체해도 자동차가 굴러가는 식이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진화: 항원 대변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유전체는 8개의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8개의 유전체 조각에는 겨우 11개의 단백질이 코딩 되어 있을 뿐이다. 흥미로운 사건은 아주 드물게 서로 다른 아형의 바이러스들이 동시에 감염되었을 경우 발생한다. 바이러스들은 서로의 유전체 조각을 조합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돼지에 조류와 인간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동시에 감염되었을 때, 일반적으로는 인간에게 전염될 수 없는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감염될 수 있는 HA 단백질을 지닐 수 있게 된다. 유전체 조각이 섞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돼지를 '바이러스 혼합용기(Mixing vessel)'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이 걸리는 항원 소변이에 비해 이처럼 순식간에 새로운 아형의 HA 단백질이 바이러스에 도입되는 현상을 '항원 대변이(antigenic shift)'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대유행의 참사를 몰고 오는 바이러스는 항원 대변이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2009년 유행중인 신종플루는 여러 종류의 바이러스가 뒤섞인 항원 대변이를 거친 것으로 생각된다.
항원 소변이와 항원 대변이, 위에서 언급된 두 가지 특성들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의한 독감의 유행을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한 영역으로 만드는 이유다1.
분류의 면역학
이미 언급되었듯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껍질 단백질인 HA와 NA는 숙주의 면역계에 의해 격렬한 면역반응을 유도한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항원-항체 반응에 따라 '분류'된다. H1N1이라는 2009년의 바이러스와 H5N1이라는 2006년의 바이러스가 얼마나 다른 것인지는 바이러스가 지닌 HA와 NA 단백질의 항원결정기에 따라 결정된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어떻게 분류하는지, 도대체 H1이라는 약어의 의미는 무엇인지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언론이나 전문가는 없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과학자들에 의해 해부되다시피 연구되어 왔다. 그리고 조류독감이라는 이름으로, 신종플루라는 이름으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우리의 곁을 언제나 배회하고 있지만, 언론과 정부는 허둥대기 일쑤다.
가끔은 차분히 앉아 해마다 우리를 찾아오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그 속에서 이 간단한 바이러스로부터 인류를 보호하기 위해 과학자들이 들인 노력과 땀방울, 그리고 바이러스라는 물질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과학이라는 학문의 특징을 음미해보는 일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계절성 독감을 유발하는 바이러스를 흔히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라고 부른다. 현재 유행중인 H1N1 바이러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독감은 인플루엔자 A형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다. A형, B형, C형을 나누는 기준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껍질 안쪽에 존재하는 단백질-핵산 복합체에 대한 항원-항체 반응을 기초로 한다. 가끔씩 B형 바이러스에 의해 독감이 유행되기도 하지만 C형과 B형은 상대적으로 독성이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페인 독감을 비롯해서 대유행을 초래했던 바이러스는 대부분 A형이다. 따라서 과학자들의 연구도 대부분 A형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집중되어 있다. 결국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인플루엔자 A형 바이러스를 지칭하는 것이다.
A~C형을 나누는 기준이 바이러스의 단백질-핵산 복합체에 대한 항원-항체 반응이었듯이, A형 바이러스를 여러 가지의 아형으로 나누는 기준도 항원-항체 반응이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발견과 분류, 그리고 백신과 치료제의 개발 역사는 모조리 면역학의 발전과 맞물려 있는 셈이다.
인플루엔자 실험실습우선 환자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면역학적 방법론이 사용된다. 보통 이를 '혈구응집억제 검사(Hemagglutination Inhibition Test: HI test)'라고 부른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HA 단백질이 적혈구의 사이알릭 산과 결합하면 적혈구가 응집된다는 것이 이 검사의 원리다.
따라서 감염된 환자의 혈액에서 바이러스의 표본을 추출한 후, 다양한 농도로 희석한 바이러스를 젹혈구를 담아 놓은 용기에 뿌려주는 것으로 검사가 완료된다. 적혈구가 응집된다면 환자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한다2. 최근에는 중합효소연쇄반응(PCR)을 이용해서 중복검사를 수행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에게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가 존재하는지의 여부도 HI 검사를 응용하면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 바이러스와 환자의 혈청을 섞은 후에 HI 검사를 수행했을 때, 혈구응집반응이 사라지면 환자의 항체가 바이러스에 의한 혈구응집반응을 저해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바이러스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백신 개발에 필요한 아형을 구분할 수 없다. A형 바이러스의 두 가지 껍질 단백질 HA와 NA에 대한 항원-항체 반응에 따라 아형이 분류된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자연 상태에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숙주는 조류다. 현재까지 발견된 HA 단백질의 아형은 16가지 종류이고, NA 단백질은 9가지 종류라고 알려져 있으며, 이들은 모두 조류에서 발견된다. 이 중 인간에게 주로 전염되는 바이러스는 H1, H2, H3로 알려져 있지만, H5, H7, H9 등도 인간에게 감염된다.
하지만 나머지 10 종류의 아형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전염될 가능성을 간과하기는 어렵다. 일반적으로 NA 단백질의 분류는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이는 바이러스가 숙주와 접촉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능을 HA 단백질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에서 16까지의 숫자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53년 WHO에 의해 처음으로 인플루엔자 A형 바이러스의 분류가 시도된 이후 몇 번에 걸쳐 숫자가 뒤바뀌었을 뿐 아니라, 발견 순서도 뒤죽박죽이기 때문이다3.
다만 가장 최근에 야생조류에서 발견된 아형을 H16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미 15가지 종류의 아형에 대한 조사가 끝나 있기 때문이다. H17이라 이름 붙여질 더 이상의 아형이 등장하지 않는 것이 인류에게는 축복일지 모른다4.
아이러니의 역사: 과학자 아우터로니 이야기
바이러스 아형의 분류는 이 방법을 개발한 과학자 오르잔 아우터로니(Orjan Ouchterlony)의 이름을 따서 '아우터로니 검사(ouchterlony method)' 혹은 '이중면역확산 검사(double immunodiffusion method)'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전자의 염기서열을 읽는 것이 가능해지고, 유전체 사업이 일상처럼 벌어지는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아형을 아우터로니 검사에 의해 결정한다는 것만으로도 이 과학자의 이름을 기억할 이유는 충분하다.오르잔 아우터로니(1914-2004)는 스웨덴 태생의 의사이자 면역학자다. 그의 이중면역확산 검사는 1940년대 스웨덴과 핀란드의 아동들에게 만연했던 디프테리아균을 확진 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었다. 그는 항원-항체 반응을 응용했다. 한천으로 만들어진 배지에서도 항원-항체 반응이 일어날 수 있으며, 항원-항체 반응으로 생긴 침강물들의 패턴을 관찰함으로써 항원의 종류를 구분할 수 있음을 보인 것이다.
예를 들어 항원 표본을 한천의 가운데 홈에 넣어두고, 그 주변에 여러 종류의 항체를 배치한다. 항원과 항체가 한천을 따라 방사상으로 확산되면서 항원-항체 반응이 일어난 곳에 침전된 환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간단한 방법의 개발로 다양한 질병을 진단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훗날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아형을 분류하는 데에도 이 방법이 응용된다.
아우터로니가 이중면역확산 검사를 담은 논문을 발표한 곳은 유명한 저널이 아니었다5. 하지만 이 논문은 순식간에 엄청난 피인용 횟수를 기록하며 그는 가장 많이 인용된 저자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된다. 흥미로운 것은 아우터로니가 출판한 주요 논문 세 편이 모두 이 보잘 것 없는 저널에 출판되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무려 11,000번이 넘게 인용된 이 영향력 있는 논문은 유명한 국제저널에서 출판을 거부당했다. 당시 국제저널의 편집자는 이 논문에 기술된 사실들을 믿기 어렵고, 의학적으로도 별다른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과학이란 유명한 저널에 출판된 논문이나, 유명한 과학자들에 의해서만 발전하는 것은 아님을 아우터로니라는 과학자의 일화가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유명저널에 집착하는 국내 과학계의 풍토는 비판 받아 마땅하다.
중요한 것은 출판된 논문이 동료 과학자들에 의해 인용되면서 자연스럽게 선택되는 과정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과학은 유명세가 아니라, 치열한 검증으로부터 생존하는 과정을 통해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6
사실 면역학적 방법론을 이용한 바이러스 진단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아주 정확하지도 않다. 하지만 염기서열 분석을 통한 바이러스 아형의 분류법은 아우터로니 검사를 이용한 분류법과 상당 부분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RNA를 유전체로 지닌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염기서열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변하기 때문에, 항원-항체 반응을 이용한 분류법은 여전히 유용하다. 특히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침투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단백질이 HA라는 점에서, HA 단백질을 이용한 분류는 앞으로도 계속 사용될 것이다.
해부된 바이러스: 과학자들의 역할
신종플루의 증상과 대처법, 그리고 백신 접종의 시기 및 주의사항 등에 관해서는 이미 언론 및 정부를 통해 배포된 수 많은 글들에서 다루어지고 있다17.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빠른 돌연변이를 일으킨다는 점이나, 그로 인해 백신 개발이 어렵다는 것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익숙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들의 이면에 자리하는 과학적 개념과, 그러한 과학적 개념이 만들어진 원리를 쉽게 설명해주는 이는 없다. H1N1이니 H5N1이니 하는 말을 일상어처럼 사용하면서도 우리는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바이러스를 분류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 분류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바이러스의 껍질이 가진 강력한 항원으로서의 기능 때문이다. 또 바이러스의 아형을 분류해서 적절한 대처를 가능하게 해준 과학자는 이름 없는 저널에 논문을 발표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항원 소변이와 항원 대변이를 통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빠른 진화과정이 매년 찾아오는 독감의 유행과 수 십 년에 한번씩 찾아오는 대유행의 원리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대유행은 아무 드물게 일어나는 사건이긴 하지만, 때로는 아주 참혹한 결과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가장 많이, 그리고 잘 연구된 바이러스 중 하나다. 수 십 년 간 과학자들은 할 수 있는 역할을 다해왔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역설은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전염병의 실체에 대해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바이러스가 대유행을 주도할 것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대유행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가끔은 참혹한 비극으로 기록되었다.
또한 과학자들은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고 그 사용권한을 WHO와 정부 및 기업에 넘겨주었다. 원론적으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로 인한 독감은 치료 가능하다. 하지만 다양한 현실적 장벽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 그것이 독감이라는 질병이 단순한 과학과 의학의 영역이 아니라, 경제학, 사회학 및 정치학을 고려한 종합학문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이유다.
1. The influenza viruses. AW Hampson, JS Mackenzie. Medical Journal of Australia, 2006 2. Potter, CW, & Oxford, JS (1979). Determinants of immunity to influenza infection in man. Br Med Bull, 35, 69-75 3. A revised system of nomenclature for influenza viruses. Bull World Health Organ. 1971; 45(1): 119–124. A revision of the system of nomenclature for influenza viruses: a WHO Memorandum. Bull World Health Organ. 1980; 58(4): 585–591 4. J Virol. 2005 March; 79(5): 2814–2822. 5. Ouchterlony Ö. In vitro method for testing the toxin-producing capacity of diphtheria bacteria. Acta path microbiol scand 1948;25: 186–91 6. COMMENTARY. Jan Holmgren and Lars-Åke Nilsson. APMIS 115: 496–498, 2007 7. 예를 들어 인플루엔자 백신에 관한 정보는 <정희진, 인플루엔자 백신, HANYANG MEDICAL REVIEWS Vol. 28 No. 3, 2008>을 참고할 것. |
- 김우재 UCSF 박사후 연구원(포스텍 바이러스학 박사)
- korean93@postech.ac.kr
- 저작권자 2009-12-09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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