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병 하면 사람들은 어떤 장면을 먼저 떠올릴까.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제7의 봉인>에서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기사가 마주친 것은, 성벽 안 좁은 골목마다 시신이 쌓이고 종소리만 울리는 죽음의 마을이었다. 쥐가 들끓고 위생이라곤 없던 중세 유럽의 도시, 그 폐쇄된 공간이 흑사병의 원형적 이미지로 굳어진 데는 이유가 있다. 밀집된 인구와 오염된 곡물 창고, 인간과 쥐가 한 공간에 뒤엉켜 살던 환경이 대유행의 조건을 완성했다고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질병의 살상력이 성벽도, 곡물 창고도, 심지어 농경조차 없던 시절부터 이미 발휘되고 있었다면 어떨까. 소규모로 이동하며 살던 수렵채집 공동체, 도시는커녕 정착지 하나 갖지 못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말이다.
코펜하겐대학교 연구진이 주도한 국제 공동연구팀은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인근 수렵채집민 무덤 4곳에서 발굴된 유골의 고DNA를 분석해 약 5,500년 전에 이미 페스트균이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증거를 확인했다. 이 연구는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6월 18일 게재됐다.
치아 속에서 발견된 균, 검출률 39%
연구 대상이 된 우스티이다I, 슈밀리카, 브라트스키이카멘, 세로보는 모두 바이칼 호수에서 흘러나오는 앙가라강 유역에 자리한 신석기 후기 무덤 유적이다. 강을 따라 이동하며 물고기와 야생동물을 사냥해 살아간 수렵채집민들이 이곳에 매장됐고, 이들은 농경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청동기시대 목축이 유입되기 전까지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오래 유지했다. 연구팀은 이 네 유적에서 확보한 유골 46구를 대상으로 치아 백악질에서 고DNA를 추출해 샷건 시퀀싱을 수행했다.
그 결과 18구, 전체의 39%에서 페스트균 DNA가 검출됐다. 유적 중 규모가 가장 큰 우스티이다I에서는 31구 중 11구, 35%에서 감염이 확인됐다. 이는 런던 스미스필드에 남아 있는 중세 흑사병 희생자 유골의 검출률보다도 높은 수치다. 스미스필드 유골에서는 뼈에서 5.7%, 치수에서 37%가 검출돼 종합 20% 정도로 보고된 바 있는데, 옛 DNA 특성상 위음성이 잦다는 점을 고려하면 39%라는 수치는 상당히 광범위한 감염이다.
또한 방사성탄소연대 분석으로는 감염 사례가 두 시기로 뚜렷이 나뉘었다. 첫 유행은 지금으로부터 5,520~5,265년 전, 두 번째 유행은 5,315~4,235년 전으로 추정됐으며 이 중 후기 유행이 실제 발생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구간은 5,050~4,850년 전으로 좁혀졌다.
이번 발견은 페스트균 초기 형태를 둘러싼 오랜 논쟁에 무게를 더한다. 연구팀 교신저자이자 코펜하겐대학교 교수인 에스케 빌러슬레우는 "초기 형태의 페스트가 경미했는지 치명적이었는지는 논쟁의 대상이었지만, 우리 연구 결과는 이 고대 균주들이 이미 상당한 치사율을 지녔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혈연관계로 묶인 죽음, 가족 단위 유행의 흔적
무덤 속 인물들이 실제로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는 유전체 데이터로 확인할 수 있었다. 연구팀이 DNA를 통해 혈연관계를 복원한 결과, 브라트스키이카멘에서 한 무덤에 함께 묻힌 4세에서 9세 사이 여아 세 명 가운데 두 명은 사촌지간으로 추정되는 3촌 친족이었고, 세 명 모두에게서 페스트균이 검출됐다. 우스티이다I에서도 조카와 이모로 추정되는 두 사람이 같은 무덤에 나란히 묻혀 있었으며 둘 다 감염 흔적이 확인됐다. 방사성탄소연대 역시 이런 죽음들이 몇십 년 안팎의 짧은 기간에 몰려 있었음을 뒷받침해 가족 단위로 거의 동시에 사망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실었다.
러이리드 매클라우드 옥스퍼드대학교 연구원은 "페스트균 DNA, 희생자들 간의 유전적 혈연관계, 고고학적 분석, 방사성탄소연대를 종합해 이 유행 당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매우 명확하고 완전한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이 결과에 따르면 희생자 가운데 유독 아이들이 많았다는 점이 드러났다. 우스티이다I와 브라트스키이카멘 두 유적은 다른 바이칼 지역 유적과 비교했을 때 7.5세에서 11세, 즉 사춘기 이전 아동의 사망률이 두드러지게 높았다.
이 지역 고고학 프로젝트를 오랫동안 이끌어 온 앨버타대학교의 안제이 베버는 이 현상이 오랜 미제였다고 말한다. 그는 "비정상적으로 많은 아동 사망자와 짧은 매장 시기는 1990년대부터 우리를 괴롭혀 온 수수께끼였다. 그 원인이 페스트였다는 사실은 놀랍지만, 동시에 모든 정황이 맞아떨어진다"고 말했다.
슈퍼 항원 유전자, 치명성을 더한 변수
주목할 부분은 이 고대 균주들이 후대 페스트균과 뚜렷이 다른 유전적 특징을 지녔다는 점이다. 페스트균이 벼룩의 몸속에서 살아남아 사람을 물어 감염시키는 형태를 가래톳페스트(bubonic plague)라 부른다. 이 감염 경로가 성립하려면 ymt 유전자와 YpfΦ 프로파지, 이 두 가지가 있어야 하는데, 이번에 확인된 균주에는 둘 다 없었다. 벼룩을 통한 전파 경로 자체가 아직 진화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균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을, 그것도 아이들을 중심으로 죽음에 이르게 했을까.
단서는 유전자 하나와 무덤 배치 하나에서 나왔다. 먼저 균주에서 슈퍼 항원 독소 유전자 ypm이 확인됐는데, 오늘날 슈도결핵균 가운데서도 가장 강한 독성형인 ypmA와 유사한 형태로 면역세포를 과도하게 활성화해 강력한 염증 반응을 일으키는 물질이다. 코펜하겐대학교 부교수인 마르틴 시코라는 "벼룩을 통한 효율적인 전파 방식이 진화하기 전부터, 이들 고대 균주는 이미 감염을 매우 치명적으로 만들 수 있는 독성 인자의 조합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감염이 친족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됐다는 정황이 더해진다. 벼룩이라는 매개체가 없는데도 가족 단위로 감염이 겹쳐 나타났다는 사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직접 전파를 의미한다. 연구팀은 기침을 통한 비말이나 에어로졸 확산을 매개로 한 폐페스트 형태의 전파를 유력한 경로로 제시했다. 감염원으로는 오늘날에도 시베리아 지역 페스트의 주요 병원소로 남아 있는 설치류 마모트가 지목됐다. 사냥으로 마모트와 밀접하게 접촉했던 당시 생활 방식이 최초 감염의 발단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
이번 연구는 페스트균의 기원지를 중앙아시아 또는 북동아시아로 보는 가설에도 힘을 싣는다. 그동안 가장 오래된 페스트 감염 사례는 북유럽에서 보고돼 왔지만, 이번에 확인된 바이칼 균주들은 그보다 앞선 시기의 것이다. 연구팀은 인구밀도 증가와 정주 생활, 가축화로 대표되는 신석기 농업혁명이 없었더라도 대규모 인수공통감염병 유행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페스트를 신석기 후기 유럽의 인구 감소와 결부 짓던 기존 해석에도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 김현정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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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26-07-23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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