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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학·의학
김민재 리포터
2026-03-13

"하루 12알에서 1알로"… 노령 HIV 생존자 구원할 신약의 등장 내성의 벽을 넘은 단 한 알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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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령 HIV 생존자 구원할 신약 'BIC/LEN'의 등장

1980년대 초, 인류 앞에 정체불명의 괴질로 등장했던 인적 면역결핍 바이러스(HIV)는 수십 년간 공포의 대명사였다. 당시 감염은 곧 면역 체계의 붕괴와 사망을 의미하는 '시한부 선고'와 다름없었으며, 환자들은 사회적 낙인과 치료법의 부재라는 이중고 속에서 스러져갔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칵테일 요법'이라 불리는 강력한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법(ART)이 도입되면서 대반전이 시작되었다. 이제 HIV는 적절한 약물 복용을 통해 바이러스 수치를 억제하기만 하면 타인에게 전파되지 않는, 이른바 'U=U(Undetectable = Untransmittable)' 상태를 유지하며 천수를 누릴 수 있는 만성 질환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이들은 현대적인 단일 복합제의 혜택을 누리는 젊은 세대와 달리, 과거의 불완전한 약물 사용으로 인한 강력한 내성과 복잡한 부작용에 시달리며 매일 한 움큼의 알약을 삼켜야 하는 '다약제 요법'의 굴레에 갇혀 있다. ©Getty Images
이들은 현대적인 단일 복합제의 혜택을 누리는 젊은 세대와 달리, 과거의 불완전한 약물 사용으로 인한 강력한 내성과 복잡한 부작용에 시달리며 매일 한 움큼의 알약을 삼켜야 하는 '다약제 요법'의 굴레에 갇혀 있다. ©Getty Images

하지만 이러한 의학적 승리의 역사 이면에는 여전히 '시간이 멈춰버린 이들'이 존재한다. 바로 초기 HIV 유행기부터 살아남은 고령의 장기 생존자들이다. 이들은 현대적인 단일 복합제의 혜택을 누리는 젊은 세대와 달리, 과거의 불완전한 약물 사용으로 인한 강력한 내성과 복잡한 부작용에 시달리며 매일 한 움큼의 알약을 삼켜야 하는 '다약제 요법'의 굴레에 갇혀 있다. 최근 의학 저널 란셋(The Lancet)에 발표된 임상 시험 결과는 이러한 노령층 생존자들에게 수십 년 만에 찾아온 가장 눈부신 혁신이자, 매일 최대 12알에 달하던 고통스러운 투약 일과를 단 한 알로 끝낼 수 있다는 해방의 신호탄이다.

 

멈춰버린 시간: 왜 고령 생존자들은 여전히 수많은 약을 먹는가

현대 의학의 발전은 HIV 치료를 비약적으로 단순화시켰다. 오늘날 새롭게 진단받은 환자들은 대부분 하루 한 알의 복합제만으로 건강을 유지한다. 그러나 80년대와 90년대부터 치료를 시작했던 고령 생존자들의 사정은 전혀 다르다. 이들이 처음 복용했던 초기 약물들은 바이러스를 완벽히 억제하지 못했고, 그 틈을 타 바이러스는 진화하며 강력한 약물 내성을 획득했다.

런던 퀸 메리 대학교의 클로이 오킨(Chloe Orkin) 교수가 이들을 가리켜 "의학적 진보의 혜택에서 소외되어 성장이 멈춘 섬처럼 남겨진 인구"라고 표현한다. ©Nardus Engelbrecht/AP Photo/picture alliance
런던 퀸 메리 대학교의 클로이 오킨(Chloe Orkin) 교수가 이들을 가리켜 "의학적 진보의 혜택에서 소외되어 성장이 멈춘 섬처럼 남겨진 인구"라고 표현한다. ©Nardus Engelbrecht/AP Photo/picture alliance

결국 이들은 시중에 나온 일반적인 단일 복합제로는 바이러스 수치를 조절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내성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기전의 약물을 3~4종 이상 조합해 복용해야 하며, 이는 필연적으로 알약의 개수를 늘리고 심각한 약물 상호작용이나 간 및 신장 손상 등의 부작용을 야기한다. 런던 퀸 메리 대학교의 클로이 오킨(Chloe Orkin) 교수가 이들을 가리켜 "의학적 진보의 혜택에서 소외되어 성장이 멈춘 섬처럼 남겨진 인구"라고 표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BIC/LEN'의 탄생: 내성의 벽을 넘은 단 한 알의 힘

이번 연구의 주인공인 'BIC/LEN'은 기존의 치료 문법을 완전히 바꾼 혁신적인 조합이다. 통합효소 억제제인 '비크테그라비르(Bictegravir)'와 캡시드 억제제인 '레나카파비르(Lenacapavir)'를 하나의 정제에 담아냈다. 특히 레나카파비르는 바이러스의 껍질(캡시드) 형성을 방해하는 새로운 기전을 사용하여, 기존 약물들에 내성을 가진 변종 바이러스에게도 강력한 타격을 입힌다.

기존의 복잡한 다약제 요법을 유지한 그룹과 단 한 알의 BIC/LEN으로 갈아탄 그룹 모두 96%라는 동일한 바이러스 억제율을 기록했다. ©Nardus Engelbrecht/AP Photo/picture alliance
기존의 복잡한 다약제 요법을 유지한 그룹과 단 한 알의 BIC/LEN으로 갈아탄 그룹 모두 96%라는 동일한 바이러스 억제율을 기록했다. ©Nardus Engelbrecht/AP Photo/picture alliance

연구팀은 평균 연령 60세, 최고령 80대에 이르는 사상 최대 규모의 고령 HIV 환자군을 대상으로 9개월간 대조 실험을 진행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기존의 복잡한 다약제 요법을 유지한 그룹과 단 한 알의 BIC/LEN으로 갈아탄 그룹 모두 96%라는 동일한 바이러스 억제율을 기록했다. 이는 한 알의 신약이 열 개가 넘는 기존 약물들의 조합과 대등한 효능을 발휘함을 입증한 것이다. 아울러 BIC/LEN 복용 군에서 심혈관 건강의 척도인 콜레스테롤 수치가 개선되었다는 사실은 노화와 약물 부작용으로 고통받는 고령층에게 단순한 편의성 이상의 생존 전략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복약 순응도와 삶의 질, 그리고 전파 차단의 선순환

HIV 치료의 성패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약을 먹는 '복약 순응도'에 달려 있다. 만약 복잡한 약제 중 단 한 알이라도 빼먹거나 시간이 어긋나면, 바이러스는 즉시 내성을 키워 치료 체계 전체를 무너뜨린다. 인지 기능이 저하되거나 다른 만성 질환 약물을 함께 복용해야 하는 고령 환자들에게 '하루 12알'은 그 자체로 거대한 심리적, 물리적 장벽이었다. 따라서 치료법의 단순화는 단순히 환자의 번거로움을 덜어주는 차원을 넘어서서 삶을 통째로 바꿀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를 모으고 있다. 

AVAC의 미첼 워렌(Mitchell Warren) 국장은 이번 연구 결과에 대해 "환자들이 바이러스 억제 상태를 유지하며 평범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게 돕는 획기적인 전환점"이라고 평가했다. 바이러스 수치가 검출되지 않는 환자는 건강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성관계를 통해서도 타인에게 바이러스를 전파하지 않는다. 즉, 한 알의 신약은 고령 생존자의 품격 있는 노후를 보장하는 동시에 지역사회 전반의 감염병 안전망을 굳건히 하는 사회적 가치를 지닌다. 현재 BIC/LEN은 미국과 유럽 보건 당국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으며, 전문가들은 이 약이 HIV 치료의 역사를 '투쟁'에서 '일상'으로 바꾸는 마지막 퍼즐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김민재 리포터
minjae.gaspar.kim@gmail.com
저작권자 2026-03-13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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