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팬데믹을 극복하면서 우리는 백신의 놀라운 힘을 직접 경험했다. 작은 주사 한 방으로 우리 몸의 면역시스템은 낯선 바이러스를 기억하며 대비하고 있었고, 실제로 감염되었을 때 쉽게 이겨낼 수 있었다. 한편 최근 암 치료 분야에서는 면역항암치료제가 각광받고 있다. 면역항암치료제는 몸 속 면역세포가 가지고 있는 브레이크를 풀어 암세포를 공격하도록 돕는 혁신적인 치료법이다. 그렇다면 백신과 암 치료제가 만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얼핏 접점이 없어 보이는 이 둘의 조합으로 인해 암 치료에 뜻밖의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최근 발표되었다.
코로나 백신과 면역항암제, 전혀 다른 두 무기의 만남
코로나19 백신과 면역항암치료제는 모두 질병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지만 작동 원리와 목적은 전혀 다르다. 백신은 우리 몸의 면역체계를 미리 훈련시키는 도구이다. 코로나19 백신에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전자 설계도인 메신저 리보핵산(mRNA)이 담겨있다. 우리 면역세포들은 mRNA로 부터 만들어진 바이러스 조각을 보고 미리 대응법을 익힌다. 마치 범인의 몽타주 사진을 미리 배포해 경찰이 대비하는 것처럼, 백신은 실제 병원체가 침입하기 전에 면역 훈련을 시켜준다.
반면 면역항암치료제는 암을 치료하기 위한 약이다. 기존 항암제처럼 암세포를 직접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의 면역세포를 활성화하는 방식이다. 면역세포에는 우리 몸을 지나치게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는 면역 관문(브레이크)이 있는데, 면역항암치료제는 이러한 브레이크를 해제시킨다. 즉, 면역세포가 가속 페달만 밟을 수 있게 만들어 암세포를 적극적으로 공격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지금까지 백신은 감염병 예방을 위해 건강한 사람들에게 투여되었고, 면역항암치료제는 이미 진행된 암 환자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한쪽은 바이러스와의 전쟁, 다른 한쪽은 암과의 전쟁이다. 따라서 백신을 암 치료에 활용한다는 발상은 다소 생소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미국 텍사스 대학교 MD 앤더슨 암센터 연구진이 네이처에 발표한 연구 결과는 코로나19 mRNA 백신을 면역항암치료제와 조합하였을 때 암 환자의 생존률이 획기적으로 높아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코로나 백신을 맞은 암 환자에서 면역항암치료 생존률 증가
연구진은 폐암 환자 수백 명의 치료 경과를 분석해본 결과, 면역항암제 치료를 시작하기 전후 100일 이내에 코로나19 백신을 맞은 환자들은 55% 이상이 3년 이상 생존한 반면, 백신을 맞지 않은 환자들은 약 30% 정도만 3년을 넘긴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효과는 흑색종(피부암의 일종) 환자들에게서도 동일하게 관찰되었다. 면역항암치료제를 맞은 흑색종 환자들 중 백신 접종군의 3년 생존율이 67.6%로 나타났는데, 이는 미접종군의 44.1%보다 현저히 높은 결과이다. 백신을 접종한 그룹은 암으로 인한 사망 위험이 절반 가까이 낮아진 것이다.
이러한 생존율 향상 효과는 코로나19 mRNA 백신에서만 두드러졌다. 코로나19가 아닌 다른 백신에도 적용해보았지만, 독감 백신이나 폐렴구균 백신을 면역항암치료제와 병용한 경우에는 생존율에 유의한 변화가 없었다. 또한 면역항암치료제가 아닌 화학항암치료(암세포를 직접 공격)를 받는 환자들은 같은 시기에 코로나19 백신을 맞더라도 뚜렷한 생존 이점이 나타나지 않았다. 즉, 코로나19 mRNA 백신만이 면역항암치료제와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이다.
연구진은 백신과 면역항암제의 시너지가 나타난 메커니즘을 규명하고자, 마우스 실험을 통해 코로나19 mRNA 백신의 암 억제 효과를 재현해 보았다. 그 결과 백신과 면역항암제를 함께 투여한 마우스들은 면역항암제만 단독 투여된 그룹보다 종양 성장 억제 효과가 훨씬 두드러졌다. 또한 코로나 백신을 투여한 마우스 혈액에서 인터페론 알파(IFNα)라는 면역 신호물질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터페론은 바이러스 감염 시 우리 몸이 발현하는 일종의 경보 사이렌 같은 분자인데, 코로나19 mRNA 백신이 인터페론을 발현시켜 암 주변의 환경을 깨우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코로나19가 아닌 다른 바이러스에 대한 mRNA 백신도 면역항암치료제와 시너지를 낼 수 있을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코로나 바이러스의 단백질 대신 사이토메갈로바이러스의 단백질을 발현하는 mRNA 백신을 만들어 마우스에 투여하였다. 그 결과 사이토메갈로바이러스 mRNA 백신 역시 코로나19 mRNA 백신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암 억제 효과를 보여주었다. 즉, mRNA가 만들어내는 내용물이 아닌 mRNA 자체가 면역을 자극하는 힘의 원천인 것이다.
mRNA 백신은 범용 면역 부스터가 될 수 있을까
이번 연구는 백신과 암 치료제가 환상의 팀플레이로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입증하였다. 백신이 울린 경보 사이렌 덕분에 우리 면역세포들은 잘 눈치채지 못했던 암세포들을 "적"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면역항암치료제는 활성화된 면역세포들이 끝까지 공격을 이어갈 수 있도록 브레이크를 풀어줌으로써 암을 극복하였다. 이 같은 결과에 대해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놀랍고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인다. 특히 면역체계가 잘 반응하지 않아 치료가 어려웠던 종류의 종양에서조차 코로나 백신 접종으로 면역 반응이 촉발되고 생존율이 향상된 점에 주목하였다. 다만 이번 연구는 주로 기존 환자 자료를 분석한 연구이기 때문에, 백신 접종과 생존률 향상 사이의 상관관계는 확인했어도 인과관계를 단정할 순 없다는 한계도 있다. 백신을 맞을 정도로 건강 상태가 좋은 환자들이 원래 예후도 좋았던 것일 수 있다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추후 진행될 무작위 대조 임상시험에서도 결과가 긍정적으로 나온다면, '백신을 활용한 면역증강 보조요법'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도 가능하다.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맞춤형 암 백신을 일일이 개발하지 않아도, 범용 mRNA 백신으로 환자의 면역체계를 재정비하여 기존 면역항암제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전략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백신과 암 치료의 만남이 가져올 이 새로운 시너지는 난치성 암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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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회빈 리포터
- acochi@hanmail.net
- 저작권자 2025-11-20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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