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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학·의학
김민재 리포터
2025-11-28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낸 노벨상 수상자 제임스 왓슨, 97세의 나이로 영면에 들다 분자생물학 시대를 연 업적들 하지만 회개 없던 그의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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펍에서 시작된 과학 혁명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낸 노벨상 수상자 제임스 왓슨이 지난 11월 6일 9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1953년 프랜시스 크릭과 함께 생명의 설계도인 DNA의 구조를 규명해 현대 분자생물학의 기초를 놓았지만 말년에는 인종과 지능에 관한 비과학적 주장으로 과학계에서 추방당하며 복잡한 유산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53년 2월 28일 점심시간, 영국 케임브리지의 더 이글(The Eagle) 펍에 한 남자가 들어섰다. 35세의 영국인 물리학자 프랜시스 크릭이었다. 그는 큰 소리로 "우리가 생명의 비밀을 찾았다"고 외쳤다. 크릭과 함께 연구하던 25세 미국인 생물학자 제임스 왓슨의 회고에 따르면, 그날 오전 두 사람은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완성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훗날 그 유명한 '왓슨과 크릭'이 된다. 

바로 이곳, 영국 케임브릿지의 한 펍에서 또 다른 생물학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 Getty Images
바로 이곳, 영국 케임브릿지의 한 펍에서 또 다른 생물학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 Getty Images

DNA 구조 발견은 실제로 유전학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당시 과학자들은 DNA가 유전 정보를 담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 정확한 구조와 작동 방식은 미스터리였기 때문이다. 왓슨과 크릭은 DNA가 꼬인 사다리 모양의 이중나선 구조를 가지며, 네 가지 염기(아데닌·티민·구아닌·시토신)가 특정한 쌍(A-T, G-C)을 이루어 가로대를 형성한다는 것을 밝혔다.

이 구조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DNA 복제 메커니즘을 자연스럽게 설명한다는 점이었다. 두 가닥이 분리되면 각각이 새로운 상보적 가닥을 만드는 주형이 되는 구조이다. 1953년 4월 25일 네이처지에 발표된 그들의 논문은 겨우 한 페이지였지만, "이 구조는 상당한 생물학적 관심을 끄는 새로운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는 절제된 표현 아래 혁명적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왓슨은 시간이 흐른 후에 "우리는 답을 알았을 때 스스로를 꼬집어 현실임을 깨달아야 했다"라고 회상하며 논문의 결과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아마도 진실일 수 밖에 없을것이라고 깨달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리고 이 발견으로 왓슨과 크릭은 1962년 모리스 윌킨스와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며 과학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기게 된다. 

 

사진 51번과 지워진 공로

그러나 DNA 구조 발견의 이면에는 가려진 이야기가 있었다. 결정적 단서는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X선 회절 사진이었다. 1952년 5월,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프랭클린과 대학원생 레이먼드 고슬링은 DNA 섬유에 X선을 100시간 조사하여 '사진 51'을 얻었다. 92% 습도에서 촬영한 이 사진의 X자 패턴은 DNA가 나선 구조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프랭클린은 X선 결정학의 대가였다. 그녀는 DNA가 두 가지 형태(A형과 B형)로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고, 사진 51은 수화된 B형 DNA의 가장 선명한 이미지였다. 이 사진에서 얻은 정확한 측정값들은 DNA의 나선 각도, 염기 간격, 전체 구조의 크기에 관한 핵심 정보를 제공했다.

문제는 이 사진이 프랭클린의 동의나 지식 없이 전달되었다는 점이다. 1953년 1월, 프랭클린이 킹스 칼리지를 떠나기 직전, 윌킨스는 방문한 왓슨에게 사진 51을 보여주었다. 나선 구조에 대해 이미 연구하고 있던 왓슨은 즉시 그 의미를 파악했다. 왓슨과 크릭은 훗날 "프랭클린의 데이터 없이는 우리 구조의 정립이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매우 어려웠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프랭클린은 버크벡 칼리지로 옮겨 바이러스 구조 연구에 매진했고,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와 폴리오 바이러스의 구조를 밝히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하지만 프랭클린은 1958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난소암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1962년 노벨상이 수여될 때, 사망자에게는 상을 주지 않는다는 규정에 따라 그녀는 제외되었다.

왓슨은 1968년 그의 자서전 『이중나선』에서 프랭클린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가 비판을 받았다. 에필로그에서 그는 "그녀에 대한 나의 초기 인상은 과학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종종 틀렸다"고 비판했지만 훗날 그녀의 훌륭한 업적을 뒤늦게 인정했다. 물론 현대 과학사가들은 프랭클린이 DNA 구조 발견의 네 번째 파트너로 마땅히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분자생물학 시대를 연 업적들


DNA 구조 발견 이후 왓슨의 경력은 실제로 매우 화려했다. 하버드 대학교 생물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전통적인 동물학 중심의 생물학을 분자생물학 시대로 전환시켰다. 1968년부터는 뉴욕주 롱아일랜드의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를 이끌며 쇠퇴하던 기관을 세계 최고 수준의 유전학 및 암 연구 센터로 재건했다.

그리고 이들은 그 유명한 '왓슨 앤 크릭'이 된다. ⓒ Getty Images
그리고 이들은 그 유명한 '왓슨 앤 크릭'이 된다. ⓒ Getty Images

그리고 1990년 왓슨은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프로젝트 예산의 3-5%를 생명윤리 연구에 할당한다는 전례 없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유전학 연구가 20세기 초 우생학 운동과 연관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으며, 왓슨은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결국 정신 질환의 원인이 되는 유전자를 찾게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조현병을 앓던 그의 아들은 이 프로젝트에 대한 그의 열정을 더욱 높였다고 알려져 있다. 

 

논란의 시작과 파국


하지만 아쉽게도 왓슨의 업적은 그의 논란적 발언들로 인해 점차 가려지기 시작했다. 2000년 한 회의에서 그는 피부색과 성욕 사이에 유전적 연관이 있다는 다소 황당하며 과학적으로 근거 없는 주장을 했다. 또한 그는 "여성 과학자들이 남성들에게 인기가 있을 수 있지만 아마도 덜 효과적"이라는 망언을 남겼다.

아쉽게도 왓슨의 업적은 그의 논란적 발언들로 인해 점차 가려지기 시작했다. ⓒ Getty Images
아쉽게도 왓슨의 업적은 그의 논란적 발언들로 인해 점차 가려지기 시작했다. ⓒ Getty Images

결정타는 2007년에 왔다. 선데이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왓슨은 "나는 아프리카의 전망에 대해 본질적으로 우울하다. 우리의 사회 정책은 그들의 지능이 우리와 같다는 사실에 기반하는데, 모든 테스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고 발언했다. 또한 그는 "흑인 직원을 다루어야 하는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과학계의 반응은 이례적으로 즉각 이루어졌다. 유전체학의 선구자 크레이그 벤터는 "인종의 대리물로서 피부색은 과학적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개념"이라고 반박했다. 미국 국립보건원 원장 프랜시스 콜린스는 "대부분의 지능 전문가들은 IQ 테스트의 차이를 주로 유전적이 아닌 환경적 차이로 돌린다"며 "그토록 획기적인 과학적 기여를 한 사람이 과학적으로 뒷받침되지 않고 해로운 믿음을 퍼뜨리는 것은 실망스럽다"고 밝혔다.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는 왓슨을 소장직에서 해임하고 명예 소장으로 격하시켰다. 또한 런던 과학박물관은 그의 강연을 취소했다. 왓슨은 사과문을 발표했지만 그의 명성은 이미 크게 추락한 후였다.

흥미롭게도 2014년 그는 생존한 노벨상 수상자로서는 처음으로 자신의 노벨 메달을 경매에 내놓았다. 메달은 러시아 재벌에게 480만 달러에 팔렸고, 구매자는 즉시 이를 왓슨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

 

회개 없는 종말 그리고 복잡한 유산

2019년 PBS 다큐멘터리에서 왓슨은 마지막 기회를 맞았다. 감독이 인종과 지능에 대한 견해가 변했는지 묻자, 그의 대답은 여전히 단호했다. "전혀 아니다. 바뀌었으면 좋겠다. 양육이 본성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새로운 지식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그 차이가 유전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후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는 왓슨의 남아있던 모든 명예직을 박탈했다. 연구소는 "왓슨 박사의 발언은 비난받아 마땅하고, 과학적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며, 어떤 방식으로도 연구소의 견해를 대변하지 않는다"며 "과학을 편견을 정당화하는 데 오용하는 것을 규탄한다"고 밝혔다. 누구보다 대단했던 천재 과학자의 아쉬운 말로였다. 몇년 후 왓슨은 자동차 사고로 중상을 입고 몇 주간 입원했다가 요양 시설로 옮겨졌으며, 짧은 병환 끝에 2025년 11월 6일 뉴욕주 이스트 노스포트의 호스피스에서 사망했다.

제임스 왓슨은 20세기 가장 중요한 과학적 발견 중 하나를 이룬 천재였다. DNA 이중나선 구조 발견은 유전 암호 해독, 단백질 합성 이해, 유전자 재조합 기술, 법의학적 DNA 감식의 기초가 되었으며, 오늘날 수백억 달러 규모의 생명공학 산업은 모두 그의 발견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그는 과학적으로 근거 없는 인종차별적 견해를 고집하며 자신의 업적을 스스로 더럽혔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과학사학자 소라야 드 샤다레비안은 "말년에 그를 사로잡은 것은 일종의 맹목성이다. 그는 DNA가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DNA를 발견한 왓슨은 DNA를 모든 것을 결정하는 궁극적 지배자로 여겼고, 사회적·환경적 요인의 중요성을 무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962년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왓슨은 "과학에서 성공하려면 자신의 아이디어를 강하게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확신은 DNA 구조 발견으로 이어졌지만, 비과학적 신념에 대한 확신은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

제임스 왓슨의 사망으로 DNA 이중나선 발견의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그는 '생명의 비밀'을 밝힌 거장이자, 과학의 오용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 보여준 경고의 인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김민재 리포터
minjae.gaspar.kim@gmail.com
저작권자 2025-11-28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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