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세포가 인체의 자연 방어 시스템에 대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사실상 암세포 자체가 인체 세포이기 때문이다.
암세포들은 인체의 방어 및 유지 시스템을 속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탈취할 수 있는 선천적인 기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암세포의 모든 ‘속임수 보따리(bag of tricks)’를 발견하는 일은 암과 싸우는 핵심 열쇠가 된다.
포르투갈 리스본의 샴팔리모 센터(Champalimaud Centre for the Unknown) 에두아르도 모레노(Eduardo Moreno) 박사는 최근 암세포의 이런 새로운 ‘속임수(trick)’ 하나를 발견해 내 이 방면에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 트릭은 그가 ‘적합도 지문(fitness fingerprints)’이라고 이름 붙인 세포-경쟁 메커니즘(cell-competition mechanism)이다.
모레노 박사는 “우리는 지난 2010년 초파리(Drosophila melanogaster) 모델에서 이 적합도 지문을 처음 확인한 뒤, 이번에 인간에게도 이 지문이 존재하며, 이를 차단하면 인체 암세포 성장을 멈출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고 밝혔다.
이 연구는 과학저널 ‘네이처’(Nature) 24일자에 발표됐다. (관련 동영상)
고약한 인접 세포들과 암세포의 위장술
모레노 박사팀은 체내의 서로 인접한 세포들이 각자의 표면에 표시되는 특별한 표지자(marker)를 사용해 서로의 적응도 수준을 지속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구팀이 확인한 표지자는 두 개. 하나는 세포가 젊고 건강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승리(Win)’ 적합도 지문이고, 다른 하나는 세포가 늙거나 손상됐음을 나타내는 ‘상실(Lose)’ 지문”이다.
만약 어떤 세포가 이웃 세포들에 비해 덜 적합하다면 이는 그 세포가 Win에 못 미치거나 이웃 세포들에 비해 더 많이 Lose 되었음을 의미함으로써 이웃 세포들이 이를 제거해 버린다. 조직 전체의 건강성과 통일성은 바로 이런 메커니즘을 통해 보장된다는 것이다.
모레노 박사팀은 이 과정이 조직의 적절한 발달과, 부상 후의 조직 재생 그리고 조기 노화를 막는데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메커니즘이 탈취돼 암세포 성장에 쓰일 수 있다는 점이다.
모레노 박사는 “암세포들은 이런 적합도 지문을 사용해 자신들이 이웃의 건강한 세포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Win 적합도 지문을 가진 ‘대단히 적합한(super-fit)’ 세포들로 위장한다”고 설명했다.
이는 암세포 주위의 건강한 세포들이 덜 건강해 보이도록 만드는 일종의 속임수다. 암세포들은 이런 방법으로 주위의 건강한 세포들을 속여 이 세포들을 죽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조직을 파괴함으로써 종양이 팽창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한다는 것.
모레노 박사팀이 초파리에서 적합도 지문을 확인했을 때 이 세포 경쟁 메커니즘이 인체에도 보전돼 있는지는 확실히 몰랐다. 왜냐하면 다른 동물들은 불필요한 세포들을 탐지할 때 다른 전략을 사용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적합도 지문은 조직을 유지하는데 매우 유용할 수 있지만, 종양을 더 공격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암 위험 부담이 상당히 크다는 단점이 있다.
모레노 박사는 “이런 거래(tradeoff)는 초파리와 같이 수명이 짧은 동물들에게는 수용 가능할 수 있으나, 인간과 같이 수명이 긴 동물들은 너무 위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인체 암세포에서의 일련의 실험 결과 연구팀은 우리 인간도 결국 이 양날의 칼을 지닌 메커니즘을 보유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인체 암에서의 적합도 지문
연구팀의 라얀 고냐(Rajan Gogna)와 에샤 마단(Esha Madan) 연구원은 인체 세포가 적합도 지문을 표현하고 이 지문들이 암과 관련이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몇 가지 실험을 수행했다.
두 연구원은 인간 유전체에서 적합도 지문을 암호화하는 유전자를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유전자가 확인된 뒤 이 유전자가 실제로 네 가지 다른 유형의 적합도 지문을 암호화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중 두 가지 유형은 Win 적합도 지문이었고, 다른 두 개는 Lose 적합도 지문이었다.
연구팀은 다음으로 적합도 지문이 암 성장에 영향을 주는지를 관찰하기 위해 서로 다른 네 종류의 조직에서 네 가지 지문 발현을 분석했다. 네 종류 조직은 악성 암(유방과 대장)과, 종양 및 정상 조직에 가까운 양성 종양(유방과 대장)이었다.
분석 결과 여러 가지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정상 조직에서 Win의 발현은 전체적으로 매우 희박하고, Lose의 발현도 매우 낮았다. 이에 비해 모든 종양에서 Win의 발현은 현저히 증가했고, 양성 종양보다 악성 암에서 정도가 훨씬 심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종양들이 인접 조직들에서 나타나는 적합도 수준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변형시키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고냐 연구원은 “정상 조직과 비교했을 때 종양과 가까운 조직에서 Lose 발현이 현저하게 높았다”며, “더욱이 양성 종양 주변보다 악성 종양과 인접한 조직에서 Lose 수준이 더 높았다”고 설명했다.
실제 통계적으로 분석한 결과 암에서의 Win 발현 수준과 인접 조직에서의 Lose 수준은 암의 악성 상태를 86.3%로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암 치료에 활용하려면 수년 걸릴 수도”
이 연구 결과는 종양에서 Win 지문의 높은 발현은 주변 조직에서의 높은 Lose 발현과 함께 종양 성장의 전제조건이 된다는 점을 강력하게 시사했다.
이에 따라 연구팀은 이 메커니즘을 차단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인체 종양의 이식편을 쥐에 이식하고 적합도 지문 발현을 중지시켰다.
결과는 고무적이었다. 마단 연구원은 “이 같은 조작을 통해 종양 크기가 현저하게 감소한 것을 확인했다”며, “이는 숙주 조직에 대한 종양의 파괴력이 감소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 접근법 단독으로는 암세포를 제거하지 못하고, 다만 진행을 늦춘다”고 덧붙였다.
다음으로 연구팀은 이 접근법의 전반적인 치료 가능성을 시험하기 위해 적합도 지문 발현 차단과 항암요법을 결합시켰다.
두 가지를 복합한 치료법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고냐 연구원은 “종양 크기를 더 줄일 수 있었고, 어떤 경우에는 종양 형성(tumorigenesis)까지도 완전히 없앨 수 있었다”고 밝혔다.
모레노 박사는 이번 연구를, 기본적인 호기심 차원에서 시작한 연구가 인간의 건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또 하나의 예라고 보고 있다.
모레노 박사팀은 앞으로 적합도 지문 메커니즘을 더욱 깊이 연구하는 한편으로, 미래의 암 치료 약 개발을 위해 임상의사들과 계속 협력해 나갈 계획이다.
- 김병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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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9-07-2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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