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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노벨 생리의학상 후보 제1호 이호왕 (하)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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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한대로 유행성출혈열에 대한 연구는 쉽지 않았다. 군부대 근처에서 들쥐를 채집하러 다니던 야외채집원은 간첩으로 오인되어 사살당할 위기에 처하는가 하면 주민의 신고를 경찰서에 끌려가기 일쑤였다. 또 쥐를 잡다가 유행성출혈열에 걸려 야외채집원이 죽을 뻔한 일을 겪기도 했다.

그보다 더 힘든 것은 연구에 별 진척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호왕 박사 역시 연구를 시작하고 5년간은 실패만 거듭했다. 1975년이 되자 이 박사팀의 실험성적을 검토한 미육군성에서는 더 이상 연구비를 보조할 이유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 유행성출혈열 연구를 하기 힘들게 된 셈이다.

시간에 쫓겨 연구를 서두르던 어느 날, 이호왕 박사에게 10여 년간 유행성출혈열을 연구하고 있다는 학자 월리엄 잴리슨이 보낸 책이 한 권 배달됐다. 그가 그 책에서 주장한 바에 의하면 출혈열의 병원체는 곰팡이며 들쥐의 폐장에서 발견된다는 내용이었다.

이호왕 박사가 연구하고 있는 모습.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이호왕 박사가 연구하고 있는 모습.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그때까지 연구를 진행한 결과 이 박사는 병원체의 정체를 바이러스로 확신하고 있었다. 때문에 곰팡이라는 주장이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으나 단 한 가지 들쥐의 폐장에서 발견된다는 말에 눈길이 갔다.

유행성출혈열이 발병하면 여러 장기에 이상이 생기지만 폐는 멀쩡했다. 따라서 많은 과학자들이 들쥐의 다른 장기들을 샅샅이 검사했지만 폐 부위만은 제외하고 있는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부터 그는 들쥐와 출혈열 환자의 폐장 조직도 함께 검사하기 시작했다.

또 하나, 이 박사는 그 무렵 혈청에 형광물질을 묻혀 형광현미경으로 찾는 형광항체법을 새로 도입했다. 1975년 12월 20일 중고 형광현미경으로 항원을 확인하던 중 그는 바로 쥐의 폐장 속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바이러스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해 봄 이 사실을 대외적으로 공표하자 미국의 학자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것. 심지어 일부에서는 연구비 지원이 끊길 위험을 벗어나기 위한 쇼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 박사는 그때까지 알려진 500여 종의 바이러스와 비교 검사해 새로 찾은 이 바이러스가 전해 새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렇게까지 하는 데만 다시 꼬박 4년이 걸렸다.

서울 아파트에서 새로운 바이러스 발견

1979년 12월 그는 다른 의료기관에서 의뢰해온 출혈열 환자의 혈청을 검사하다가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마포구에 거주하는 아파트 수위의 혈청에 주목한 것. 이 박사는 그 환자가 발병하기 며칠 전 수위실에서 집쥐를 때려잡았다는 사실을 알아내곤 즉시 연구팀과 함께 그 아파트로 가서 쥐를 잡아 바이러스 분리작업에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발견한 것이 바로 서울바이러스다. 이 바이러스의 발견으로 유행성출혈열이 도시에서도 감염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렇게 2종의 병원체 바이러스를 발견한 이 박사는 새로운 바이러스의 속으로 한타바이러스를 국제학계에 제안하고 공인받았다.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으면 진단법을 만들 수 있다. 따라서 한탄바이러스를 처음 발견한 1976년부터 1984년까지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호왕 박사팀만이 진단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이러스를 분리하고 조직배양하던 과정에서 연구원들이 잇달아 유행성출혈열에 걸리자, 그는 백신 개발에 새로 나섰다.

치료약이 없으니 안전한 연구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백신은 꼭 필요했다. 1981년부터 백신 개발을 시작한 이 박사는 1985년 무렵 이 바이러스를 동물 조직에 연속적으로 배양시킨 결과 병원성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녹십자사와 공동연구에 매달린 끝에 1990년 마침내 세계 최초의 유행성출혈열 예방백신 제조허가를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이 예방백신은 임상실험을 거친 후 1991년부터 ‘한타박스’라는 이름으로 시판됐다. 이는 한국 신약개발 1호였으며, 한 사람이 병원체의 발견 및 진단법을 개발하고 예방백신까지 만든 세계 최초의 사례였다.

이호왕 박사는 유행성출혈열의 진단을 좀 더 간단하고 신속하게 하기 위해 일본 도쿄대학 토미야마 교수와 공동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그 결과 1989년 새로운 진단키트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1997년에는 한탄바이러스와 유럽에서 발생하는 푸우말라바이러스에 의한 유행성출혈열을 동시에 예방할 수 있는 혼합백신도 개발했다.

동두천에 이호왕 박사 기념관 개관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이 같은 그의 업적을 인정해 1981년부터 1995년까지 그가 근무하던 고려대 의대 바이러스연구소를 ‘WHO 한타바이러스연구협력센터’로 지정했다. 또 그가 서울중앙병원으로 옮겨가자 1996년에는 서울중앙병원 아산생명공학연구소를 ‘WHO 한타바이러스연구협력센터’로 지정하기도 했다.

그런데 1994년 미국의 아메리카 인디언인 나바호족에서 갑자기 피를 토하고 죽어가는 환자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 병은 폐렴을 일으키고 일주일 이내에 죽을 만큼 강력했으며, 기존의 유행성출혈열보다 사망률이 약 10배나 더 높은 60%에 달했다.

약 1개월 후 이 질병의 병원체도 한타바이러스과에 속하는 것임이 밝혀졌다. 에이즈와 사스가 그렇듯이 이전에는 없는 새로운 바이러스가 더욱 강력해져서 나타난 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발견돼 급격히 퍼졌던 ‘메르스 코로나’도 사스의 사촌격 바이러스다. 미국에서 발견된 새 바이러스의 정체가 한탄바이러스에 비해 빠른 시간에 밝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호왕 박사의 업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호왕 박사는 파푸아뉴기니에서 유행하는 쿠루라는 질병의 원인이 되는 슬로바이러스를 발견해 1976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가이듀섹에 의해 노벨 생리의학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이 박사가 발표한 유행성출혈열 관련 학술논문은 국내 161편, 외국 81편으로 총 242편에 이른다.

고려대학교는 그의 업적을 기려 2012년 6월 ‘이호왕 박사 기념관’을 동두천시 자유수호평화박물관에 개관했다. 이 기념관에는 이 박사의 생애 및 연구업적, 바이러스 종류 등에 대한 영상물, 연구 당시 과학 기자재, 세계 각국의 증정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 학생들을 위해 과학체험과 교육을 병행할 수 있는 생태·과학상식퀴즈 부스와 어린이 과학 놀이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이호왕 박사는 대한바이러스학회 초대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한국인 최초 미국학술원 외국회원, 자연과학자 최초 일본학사원 명예회원 등을 역임했으며, 대한민국학술원상, 인촌상, 호암상, 미국 최고시민 공로훈장, 일본 닛케이 아시아상, 태국 프린스마히돈상 등을 수상했다.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2noel@paran.com
저작권자 2014-11-05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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