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중부전선에 포진했던 미군 2000여 명이 괴질에 걸려 그중 800여 명이 사망했다. 괴질은 유엔군과 한국군을 비롯해 민간인에게까지 퍼져 나가 1954년까지 3000여 명의 환자가 발생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그렇게 무서운 괴질이 창궐하는 곳에 아들을 보낼 수 없다는 주장까지 나와 참전에 관한 반대 여론이 일기도 했다.
괴질은 중국 인민해방군과 소련군에게도 피해를 입혔다. 중국군이 괴질로 인해 한강 이남을 넘어오지 못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워낙 피해가 컸던 탓에 유엔군과 중국군 모두 서로 상대방이 치명적인 생물학 무기를 사용했다고 짐작할 정도였다. 그로부터 20여 년 후 그 괴질의 원인이었던 ‘한탄바이러스’가 발견됐다.
#2. 최근 에볼라 바이러스로 인한 공포에 휩싸여 있는 미국의 뉴욕 한복판에서 인체에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새로 발견됐다. 컬럼비아대 전염병연구소에서 뉴욕 중심가 맨해튼의 5개 장소에서 잡은 133마리의 쥐를 조사한 결과 5마리에서 문제의 바이러스가 확인된 것.
그 바이러스는 바로 6.25전쟁 당시 미군을 떨게 만들었던 유행성출혈열의 원인 바이러스와 똑같은 ‘서울바이러스’였다. 서울바이러스는 한탄바이러스와 비슷하면서도 분자생물학적인 구조는 전혀 다르며, 도시에 서식하는 쥐에게서 주로 발견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동안 미국에서는 로스앤젤레스와 메릴랜드에서만 서울바이러스가 제한적으로 발병한 사실이 있을 뿐 뉴욕에서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탄바이러스와 서울바이러스가 모두 한국명인 것은 그 발견자가 바로 ‘한국의 파스퇴르’란 별명을 얻고 있는 이호왕 박사이기 때문이다. 그는 에이즈 및 말라리아와 함께 세계 3대 전염성질환으로 알려져 있는 유행성출혈열의 병원체인 한탄바이러스와 서울바이러스를 세계 최초로 발견하고, 이들이 포함되는 새로운 속인 한타바이러스를 제정했다.
그의 연구성과로 미생물학, 그중에서도 바이러스학의 영역이 확대되고 새로운 분야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예방백신과 혈청진단법을 개발하여 유행성출혈열의 퇴치에도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그 당시 유행성출혈열은 아시아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발병하여 매년 20만 명이 감염되고 그중 약 7%가 사망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 그런데 이 질병의 원인과 예방책이 마련됨으로써 인류가 이 괴질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는 1928년 10월 26일 함경남도 신흥군 신흥면 흥경리 308번지에서 태어났다. 꽤 많은 토지와 과수원을 비롯해 읍내에서 비료상점과 쌀가게, 포목점까지 운영하는 부친을 둔 덕분에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그는 달리기와 제기차기, 작문, 노래에 소질이 있는 개구쟁이였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공부에 소질을 보이기 시작한 그는 함경남도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모인다는 함남중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해방이 되고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부친이 지주로 분류돼 인민위원회에 끌려갔다 온 후부터는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처음엔 일본뇌염 연구에 매달려
어려운 살림에 겨우 중학교를 마친 후 의사가 될 것을 권하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함흥의과대학에 진학했다. 그때는 이미 38선이 생겨 서울 유학을 가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 반동 지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인해 대학 진학 후에도 계속 탄압을 받았던 그는 6.25전쟁 때 국군과 함께 서울로 내려온 후 서울대 의대 본과 1학년으로 다시 입학했다.
원래 내과의사가 꿈이었던 그는 환자를 잘 보기 위해서는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 하에 대학원 미생물학과로 진학했다. 그 후 미생물학교실의 조교로 근무하던 중 서울대학교와 미네소타대학교의 교환 교수 프로그램 덕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미국에 가서 만난 지도교수는 세러 박사로서, 일본뇌염의 권위자였다. 그로 인해 그도 인본뇌염 연구를 과제로 받았으며, 돼지와 원숭이를 대상으로 실험을 계속한 끝에 ‘일본뇌염 바이러스의 원숭이에서의 면역기전’이라는 논문으로 1959년 12월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해 연말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1961년 2월 미국 미네소타에서 만난 심리학도 김은숙을 부인으로 맞아 결혼식을 올렸다. 서울대에 재직하면서 일본뇌염을 계속 연구하려 했으나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연구비를 얻기 힘들었다. 때문에 그는 꼬박 1년을 수업 짬짬이 연구계획서를 써서 미국 국립보건원(NIH)에 제출해 연구비를 따내는 데 성공했다.
그 후 1969년까지 5년간 일본뇌염 연구에 매달린 결과 그는 많은 것을 밝혀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뇌염 백신이 개발되면서 환자 발생수가 급격히 줄었고, 거기에다 논에 농약이 많이 치자 뇌염모기들이 사라져버린 것. 즉, 일본뇌염에 관한 연구가 장족의 발전을 하면서 굳이 뇌염 연구를 하지 않아도 될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미육군성에 연구계획서 제출해 연구비 지원 받아
따라서 그는 일본뇌염 연구를 그만두고 연구주제를 유행성출혈열로 바꾸었다. 이 연구주제를 택한 이유 중 하나는 역시 미국으로부터 연구비를 받기 위해서였다. 6.25전쟁 당시 유엔군 사령부는 유행성출혈열 연구센터를 만들고 고급 인력과 엄청난 물량을 투입해 괴질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미국에서 노벨상을 받은 박사 2명을 포함한 230여 명의 연구자들이 한국으로 와서 연구하는가 하면, 채집한 재료를 미국으로 가지고 가서 연구했다. 하지만 15년 동안이나 매달렸으나 결국 병원체를 찾지 못했던 것.
학설도 분분했다. 세균에 의한 감염이라는 설에서부터 바이러스, 곰팡이 독소, 식물 독소 등이 병원체의 후보로 지목됐다. 그러다가 진드기로 인해 병이 생긴다는 가설이 나오자 미군은 매년 300만 달러를 진드기약 뿌리는 데 쓰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1969년 당시 휴전선 일대의 군인들 사이에서 원인불명의 출혈열 환자가 증가하는 것을 보고 이호왕 박사는 이 문제의 해결을 자신의 연구목표로 삼았던 것.
연구비를 타기 위해 미육군성 의학연구개발사령부에 연구계획서를 써서 제출했다. 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세계 석학들도 실패한 것을 한국의 무명 과학자가 도전하겠다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그들을 설득했으며, 결국 연구비를 지원받는 데 성공했다. (하편에서 계속)
-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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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4-10-29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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