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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몰래 도망시킨 ‘바보 의사’ 장기려 (상)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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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대학교복음병원의 7층에 연결돼 있는 폭 60센티미터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장기려’라는 문패가 걸린 철문이 나온다. 그 문을 열고 들어서면 49㎡의 크기에 방 2개, 부엌 겸 거실, 화장실이 있는 옥탑집을 볼 수 있다.

집안에는 거실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흔들의자와 함께 오래된 목조가구, 식탁과 옷장 등의 조촐한 살림살이뿐이다. 원래 병원 구내 교환실로 쓰기 위해 지은 이 집이 바로 장기려 박사가 생전에 거처하던 곳이다. 고신대복음병원측은 지난해부터 이곳을 재단장해 일반 시민에게 공개하고 있다.

‘한국의 슈바이처’이자 ‘행려병자의 아버지’ 혹은 ‘바보 의사’로 불렸던 장기려 박사는 1911년 8월 14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한학자였던 아버지 장운섭과 어머니 최윤경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남의 집 마름이었던 할아버지가 대지주 밑에서 소작지를 관리해 쌀 400석을 타작할 정도로 부를 이룬 덕분에 그의 부친인 장운섭은 그 재산을 바탕으로 1917년 고향에 의성학교를 세웠다.

'한국의 슈바이처' 혹은 '바보 의사'로도 불렸던 장기려 박사. 사진제공 : 장기려선생기념사업회

장기려는 이 학교를 거쳐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해 5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1928년에 졸업했다. 바로 그해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32년 수석으로 졸업했는데, 그 학교에 들어갈 당시 그는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한 굳게 다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졸업한 바로 그해 4월 그는 22세의 나이로 김봉숙과 결혼했다. 그의 장인 역시 의사였는데, 장인의 권유에 따라 그는 한국 외과의학의 개척자로 알려진 백인제 아래에서 외과를 공부했다. 백인제는 바로 지금의 백병원과 인제대학교를 만든 장본인으로서, 6·25전쟁 중에 북으로 끌려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인제의 조수로 활약하면서 그는 1936년까지 행한 270건의 실험 결과를 토대로 ‘충수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의 세균학적 연구’라는 논문을 써서 1940년 일본 나고야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에서 근무하던 때 소설가인 춘원 이광수가 척추결핵으로 그의 환자가 된 적이 있다. 바로 이때의 인연으로 인해 이광수는 장기려를 모델로 소설 ‘사랑’의 주인공 의사인 안빈이란 캐릭터를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교회 창고에서 무료 병원인 복음병원 개설

1940년 3월부터 1945년 8월까지 그는 평양연합기독병원의 외과과장으로 일하면서 많은 환자들을 치료했다. 해방 이후 그는 평양도립병원의 원장 겸 외과과장을 맡아 일하다가 1947년 1월부터 북한이 새로 만든 김일성대학의 의과대학 교수로 임명됐다.

북한 정부로부터 특별 대우를 받은 그는 김일성대학에서 ‘강좌장’이란 높은 직책을 겸했으며, 1948년에는 북한과학원에서 수여하는 ‘공화국 제1호 의학박사’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1950년 12월 6·25전쟁 때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부인과 2남 3녀는 그대로 북에 남겨둔 채 둘째 아들만 데리고 남쪽으로 피난했다. 잠시 전쟁의 포화를 피하면 바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평생 동안 북쪽의 가족들을 만나지 못한 채 그리움으로 가슴앓이를 하며 살아야 했다.

월남해서 부산으로 간 그는 제3육군병원에서 잠시 동안 근무하다가 사직하고 1951년 겨울 영도구의 제3교회 창고에서 무료병원을 시작했다. 지인이 미국에서 모금해온 돈과 유엔에서 지원하는 하루 50인분의 약, 그리고 장기려라는 의사 한 명으로 개설된 그 병원은 이름을 복음병원으로 정했다.

당시 굶어죽는 사람이 넘쳐나던 피난지 부산에서 복음병원이 무료진료를 시작하자 그동안 돈이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하던 환자들로 넘쳐 났다. 미군용 야전 천막 3채가 진료소와 입원실, 수술실로 모두 사용되던 그곳의 열악한 환경을 본 한 미군 의사는 ‘동물병원 같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장기려는 1976년까지 25년 동안 이 병원의 원장을 맡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의술을 베풀었다. 또한 그는 의술을 통한 사회봉사활동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영세민들에게 의료복지 혜택을 주기 위해 1968년 5월 발족시킨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대표적인 사례다.

1968년 청십자의료보험조합 발족시켜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 받자’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이 조합은 조합원들이 매월 약간의 조합비를 내고 병이 났을 때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제도였다. 대공황 당시 힘들어하던 실업자들을 위해 미국에서 시행한 ‘청십자’란 민간 의료조합 운동을 참고해 만들었던 것이다.

처음엔 걷히는 조합비에 비해 지출되는 의료비가 많아 힘들게 운영되었으나 1974년 보건사회부에서 정식 의료보험조합으로 인정받았다. 청십자조합의 이 같은 외로운 노력에 자극을 받은 정부는 드디어 1977년부터 500인 이상의 사업장에서 직장의료보험을 시작하고 1989년에는 전 국민 의료보험을 시행하게 되었다. 즉,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정신이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로 계승된 셈이다.

또한 그는 1970년 만성간질환자들의 모임인 부산장미회를 창설해 무료로 진료했으며, 1978년 거제도 애광원 후원회장, 1981년 부산 생명의 전화 개설, 1985년 한국장애자재활협회 부산지부장을 역임하는 등 지역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그의 선행은 다음의 유명한 일화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무료로 시작한 복음병원은 지속적인 운영을 위해 약간의 치료비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치료비가 없는 사람을 보면 장기려는 자신의 월급을 털거나 가불을 해서 대신 내주곤 했다.

그로 인해 가불할 월급조차 없게 되자 병원 직원들이 장기려의 월급에서 미리 치료비를 계산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러자 장기려는 밀린 입원비 때문에 퇴원하지 못하는 환자의 사정을 듣고 환자에게 다가가 몰래 속삭였다. “이따가 밤에 뒷문을 살짝 열어 놓을 테니 직원들 모르게 도망치세요.”

그는 다양한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9년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다. 이 상은 세계대전 직후 필리핀의 국부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을 기려 미국의 록펠러재단이 제정한 상으로서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이 상의 상금까지 고스란히 청십자조합에 털어 넣었다. (하편에서 계속)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2noel@paran.com
저작권자 2014-07-24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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