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돌아오는 11월 4일 ‘점자의 날’은 1962년에 시각장애인의 세종대왕이라 불리는 송암 박두성 선생이 한글 점자 '훈맹정음'을 만들어 반포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점자는 볼록한 점 여섯 개로 문자를 표현하는 발명품으로, 시각장애인의 문자 접근권을 신장시켰다. 그러나 오늘날 점자 환경은 녹록지 않은데, 올해 4월 국립국어원의 조사에 따르면 시각장애인 10명 중 7명이 '점자 책이 부족하다'고 답했다. 또한 점자 자료 공급이 부족하며 생활 공간 곳곳에서 점자를 접하기 어려워 전반적인 만족도가 낮다는 지적이 많다. 엘리베이터 버튼이나 안내 표지, 음료수 캔 등에서 가끔 보이는 경우를 제외하면, 비장애인들은 일상에서 점자를 접할 기회조차 드물다. 스마트폰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뉴스를 읽는 시대에, 정작 손가락으로 읽는 글자인 점자는 여전히 일상 속에서 희귀한 존재인 셈이다. 이러한 이유로 점자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꾸준히 높아지고 있으며, 디지털 정보 시대에 발맞춘 전자 점자 기술 역시 함께 발전하였다.
디지털 시대에 발맞춘 전자 점자 기술의 발전
전통적인 점자책은 종이에 돌기를 찍어내어 만든다. 내구성이 좋아 보관에는 유리하지만, 책이 크고 무거워 휴대가 어렵고 한 권에 담을 수 있는 정보량도 제한적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전자식 점자 디스플레이가 등장했다. 전자식 점자 디스플레이는 내부의 액추에이터(전기 신호를 받아 핀을 올리고 내리는 장치)가 핀을 순간적으로 올리고 내리며 화면의 텍스트를 점자 패턴으로 보여주는 기술이다. 실시간으로 전자책, 웹, 문서의 내용을 읽을 수 있고, 소음 없이 입력도 가능하다는 장점이 크다. 반면 기계식 핀 수가 많아질수록 부품 수와 비용, 고장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단점도 있다. 대부분 한 줄(20~40 문자) 위주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여러 줄을 동시에 보여 주는 멀티 라인 디스플레이는 수천 개의 점을 독립적으로 제어해야 하므로 제조 공정, 전력, 무게, 유지보수의 한계를 해결해야 했다.
최근 사이언스 로보틱스 저널에 발표된 ‘폭발 구동 (explosion-powered) 점 돌출’ 디스플레이 기술은 이러한 점자 과학의 한계를 극복하였다. 점자를 폭발로 구동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번 연구에서 개발된 점자 디스플레이는 작은 고무 풍선 같은 점자 돌기들이 배열된 형태이다. 각 점은 지름 2mm 정도의 실리콘 돔으로 되어 있으며, 평소에는 안쪽으로 오목한 상태로 존재한다. 여기에 아주 소량의 가연성 가스(부탄과 산소 혼합물)를 미리 채워두고 특정 점에만 전기 스파크를 일으켜 순간 발화시키면, 돔 내부 압력이 폭발적으로 높아지고 고무 막이 뒤집히면서 위로 튀어나온다. 비유하자면 각 점마다 초소형 에어백이 달린 셈인데, 전기 신호로 이 에어백을 순식간에 부풀려 해당 점을 밀어올리는 방식이다.
미세 폭발로 각 점이 솟아오르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0.24 밀리초(1초의 약 4천분의 1)밖에 되지 않을 만큼 빨라서 사람의 감각으로는 즉각적으로 느낄 수 없다. 점화로 생기는 열과 압력은 밀리초 단위로 소멸하고, 돔 표면은 곧 식어 안전에도 문제가 없다. 올라온 점은 손가락으로 눌러도 쉽게 꺼지지 않을 만큼 안정적이며, 35뉴턴 수준의 하중(노트북 컴퓨터 한 대 무게)에서도 패턴을 유지한다. 더 큰 차별점은 돔이 양안정(bistable) 구조라서 자체의 탄성으로 모양을 유지하기 때문에 점자가 올라와 있는 동안 별도의 전력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점자를 다시 내릴 때에는 연결된 미세 채널을 통해 내부 공기를 빼내는 진공 흡입을 가하여 돌기를 제자리로 위치시킨다.
초소형 폭발로 점자 핀을 밀어올리다
디스플레이의 구조는 여러 겹의 실리콘 고무층과 이를 지탱하는 인쇄회로기판(printed circuit board)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무층 중 하나에는 연료 가스가 흐르는 미세 채널이 새겨져 있어 각 점에 연료를 공급하고, 폭발 후에 가스를 배출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인쇄회로기판에는 각 점 아래 두 개의 작은 전극이 있어 전기 스파크를 발생시킨다. 이 모든 부분은 고무로 빈틈없이 밀봉되어 있어 먼지나 물이 스며들지 않는다. 무엇보다 움직이는 기계 부품이 거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기존 전자식 점자 장치가 수많은 부품 조립으로 이루어진 것과 달리, 이 장치는 하나로 성형된 고무판 몇 장과 간단한 회로기판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결과 부피와 무게를 줄이고 제조 비용도 낮출 수 있었다. 또한 마모될 부품이 없으므로 내구성이 높고, 혹시 일부 돔이 손상되어도 고무 시트 한 장만 바꾸면 손쉽게 복구할 수 있다.
연구진은 시제품 장치를 통해 새로운 점자 디스플레이의 성능을 검증했다. 'Big Red' 단어와 웃는 얼굴 이모티콘 등 다양한 패턴을 화면에 표시하자 시각장애인 참가자들은 이를 손끝으로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 또한 이 장치는 연료원과 전원만 갖추면 별도의 거치 장치 없이도 독립적으로 동작하므로, 휴대하거나 고정 설치해서 사용하기에 용이하다. 연구를 주도한 미국 코넬대학교의 로버트 셰퍼드 박사는 '이 새로운 점자 디스플레이가 기존 장치로는 사용하기 어려웠던 실외 공공 환경에서도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고, 향후 점자 셀 수를 늘려 더 큰 점자 화면으로 확장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또한 점자 사용자들의 문해력을 높이고 정보 접근성을 개선하는 용도는 물론, 촉각 피드백이 필요한 가상현실이나 원격 로봇 제어 등 다양한 분야에도 적용될 것으로 예상했다.
다줄 점자 전자책으로 실현될 문자 접근권
이번 연구는 정체되었던 점자 기술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혁신으로 평가된다. 특히 오랜 숙원이던 다줄 전자 점자책 실현에 한 걸음 다가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점자 사용이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에서 이러한 다줄 점자 디스플레이 기술은 시각장애인의 디지털 문해력을 높이고 사회적 기회를 넓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마침 한글 점자의 날을 맞아, 훈맹정음의 뜻처럼 모두에게 지식과 정보의 문을 열어줄 점자 기술의 발전을 기대해 본다.
관련 연구 바로 보러 가기
Explosion- powered eversible tactile displays, Heisser et al., 2025, Sci Robot
- 정회빈 리포터
- acochi@hanmail.net
- 저작권자 2025-11-05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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