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이 3만 7,000명을 넘는 신약개발 회사가 있다. 직원들은 밤낮없이 임상시험 결과를 살펴보고, 유전자와 세포 실험 결과를 분석하며, 항암제 후보를 놓고 토론한다. 그런데 이 회사에는 사무실도, 점심시간도, 월급날도 없다. 구성원 전원이 인공지능(AI) 에이전트이기 때문이다.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연구진은 이러한 가상 바이오기업(Virtual Biotech)을 설계하고 시험한 결과를 지난 9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하였다.
월급 없는 3만 7,000명 연구원의 정체
신약 하나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보통 10년 이상의 시간과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다. 먼저 질병에 관여하는 단백질이나 유전자를 약물 표적으로 골라야 하고, 이를 건드렸을 때 다른 장기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지 확인해야 한다. 또한 어떤 형태의 약물이 적합한지 판단하고,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 전략도 세워야 한다. 하지만 임상시험에 들어간 후보 물질의 약 90%는 최종 승인을 얻지 못한다. 효과가 충분하지 않거나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를 미리 판단하는 데 필요한 유전정보와 세포 지도, 논문, 임상 기록 등이 서로 다른 데이터베이스에 다양한 형식으로 흩어져 있다는 점이다. 사람이 이 방대한 정보들을 한꺼번에 검토하고 연결하기는 쉽지 않다.
연구진은 엔트로픽의 대규모 언어모델(LLM)인 클로드를 바탕으로 여러 AI 에이전트가 협업하는 가상의 신약 개발 조직을 만들었다. 여기서 말하는 AI 에이전트는 단순히 질문에 답하는 챗봇이라기보다, 필요한 자료를 찾고 분석 도구를 활용해 여러 단계의 업무를 수행하는 가상의 전문 연구원에 가깝다. 사람 연구자가 질문을 던지면 가상 최고과학책임자(chief scientific officer, CSO)가 업무 범위를 정하고 전문 에이전트들에게 업무를 나누어준다. 표적 발굴, 안전성 평가, 약물 형태 선정, 임상 개발 등 각 부서의 에이전트들이 병렬적으로 일을 수행하면, CSO가 결과를 종합하면서 근거가 부족하거나 빠진 부분을 찾아 추가 분석을 요구한다. 하나의 AI가 직접 모든 일을 처리하는 대신 실제 연구 조직처럼 역할을 나누고 서로의 결과를 연결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러한 구조의 장점은 대규모 분석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연구진은 임상시험 3만 7,075건에 각각 전담 에이전트를 하나씩 병렬 배치하였다. 직원 3만 7,000명이라는 표현도 여기서 비롯되었는데, 물론 이들은 상시 근무하는 직원이라기보다, 대규모 분석 때 동시에 투입된 작업 단위를 의미한다. 분석 결과, 특정 세포 종류에서 선택적으로 발현되는 유전자를 표적으로 삼은 약물은 임상시험을 통과할 가능성이 48% 높았으며, 부작용이 발생할 확률은 평균 32%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새로운 항암 치료 전략부터 임상 실패 분석까지
그렇다면 AI 에이전트로 이루어진 가상 바이오기업이 새로운 치료 전략도 제안할 수 있을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연구진은 폐암에서 치료 표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B7-H3이라는 단백질을 분석하도록 했다. B7-H3은 여러 암에서 많이 발현되며 면역반응을 완화할 수 있는 세포 표면 단백질이다. AI 에이전트는 유전정보와 공간 전사체* 자료들을 함께 살펴본 결과, B7-H3이 암세포뿐 아니라 종양 주변의 섬유아세포에서도 많이 나타나며, 그 주변에 면역세포가 적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B7-H3를 찾아가는 항체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물을 결합한 항체-약물 접합체(ADC)*를 유망한 치료 방식으로 제안하였다. 이 결과는 2025년 1월까지의 자료만으로 도출되었는데, 그 뒤 비슷한 작동 방식의 B7-H3 표적 ADC가 같은 해 8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혁신 치료제로 지정되었다. 물론 이것만으로 가상 바이오기업이 새로운 약물을 개발했거나 치료 효과를 예측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독립적으로 도출된 치료 전략이 이후 실제 임상 개발 방향과 맞아떨어졌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연구진은 실패한 임상시험의 이유를 되짚는 작업에도 AI 에이전트를 활용하였다. 궤양성 대장염 치료제인 빅사렐리맙(vixarelimab)은 염증 신호 전달에 관여하는 수용체인 OSMRβ를 막는 항체이지만, 임상 2상에서 충분한 효과를 보이지 못해 중단되었다. AI 에이전트는 치료에 반응하지 않았던 환자의 장 조직 자료를 분석하여 OSMRβ 하나만 차단하는 것으로는 서로 겹쳐서 작동하는 염증 신호망을 충분히 억제하지 못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이어 관련 신호들을 함께 반영한 지표를 만들었고, 이 점수가 OSMRβ 하나만 살펴보는 것보다 치료에 반응하지 않을 환자를 더 잘 구분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사람을 돕는 가상의 보조 연구팀
이번에 소개된 가장 바이오테크 기업은 막대한 양의 데이터를 빠르게 분석하여 사람 연구자가 놓칠 수 있는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데 강점이 있다. 반대로 희귀질환처럼 자료가 적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표적이나 인구 집단을 다룰 때는 결론의 정확성이 낮아질 수 있다. 무엇보다 논문에서 제시한 폐암 및 궤양성 대장염 사례는 동물실험과 임상시험을 통해 확인해야 할 가설이다. 이번 연구로 수만 개의 AI 에이전트로 이루어진 회사가 신약 개발의 불확실성을 단번에 해결하지는 못하겠지만, 사람이 다음 실험에서 무엇을 먼저 확인해야 할지를 제시해 주는 ‘가상의 보조 연구팀’이 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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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용어 해설
* 공간 전사체 분석(spatial transcriptomics): 조직의 어느 위치에서 어떤 유전자가 발현되는지를 지도처럼 보여주는 유전자 분석 기술
* 항체-약물 접합체(antibody-drug conjugate, ADC): 특정 표적을 찾아가는 항체에 세포를 죽이는 약물을 연결하여 원하는 세포만 선택적으로 죽이도록 만든 치료제
- 정회빈 리포터
- acochi@hanmail.net
- 저작권자 2026-10-13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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