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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리포터
2026-03-11

로마시대 '보드게임', AI가 규칙을 복원하다 로마 유적지에서 발견된 석판, AI시뮬레이션으로 고대 보드게임 '루두스 코리오발리' 규칙 복원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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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흔히 ’기록의 산물‘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기록으로 남지 않은 채 땅속에 묻힌 유물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과거의 일상을 복원하는 결정적인 열쇠가 되기도 한다. 

최근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교와 마스트리히트 대학교 등 국제 공동 연구진은 로마 제곡의 주요 거점 도시였던 '코리오발룸(Coriovallum, 현 네덜란드 헤를렌)'에서 출토된 격자무늬 석회암판의 수수께끼를 인공지능(AI)을 활용해 규명했다. 해당 유물은 그간 표면에 새겨진 비정형적인 격자 구조로 인해 기존의 고대 게임들과 정합성이 떨어져 정체불명의 유물로 분류되어 왔다. 그러나 연구진은 고고학적 마모 분석 데이터와 첨단 알고리즘 시뮬레이션을 결합하여, 약 2천년 전 로마인들이 즐겼던 독창적인 보드게임의 규칙을 역설계하는 데 성공했다. 미지의 격자무늬 석회암이 당대 로마인들의 유희 문화를 상징하는 사례로 확인된 것이다. 

연구팀은 이 게임에 유적지의 이름을 따 '루두스 코리오발리(Ludus Coriovalli)'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2천년 전 코리오발룸에서 사용된 석회암 게임판 실물. 정형화된 격자 구조가 아닌 독특한 동심원과 방사형 선이 새겨져 있어 오랜 시간 고고학계의 난제로 남아있었다. ⒸAntiquity
2천년 전 코리오발룸에서 사용된 석회암 게임판 실물. 정형화된 격자 구조가 아닌 독특한 동심원과 방사형 선이 새겨져 있어 오랜 시간 고고학계의 난제로 남아있었다. ⒸAntiquity

 

석회암의 사용 마모 분석을 통한 행동 패턴 정량화

연구진은 유물의 기능을 규명하기 위한 첫 단계로 육안 분석을 넘어선 '사용 마모 분석'을 실시했다. 

연구의 대상이 된 석판은 지름 약 220mm의 원형 석회암으로, 표면에는 7개의 동심원과 이를 가로지르는 방사형 선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러한 기하학적 문양은 단순한 장식이나 낙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으나, 연구팀은 고해상도 디지털 현미경과 3D 스캐닝을 통해 선들의 깊이와 조도를 미시적으로 측정함으로써 결정적 단서를 포착했다.

정밀 분석 결과 석판의 특정 구역과 선의 교차점에서 의도적인 마찰에 의한 '연마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는 게임의 말(Piece)이 특정 경로를 따라 수만 번 반복적으로 이동했음을 입증하는 정량적 지표다. 특히 석판의 가장 바깥쪽 동심원보다 안쪽 구역의 마모율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높았는데, 이는 게임이 판 전체를 무작위로 쓰기보다 중심부를 향해 집중되는 전략적 구조를 가졌음을 시사한다는 게 연구진의 분석이다.

마모는 특히 방사형 선과 동심원이 만나는 교차점 주변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는 게임의 말들이 해당 지점에 장시간 머물거나 자주 경유했음을 의미하며, 단순한 행운보다는 계산된 전략이 필요한 게임이었음을 뒷받침한다. 

네덜란드 헤를렌 로마 박물관의 카렌 제네슨(Karen Jeneson) 박사는 “유물에 각인된 물리적 흔적은 수천 년 전 사용자의 반복적인 행위가 남긴 일종의 데이터 로그(Data Log)와 같다.”고 말했다. 그는 단순한 낙서처럼 보였던 선들은 사실 치밀한 게임의 설계도였으며, 이 마모 패턴은 AI 시뮬레이션이 과학적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게 하는 결정적인 검증 기준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고해상도 미시지형 분석을 통해 석판의 인위적 마모 구역과 자연 상태의 표면을 정밀하게 대조하여 특정 경로를 따라 반복된 게임 플레이의 물리적 흔적을 입증했다. ⒸAntiquity
고해상도 미시지형 분석을 통해 석판의 인위적 마모 구역과 자연 상태의 표면을 정밀하게 대조하여 특정 경로를 따라 반복된 게임 플레이의 물리적 흔적을 입증했다. ⒸAntiquity


‘루디(Ludii)’ 엔진을 활용한 규칙 최적화 시뮬레이션

연구팀은 추출된 마모 데이터를 바탕으로 범용 게임 학습 시스템인 '루디(Ludii)' 엔진을 활용해 복원 모델을 구축했다. 

연구진은 로마 시대의 전략 게임인 '루두스 라트룬쿨로룸'과 북유럽의 '타플(Tafl)' 계열 게임 등 당시 북유럽과 로마 접경 지역에서 유행했던 보드게임들의 핵심 메커니즘을 변수로 입력했다. 이후 AI는 이동 방식, 포획 규칙, 승리 조건 등을 조합하여 수만 가지의 규칙 조합을 생성했다. 이렇게 생성된 각 규칙 세트를 바탕으로 수백만 번의 가상 대국을 수행하며 세 가지 핵심 변수를 검증했다. 

첫째는 게임의 '생동감(Vitality)'으로, 무한 반복이나 조기 교착 상태 없이 논리적인 승패 결정이 가능한지를 분석했다. 둘째는 '전략적 깊이'로, 숙련된 플레이어와 초보자 사이의 유의미한 실력 차이가 발생하는 규칙인지를 판단했다. 마지막은 '경로 일치도'로, AI가 도출한 최적의 이동 경로가 실제 유물의 마모 패턴과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확률적으로 계산했다.

수많은 시뮬레이션 결과 중앙에 위치한 '왕' 혹은 '방어측' 유닛을 포위하거나 특정 지점으로 탈출시키는 비대칭 공방전 형식이 코리오발룸 석판의 마모 패턴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원형의 판에서 방사형으로 이동하는 방식은 기존의 사각형 판 위주였던 로마 게임과는 차별화된 지점이다. 이는 로마의 게임 문화가 지역 토착 문화와 융합되어 독창적인 로컬 게임으로 진화했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라 할 수 있다.

AI 시뮬레이션을 통해 복원된 '루두스 코리오발리'의 대국 모델. 이 게임은 더 많은 말을 가진 플레이어가 더 적은 말을 가진 플레이어를 차단(봉쇄)하려고 시도하는 방식으로 추정된다. ⒸAntiquity
AI 시뮬레이션을 통해 복원된 '루두스 코리오발리'의 대국 모델. 이 게임은 더 많은 말을 가진 플레이어가 더 적은 말을 가진 플레이어를 차단(봉쇄)하려고 시도하는 방식으로 추정된다. ⒸAntiquity


AI가 여는 ‘게임 고고학’의 다음 단계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연구팀은 로마 제국 북서부 지역에서 ‘하렛타블(Hnefatafl)’ 계열의 차단형 게임이 사용됐을 가능성을 제기함으로써, 해당 게임 유형의 시공간적 범위를 기존 학설보다 훨씬 과거로 확장시켰다. 중세 이후 북유럽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게임 문화가 이미 로마 후기 북부 지방에서도 활발히 소비되고 있었음을 디지털 데이터로 입증한 것이다.

한편, 이번 성과는 “형태는 명확하나 규칙은 미지인” 수많은 유물에 대해 새로운 분석 틀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혁신적이라는 평을 받는다. 

크리스트 박사팀이 활용한 ‘루디(Ludii)’ 시스템은 수백 종의 전통 게임 규칙을 모듈화하고 있어 향후 다른 지역에서 발견될 모호한 유물에도 즉각적인 AI 시뮬레이션 적용이 가능하다. 표면 마모도와 말의 출토 위치, 시대적 배경을 변수로 입력하면 어떤 규칙이 가장 개연성 있는가를 정량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표준 게임 고고학’ 모델이 마련된 셈이다.

무엇보다 이번 연구는 인공지능이 단순한 연산 도구를 넘어, 과거 인간의 행동 패턴을 재구성하는 인문학적 매개체로 기능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가상의 고대 플레이어 수천 명을 생성해 대국을 치르게 하고, 그 안에서 도출된 선호 패턴을 실제 마모 흔적과 대조하는 방식은 타 분야로의 확장성도 무궁무진하다. 이는 과거의 이동 경로, 도시 보행 패턴, 시장의 거래 전략 등 인간 활동의 흔적이 남은 모든 유적 분석에 적용될 수 있는 방법론이다.

이번 연구의 무대인 네덜란드 남부 도시 헤를렌(Heerlen). 로마 제국 당시 '코리오발룸'으로 불렸던 이곳은 북부 전선의 주요 거점이자 문화적 교차점이었다. ⒸAntiquity
이번 연구의 무대인 네덜란드 남부 도시 헤를렌(Heerlen). 로마 제국 당시 '코리오발룸'으로 불렸던 이곳은 북부 전선의 주요 거점이자 문화적 교차점이었다. ⒸAntiquity

물론 연구진은 이 유물이 게임판이 아닐 가능성이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제3의 변형 규칙이었을 가능성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진 게임 규칙과 유물의 물리적 흔적, 그리고 AI가 보여준 정밀한 시뮬레이션 결과는 '차단형 보드게임'이라는 결론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한다. 연구진은 “게임의 역사는 우리가 고고학 자료에서 ‘놀이의 흔적’을 얼마나 잘 읽어내는지에 달려 있다. 우리는 이제 유물을 수동적으로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유물이 과거에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알고리즘을 통해 체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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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doi.org/10.15184/aqy.2025.10264

김현정 리포터
vegastar0707@gmail.com
저작권자 2026-03-11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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