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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통신기술
김현정 리포터
2025-07-29

'소버린AI 시대'의 한국형 해답, 조선 고전에서 찾다 전북대 전종욱 교수, AI와 전통의학 융합으로 신약개발 플랫폼 구축에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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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이 최근 창립한 '소버린AI포럼'이 국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소버린AI’란 특정 국가가 독립적인 인프라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자국민의 가치와 철학에 부합하는 AI를 자율적으로 개발하는 개념으로,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한국만의 AI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시도다. 인공지능이 의료계를 혁신하고 있는 가운데 전통 한의학 고전에서 신약개발의 실마리를 찾는 독창적 연구가 등장했다. 

최근 글로벌 제약업계는 신약개발 비용이 10조원, 개발 기간이 10년에 달하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특히 한국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지만 제약 분야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나라가 보유한 풍부한 전통의학 자료를 AI로 분석해 신약개발에 활용하려는 시도가 새로운 돌파구로 부상하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AI사회연구소가 주관하는 '한국 소버린 AI의 길: 전통과 미래의 대화' 포럼 포스터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AI사회연구소가 주관하는 '한국 소버린 AI의 길: 전통과 미래의 대화' 포럼 포스터 Ⓒ한국학중앙연구원

 

20년 번역 작업으로 탄생한 디지털 의학 데이터베이스

전종욱 전북대학교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는 23일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개최한 ‘AI사회연구소 포럼’에서 "동의보감과 AI의 융합: 한국형 AI 혁신의 사회적 가치"를 주제로 발표했다. 전 교수는 조선후기 실학자 서유구(1764~1845)가 편찬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의 의학편 『인제지』를 2005년부터 20년간 번역하며 구축한 AI 기반 신약개발 플랫폼 '메디플랜트(MediPlant)'의 성과를 공개했다.

『인제지』는 동의보감(90만자)보다 방대한 110만자 분량으로 총 28권에 이름이 있는 처방 5천여 개와 단방 6천여 개가 수록되어 있다. 전 교수는 "서유구는 당시 존재하는 모든 의학 지식을 종합하려 했다"며 "동의보감의 90% 이상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시대의 『의종금감』, 『경악전서』, 『임증지남의안』 등 중요한 의서들도 대거 수록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인제지』에 수록된 세계 최초 수준의 색인 시스템 『탕액운휘』다. 전 교수는 "우리나라 의서에서 색인이 있는 건 처음 봤다"며 "4,799개 처방을 106운자 순서에 따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동명이방(같은 이름의 다른 처방)까지 구분해 놓았는데, 컴퓨터 없는 시대에 오류가 하나도 없었다"고 놀라움을 표했다.

조선시대 실학자 서유구가 약 36년간 저술한 백과사전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wikipedia
조선시대 실학자 서유구가 약 36년간 저술한 백과사전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wikipedia

 

빅데이터 분석으로 입증된 전통 처방의 과학적 근거

전 교수팀이 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 이정설 박사와 함께 개발한 메디플랜트 플랫폼은 『인제지』의 모든 처방 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해 증상과 약재 간의 상관관계를 통계적으로 분석한다. "5천개 처방을 분석한 결과는 민족약물학에서 5천명에게 인터뷰한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고 전 교수는 설명했다.

이 플랫폼의 유효성은 실제 동물실험을 통해 검증됐다. 당뇨병을 뜻하는 '소갈' 증상에 대해 분석한 결과, 천화분(과루근), 맥문동, 오미자 순으로 특이도가 높게 나타났는데, 당뇨병 모델 쥐에게 각 약재 추출물을 투여한 실험에서 통계 순위와 실제 효과가 정확히 일치했다. 전 교수는 "세 약재를 1:1:1로 배합했을 때 개별 약재보다 더 좋은 효과가 나타났는데, 이는 한의학의 배합 원리를 과학적으로 입증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분석 기법은 상업적 활용 가능성도 보여줬다. 당귀와 천궁에 작약을 추가한 3가지 조합은 현재 건강기능식품으로 출시된 '헤모힘'의 구성과 정확히 일치했다. 연구팀은 이 기술로 특허 2건을 등록했으며, 여러 제약회사와 협력 논의를 진행한 바 있다.

조선 후기 서유구가 편찬한 『임원경제지』를 AI가 분석해 전통 한의학 지식을 현대 신약개발에 활용하는 융합 연구가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 Ⓒ사이언스타임즈 김현정(ChatGPT 생성)
조선 후기 서유구가 편찬한 『임원경제지』를 AI가 분석해 전통 한의학 지식을 현대 신약개발에 활용하는 융합 연구가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 Ⓒ사이언스타임즈 김현정(ChatGPT 생성)

 

AI 시대가 가능케 한 융합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

전 교수는 AI 기술의 발전이 연구 방법론을 근본적으로 바꿨다고 평가했다. "예전에는 한자를 모르는 프로그래머와 코딩을 모르는 문헌학자가 따로 작업해야 했지만, 이제는 AI 도움으로 혼자서도 상당 부분 작업이 가능해졌다"며 "AI가 초서 문헌을 50-60% 수준까지 해독할 수 있게 되면서 연구 환경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했다.

이에 탄력을 받은 연구팀은 문헌 분석을 넘어 실제 신약후보물질 발견까지 연결하는 통합 플랫폼을 구상하고 있다. 전 교수는 "허브에 들어있는 유의미한 성분이 보통 2천개 정도인데, 이 중에서 의미 있는 성분을 찾아내는 작업을 가상 스크리닝과 지식 통합 기법으로 수행한다"고 말했다.

연구팀이 개발한 핵심 아이디어는 FDA에서 이미 승인된 약물의 화합물 구조를 활용하는 것이다. 전 교수는 "우리 몸에 있는 리셉터에 어떤 화합물이 자물쇠 열쇠처럼 들어가서 작동해야 하는데, FDA 승인 약물이 생체 리셉터에 결합하는 모양을 살펴본 다음, 약재 속 성분 중 맞물리는 부위와 비슷한 것을 찾아내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접근법으로 개발한 알고리즘을 통해 암세포주 실험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얻었으며, 연구 성과는 2021년 국제학술지 'BMB Reports'에 게재됐다.

전 교수는 "문헌에서 신약개발까지 가는 길은 단순한 브릿지가 아니라 '대륙을 연결하는 연륙대교'"라며 "최소 5개 이상의 학문 분야가 연결돼야 하는 거대한 융합 프로젝트"라고 강조했다.

AI 기술과 전통 한의학의 융합을 통해 신약개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연구가 주목받고 있다 ⒸGetty Images Bank
AI 기술과 전통 한의학의 융합을 통해 신약개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연구가 주목받고 있다 ⒸGetty Images Bank

 

‘소버린AI 시대’의 동아시아 한의 문명권 구상

전 교수가 제시한 더 큰 비전은 단순한 신약개발을 넘어선다. 그는 "동아시아를 '한자 문명권'이라고 얘기하는데, '한자 문명권'에 못지않게 '한의 문명권'이라고 할 수 있다"며 "중국의 중의학, 일본의 캄포의학, 북한의 동의학, 우리나라 한의학, 월남의 월의학 등을 모두 아우르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IMWON(Innovative Medical Wisdom on Nature)' 프로젝트를 통해 "대한민국이 한의 문명권 연구의 세계적 허브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 프로젝트는 핵심 연구진 20명 내외와 20개 실험실이 연결된 허브-스포크 구조로 구상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 AI사회연구소 한도현 소장은 "AI 기술은 더 이상 이공계의 전유물이 아니라 문화적 자산과 역사 인식이 함께 작동해야 하는 사회기술"이라며 "이번 포럼은 한국형 AI, 즉 소버린AI의 가능성을 구체적 사례와 전략을 통해 실증적으로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 교수의 연구는 전통 지식과 현대 AI 기술의 만남이 어떻게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200년 전 조선 지식인의 통합적 사고가 AI 시대에 다시 빛을 발하며, 소버린AI 시대 한국만의 독창적 길을 제시하고 있다.

김현정 리포터
vegastar0707@gmail.com
저작권자 2025-07-29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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