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조지아 주정부는 지난 1996년 실명을 밝히지 않은 익명성 댓글 등에 강력한 제재를 가하는 '인터넷 사찰법'을 시행한 바 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법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렸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최대한 존중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에서다.
지난해 말 미국 의회는 불법 다운로드를 막기 위해 온라인해적방지법인 'SOPA'와 지적재산권보호법인 'PIPA'을 추진했다. 이 법안은 음악, 동영상 등의 불법 다운로드가 이뤄질 경우에는 해당 사이트의 접속을 차단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제재였다.
특히 SOPA는 개인이나 업체가 자신이 보유한 저작권을 침해하는 웹사이트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후, 미 법무부가 인터넷 서비스 공급업체를 통해 해당 사이트를 차단할 수 있도록 허용할 만큼 그 강도가 강력했다.
영국·프랑스 등 익명성을 헌법으로 보장
이 법안은 미 상공회의소(USCC), 전미영화협회(MPAA), 음반산업협회(RIAA) 등 저작권단체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더구나 ABC, ESPN 등 주요 미디어 그룹들도 이 법안 통과를 지원하고 있었다.

반면 백악관은 SOPA와 PIPA를 시행할 경우, 해적행위 단속을 넘어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고 법안통과를 강력히 반대했다.
불법 다운로드에 법적 조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무작정 제재를 가할 경우 표현의 자유 침해는 물론, 해킹과 같은 바이러스 공격이 더 성행할 것을 우려했다. 미국 정부는 만일 SOPA와 PIPA가 의회를 통과할 경우에는 오바마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음을 내비칠 정도였다.
여기에 구글, 트위터, 페이스북 등 대형 인터넷 서비스 업체들 역시 '사상 최악의 법안'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수억 명이 사용하고 있는 서비스를 몇 명의 불법 이용자들 때문에 통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많은 네티즌들 역시 반대 입장에 서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의회는 이 두 법안 심의를 무기한 연기하는 결정을 내렸다.
프랑스, 영국도 익명성을 보장하고 있다. 프랑스 국가프라이버시위원회는 인터넷 정책을 시행하는 데 있어 익명성을 개인 자신의 정보에 대한 보호 차원에서 권장하면서 적극 지지하고 있다.
영국의 정보보호법도 익명성을 최대한 보장하고 있다. 개인정보 보호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익명성 보장을 통해 '공정하고', '지나치지 않는' 개인정보 수집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한국 판례, 개인정보 보호보다 명예훼손 중시
각국에서 익명성을 이처럼 강조하고 있는 것은 개인 프라이버시(사생활)를 강조하는 풍토에 기반하고 있다. 특히 유럽은 프라이버시를 헌법상 기본권으로 보장하면서 사생활을 침해하려는 어떤 시도도 엄히 금지하고 있다.
반면 미국 연방헌법은 프라이버시를 명문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헌법상 부당한 수사, 언론자유 침해 등과 같은 특정 사안들에 대해서는 사생활 침해를 엄격히 금하고 있지만 전체 국민 차원의 프라이버시에 대해서는 특별한 규제가 없다.
때문에 개인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면 정부, 기업, 민간 등 누구든지 개인정보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금융계좌정보는 아예 프라이버시로 보지 않고 있으며, 그 결과 수사기관이 법원 영장 없이 자유로운 검색을 시도할 수 있다.
알 권리를 보장하고, 프라이버시를 존중하지 않는 미국의 법 제도는 구글, 페이스북과 같은 놀라운 아이디어를 창출할 수 있는 기반이 되고 있다. 또 수사기관의 활동을 보장해줘 세계에서 가장 투명성이 높은 나라가 될 수 있는 환경이 됐다.
한국의 경우 최근 법원 판결들을 보면 사생활 보호를 폭넓게 인정하는 추세다. 그러나 대다수 판결이 명예훼손 측면에서 다뤄지고 있다. 미국, 유럽에서의 사생활 침해는 본인 허락 없이 개인정보를 유포하는 행위다. 반면 한국의 사생활침해는 허위사실 유포로 인식되고 있다.
주목할 점은 미국, 유럽에서의 사생활 침해는 중죄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사생활 침해로 판결이 나면 피고인이 파산 지경에 이를 만큼 그 손해배상액이 큰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인터넷에서 익명성이 보장되고, 그처럼 자유가 보장돼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과 같은 역기능이 난무하지 않는 이유다.
인터넷과 관련 사생활 정보에 대한 국내 법 체계는 지난 2011년 3월 29일 제정된 개인정보보호법이 거의 유일하다. 그만큼 변화하는 인터넷 환경에서 프라이버시 문제를 간과해온 결과이기도 한다.
인터넷 프라이버시에 대한 법적인 재해석과 함께 인터넷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하고 있는 약자에 대한 배려가 무엇보다 필요한 때다.
- 이강봉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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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2-09-04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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