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안으론 절대 볼 수 없는 원자의 세계를 뛰어난 상상력과 면밀한 수학적 통계로 열어 젖혔던 몇 안 되는 천재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 박사이다. 이 페르미 박사의 이름을 딴 페르미연구소는 유럽입자가속기연구소(CERN)와 함께 전 세계 입자물리학의 양대 산맥으로 군림하고 있다.
그런데 페르미연구소가 한국의 과학자들과 친숙한 과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난 70년대 한국의 천재 과학자 고(古) 이휘소 박사가 물리부장을 지냈으며, 현재 이 연구소의 부소장이란 중책을 맡고 있는 사람도 한국인 여성과학자 김영기 교수(49)이다.
이휘소 박사의 제자인 강주상 교수의 제자인 김 부소장은 시카고대 입자물리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지난 2004년부터 미국 페르미 국립 가속기연구소 ‘양성자·반양성자 충돌 실험 그룹’(CDF)의 공동 대표 그리고 지난 2006년에 페르미연구소의 부소장에 올랐다.
한국이 역점적으로 추진 중인 중이온 가속기의 설계 자문을 맡고 있는 그녀는 최근 한국과학창의재단이 후원한 아시안 사이언스 캠프를 위해 방한했다. 지난 5일 김 부소장은 고려대 인촌기념관 대강당에서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초청 연사로 과학도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펼쳤다.
‘충돌의 여왕(Collison Queen)’이란 별명을 갖고 있듯이 김 부소장은 ‘새로운 입자 발견으로의 길’이란 주제를 통해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입자 및 입자가속기 분야의 최신 이론과 이슈를 들려줬다.
이 강연에서 김 부소장은 힉스(Higgs) 입자의 발견에 대해 강한 열정을 보였다. 모든 소립자에 질량을 부여하기 때문에 ‘신의 입자’로 불리지만 아직도 발견되지 않고 있는 힉스 입자는 전 세계 입자물리학자들의 로망이다. 과연 그녀는 힉스 입자를 발견할 수 있을까? 강연 현장에서 김 부소장을 만나 보았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현재 나는 미국의 페르미연구소의 부소장이자 CDF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CDF는 2004년부터 시행된 페르미 국립가속기연구소의 입자실험 기구로서 ‘양성자/반양성자 충돌실험 그룹(CDF)’을 말한다. 전 세계 12개국 62곳의 대학 및 연구소의 물리학자 85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또 페르미연구소 부소장으로 연구소장을 보필하면서 연구소의 대내외적인 행정업무도 관장하는 가운데 본업인 입자물리 연구도 병행하고 있다."
페르미연구소를 간략히 소개하면
"페르미연구소는 매우 넓으며 단순한 연구소라기보단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하나의 큰 생활공동체다. 주지하듯이 이 연구소는 입자가속기를 갖고 있다. 이 가속기를 관리하기 위해서 이 곳에는 물리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 이외에 연구를 돕는 엔지니어, 사무원, 가족 등 3천여 명이 살고 있다. 소방서, 병원 등 각종 편의시설이 있고, 마을 주위에는 고추밭이 있어서 지역주민들이 연구소 주위에서 고추를 따가기도 한다. 나 역시 부소장으로서 지역사회와 친근하게 지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장 주된 업적은 무엇인가
"1990년 페르미연구소의 양성자/반양성자 충돌실험그룹(CDF)에 참여해 소립자의 하나인 '탑쿼크'와 W입자를 최초로 발견한 일이다. 탑쿼크, W입자 등은 아주 무거운 소립자들로 전 세계 과학자들의 염원인 힉스 입자를 규명하는 키워드가 되는 입자들이다.
이런 입자들은 원래 우주에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다. 그래서 가속기가 필요하다. 페르미연구소에 있는 입자가속기를 이용, 충돌시키면 초창기 우주의 엄청난 고에너지가 생성되고 탑쿼크와 W입자들이 만들어진다. 즉, 입자가속기란 초기 원시우주의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탑쿼크 입자는 질량이 아주 크다. 수소 질량보다 약 170배 크지만 가장 작은 소립자이다. W입자는 탑쿼크의 절반 정도 되는 질량을 갖고 있다. 탑쿼크나 W입자 등과 같은 소립자들은 수명이 매우 짧아 바로 붕괴한다. 붕괴한 입자들의 방사선을 역으로 계산해서 두 입자의 질량을 계산하면 힉스 입자의 질량을 어느 정도 계산할 수 있다.
모든 공기를 빼낸 진공임에도 불구하고, 그 진공의 공간 안에 힉스란 입자가 있을 수 있다. 소립자가 생성되면 이 소립자와 공간 안의 힉스 입자가 상호작용을 해서 소립자들이 질량을 얻게 된다는 것이 지금의 이론이다."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목표는
"물론 힉스 입자의 실체를 규명해내는 것이다. 지금 많은 이론이 만들어졌지만 아직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힉스 입자가 발견될 경우 기존의 물리학을 새로 써야 할 정도로 엄청난 파급효과를 갖고 있다. 이를 위해선 가속기가 필수불가결한 도구이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수천 명의 연구자들이 달려들어서 찾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이 힉스 입자가 소립자들에게 질량을 주는지, 안 주는지의 실험을 통해서 이론을 확실하게 규명해내는 것이 우리의 큰 과제다."
평상시 좌우명이 있다면
"지난 2006년 내가 연구소 부소장에 취임했을 때 아버님이 ‘경천애인(敬天愛人)’이란 글귀를 보내주셨다. 나는 지금도 이 말을 새기며 살고 있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은 하늘을 공경(恭敬)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이다. 한 마디로 하늘의 이치를 따르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란 뜻이다. 하늘을 공경하는 경천(敬天)이란 말과 사람을 사랑하는 애인(愛人)은 인류를 위해 봉사해야 할 과학자가 반드시 마음 속에 지녀야 하는 글귀라고 생각한다."
- 조행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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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1-08-09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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