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 남극 세종기지에 들어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필자와 극지연구소 소속 직원들은 파리, 산티아고를 거쳐 푼타아레나스에 도착, 칠레 공군기를 이용해 남극으로 갔다.
한국을 출발한 일행은 13시간을 날아 파리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산티아고로 가는 항공편으로 갈아타기 위해 5시간 정도를 공항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대기 시간이 어정쩡해 그 시간을 공항에서 보내기로 했다. 불편한 공항 대합실 의자에서 보낸 5시간은 하루보다 더 길었다.
파리 드골공항에서 산티아고까지는 15시간이 걸렸다. 한국에서 파리를 거쳐 칠레 산티아고까지 오는데 순수 비행시간만 28시간이 걸린 셈이다. 지루한 비행을 마치고 칠레 산티아고 공항에 내렸을 때의 첫 감상은 이전에 전혀 접해보지 못한 삭막함이었다. 남반구에 위치해 한국의 계절과 정반대인 산티아고는 초여름이었지만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산티아고 공항에서 시내로 이동하면서 본 경치는 우리나라와는 사뭇 달랐다. 특히 안데스 산맥의 높은 봉우리를 뒤덮고 있는 하얀 빙하가 인상적이었다. 여러 차례 본 빙하지만 볼 때마다 신비를 느꼈다. 시내로 들어가는 도로에서는 한국에서 수출된 차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세상 정반대에서 보는 한국차는 한국에서 볼 때보다 더 반짝이고 디자인도 세련되게 느껴졌다.
풍경, 자동차, 사람… 모든 것이 색다른 산티아고
산티아고 시내에 도착하자 목이 작고 하체가 굵어 약간 둥글둥글하게 보이는 현지인들도 색달랐다. 비록 백인이지만 팔다리가 길고 얼굴이 갸름한 유럽의 백인들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유입된 백인들이 목이 짧고 약간 통통한 원주민을 닮아 가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티아고 시내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교포가 운영하는 ‘대장금’이라는 한국식당. 일행 중 1명이 10년 넘게 세종기지를 오가면서 확보한 단골 식당이다. 한인 교포는 물론이고 현지인들 사이에도 유명한 맛집이란다. 음식을 주문하고 식당 주변을 산책했다. 식당 주변 건물 벽은 스프레이 물감으로 그린 길거리 미술작품 ‘그래피티’가 많았다. 문외한인 필자가 보기에도 멋졌다.
칠레에서는 페인트 회사들이 그래피터들에게 스프레이 물감을 무료로 공급해준단다. 그래피터들은 건물벽에 무료로 공급받은 스프레이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맘에 들어 하지 않는 건물주인들은 돈을 들여 건물 전체를 새로 칠한단다. 페인트 회사 입장에서는 스프레이 페인트를 공짜로 나눠주는 비용보다 건물주들이 도색을 위해 구입하는 페인트를 통해 거둬 들이는 수입이 더 크단다. 얄팍한 상술일지 몰라도 상당한 수준의 그림들이 그려진 산티아고의 벽은 그래도 나름대로의 멋을 느낄 수 있었다.
식사를 하고 난 뒤에는 교포가 운영하는 민박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오랜 비행으로 피곤하기도 했지만 한국대사관을 찾아 공군기를 빌릴 수 있도록 칠레 정부에 요청을 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다. 한국은 주로 칠레 공군의 공군기를 이용해 킹조지섬에 들어간다. ‘댑(DAP)’이라는 민간 비행기도 있다. 하지만 비용이 너무나 비싸 잘 이용하지 않는다. 편도비행기 삯으로 손님이 적을 때는 200만원, 많을 때는 400만원가량이다. 한국에서 푼타아레나스까지 왕복 비행기 삯이 500만원 정도였으니 터무니없는 바가지다. 그래서 사람들은 칠레 공군기나 우루과이 공군기를 주로 이용한다.
칠레 입장에서는 킹조지 섬에 운영하는 군사 기지에 필요한 물품과 사람을 실어 나르면서 킹조지 섬에 들어가려는 다른 나라 연구원들을 자국 군용기로 태워주며 남극에 대한 우선권을 점유하려는 의도도 있는 것 아닐가 싶다.
필자는 일행과 산티아고에서의 일을 마치고 푼타아레나스로 떠났다. 남미 대륙에 있는 최남단 도시 푼타아레나스까지는 비행기로 3시간가량 걸렸다. 푼타아레나스는 초봄처럼 추웠다. 일행은 개인 짐을 챙겨 현지 사무소로 이동했다. 극지연구소는 남극세종과학기지를 지원하기 위해 푼타아레나스에 현지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단독주택인 사무소에는 숙소와 사무실, 그리고 음식을 직접 조리해먹을 수 있는 주방 등의 시설이 갖춰져 있다. 필자는 일행인 강천운 팀장, 그리고 필자보다 하루 늦게 도착한 다른 기지지원팀 대원들과 함께 푼타아레나스에서 일주일가량을 머물렀다. 이 과정에서 한국에서 보낸 다양한 장비들이 확인하고 칠레 현지에서 구매한 음식품 등의 물품을 임차한 화물선에 실어 세종기지에 보내며 일주일가량을 보냈다.
5년간의 짝사랑… 세종과학기지에 도착하다
12월 4일 드디어 푼타아레나스 칠레 공군비행장에서 군용기를 타고 남극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에는 필자를 비롯해 세종기지에서 1년간 머무를 월동대원들과 남극의 여름기간동안 연구활동을 벌이게 되는 하계대원, 그리고 2008년 대수선 사업으로 지어진 부두와 생활동을 비롯해 기지의 유지작업을 진행하는 건설 전문가들이 함께했다. 군용기는 민간비행기와 달리 무척이나 시끄러워 귀가 아플 정도였다. 혹시 몰라 프랑스에서 산티아고로 이동할 때 기내에서 받은 귀마개를 아주 유용하게 이용했다.
남극에 가까워지면서 바다에는 커다란 빙하가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필자를 태운 비행기는 5시간을 날아 세종과학기지가 위치한 킹조지섬의 칠레 프레이기지에 도착했다. 비행기 창밖으로 보이는 눈 덮인 프레이 기지는 남극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한 해를 보내고 교대를 앞둔 월동대원들도 마중을 위해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방한복을 입은 월동대원들이 그렇게 늠름할 수가 없었다. 영화에서나 봤던 세계 최고의 군인들이 품어내는 강렬한 포스가 풍겼다.
일행들과 비행기에서 내리자 칼바람이 얼굴을 사납게 할퀴고 옷깃을 파고들었다. 그래도 누구하나 춥다고 불평하는 이들이 없었다. 여러 번 남극을 방문한 이들은 “이정도 쯤이야” 하는 표정이다. 필자를 비롯해 남극을 처음 방문하는 이들도 남극을 찾았다는 호기심 때문에 바람을 의식하지 못했다.
보트를 타기 위해 눈이 쌓인 길을 따라 공항에서 20분가량을 걸었다. 칼바람이 불어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바닷가에는 일행을 세종기지로 실어 나르기 위해 ‘조디악’이라고 부르는 보트 2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얀 포말을 만들어내는 거친 파도 너머로 저 멀리 세종기지가 보였다.
그 순간 하얀색과 검은색으로 된 연미복을 입은 펭귄 여러 마리가 바다에서 해안으로 올라왔다. 겁내는 기색이 전혀 없이 뒤뚱거리며 일행들 근처로 다가왔다. 필자가 호기심에 1m 가까이 다가가도 겁을 내지 않았다.
보트를 타기 위해서는 우주복처럼 생긴 불편한 옷을 입어야만 했다. 활동은 불편했지만 방수기능과 방풍기능을 가지고 있어 안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입어야 한단다. 남극의 바닷물은 한여름에도 영상 2도가 되지 않아 바닷물에 빠지면 목숨을 잃기 쉽기 때문이란다.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자 파도가 거세어 보트가 롤러코스트처럼 요동쳤다. 파도가 옷은 물론이고 얼굴까지 흠뻑 젖게 만들었다. 보트를 잡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일행들 모두 바짝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거센 파도에 부딪친 앞으로 나갈 것 같지 않던 보트는 세종기지를 향해 조금씩 앞으로 전진했다. 보트를 탄지 20분가량이 지나자 멀리 세종기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20분가량 더 보트를 타고서야 세종기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다가 거칠어 평소보다 2배 이상 시간이 걸렸단다.
부두에는 교대를 앞둔 월동대원들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까지 오느라 고생했다며 반갑다고 박수도 쳐줬다. 부두에 올라서는 순간 일행들의 입에서 절로 환호성이 터졌다. 감정에 무딘 필자도 울컥했다. 무려 5년간 방문을 계획했던 남극 세종과학기지였다. 생명의 위험이 없어지자 배고픔이 갑자기 밀려왔다. 한식으로 배를 채우고 숙소를 배정받은 뒤 간단히 씻고 피곤에 지친 몸을 침대에 눕혔다.
“야호 이제 진짜 남극에 들어왔구나” 하는 승리감과 “앞으로 어떤 것들을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에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 글 : 박지환 자유기고가
- 저작권자 2010-06-04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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