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 남극 작년 말부터 지난 3월까지 4개월의 일정으로 세상의 끝에 위치한 남극세종과학기지에 다녀왔다.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춥고, 인간의 손길이 타지 않아 오염되지 않은 곳. 남극에 대한 오랜 갈망을 실행으로 옮긴 것이다. 2005년 북극에 위치한 다산과학기지를 다녀온 이후 만 5년만이다.
필자가 남극을 향해 한국을 떠난 것은 지난해 11월 4일이다. 하지만 남극까지 가는 길은 복잡하고도 오래 걸렸다. 한국을 출발한지 열흘 이상이 지나서야 세종기지에 들어갈 수 있었고 3개월을 그곳에서 머물렀다. 세종기지까지 가기 위해 3일을 비행기를 타고 날짜 변경선을 2번 넘었지만 피곤하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몸과 마음은 오히려 5년간 바래왔던, 지구의 마지막 남은 청정지역이자 오지를 간다는 설레임으로 흥분됐다.
한국에 돌아와 생각하니 세종기지에 머물렀던 3개월의 시간은 꿈만 같았다. 세종기지를 방문하기 위해 지난 5년간이나 남극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세종기지를 관리하는 극지연구소에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했던 일도 평생 잊혀지지 않을 추억으로 남았다.
세종기지로 출발할 당시만 해도 넉넉할 것 같았던 3개월의 남극 생활이었지만, 정작 세종기지를 떠날 때에는 ‘봄날의 꿈’처럼 짧아 아쉬움으로 남았다. ‘부지런을 떨어 좀 더 많이 돌아보고 좀 더 많이 경험할 걸’하는 후회가 밀려오기도 했다. 특히 세종기지 앞바다에 세워진 부두에서 보트를 타고 기지를 떠날 때에는 ‘언제 다시 남극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과 미련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만 느껴졌다.
펭귄, 해표, 남극도둑갈매기 등 눈에 선해
아직까지도 세상의 오지이자 가장 한적한 곳인 남극세종과학기지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기억들이 아름다웠던 한 편의 명작영화처럼 생생하다.
남극에서 보낸 날들은 머릿속뿐만 아니라 몸 곳곳의 세포에도 깊이 새겨져 있다.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굳이 펭귄마을에 가지 않더라고 펭귄을 볼 수 있었다. 남극의 신사 펭귄은 기지를 제 집 안마당처럼 ‘뒤뚱뒤뚱’ 돌아다녔다. 순하고 겁 많은 얼굴이지만 사람을 겁내지 않았던 웨델해표. 웨델해표는 오랜 경험으로 사람이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이밖에 모습이 개처럼 생겨 한 성질 하는 사나운 물개와 커다란 큰 코가 도드라진 코끼리 해표, 갓 부화한 새끼와 알을 지키기 위해 사람까지도 거침없이 공격하던 남극도둑갈매기(스쿠아)가 눈에 선하다.
기지에서 멀리 보이는 마리안 소만의 옥빛 빙벽이 바다로 허물어져 떨어질 때 들리던 우레와 같은 천둥소리, 바람 부는 날 기지 앞 바다에 떠다니다 기지주변 해안가로 모여든 각양각색의 기괴하게 생긴 유빙이 ‘딱딱’ 깨지는 소리도 여전히 귓가를 맴돌고 있다. 세종기지에서 사용하는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던 발전기의 소음도 지금생각해보니 어렸을 때 들었던 어머니가 불러주시던 자장가처럼 아련해진다.
한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불어 닥쳐 시야를 가리고 건물을 날려버릴 것 같았던 ‘눈폭풍(블리자드)’의 느낌은 피부에 생생하게 각인돼 있다. 필자가 세종기지에 머물던 지난 여름은 예년에 비해 블리자드가 유독 자주 발생하고 세기도 무척이나 심했다. 때문에 필자가 머무르던 비상숙소에서 생활동 건물로 이동하기가 쉽지 않았다. 남반구의 끝에 위치한 세종기지는 계절이 북반구에 자리한 한국의 계절과 정반대였다.
남극은 한국의 겨울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춥고 날씨가 변덕스러웠다. 하지만 블리자드 때문에 남극에서의 생활이 불편하거나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살을 에는 듯한’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 다니는 남극을 제대로 느끼고 경험할 수 있어 감사했다. 마치 미지의 땅에서 제대로 된 추억을 만들라는 신의 배려로 생각될 정도였다.
세상 끝 남극에서 부모형제처럼 지냈던 소중한 인연
세종기지를 지키는 월동대원들과 남극을 연구하기 위해 머물렀던 과학자들의 모습도 아직도 눈에 선하다. 특히 남극이라는 혹독한 환경에서 서로를 다독이고 위로하며 한해를 보내고 있을 월동대원들의 모습은 지금이라도 곁에 있는 것 같다. 시시때때로 몰아치는 블리자드에서도 자기의 분야에서 열심이었던 하계대원들의 빨갛게 얼었던 얼굴이 생생하다.
밤을 새워 글을 쓰던 필자가 가끔 정해진 식사 시간에 맞춰 가지 못하면 식사를 따로 챙겨주던 조리사, 비상숙소에서 혼자 생활하던 필자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하는 우려 때문에 매일 저녁 숙소를 찾아와 따뜻한 대화를 건네주던 대원들이 고맙기만 할 따름이다. 세상 끝 남극에서 부모형제처럼 지냈던 소중한 사람들과의 인연을 앞으로도 이어가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이제 남극에서의 생활은 추억으로 남았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다’는 회자정리(會者定離)를 알기에 이제 ‘헤어짐이 있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거자필반(去者必返)을 믿으려 한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세종기지에서 별탈없이 지낼 수 있도록 항상 보살펴 준 극지연구소와 세종기지의 모든 월동대원들께 감사할 따름이다.
- 글 : 박지환 자유기고가
- 저작권자 2010-05-28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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