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계 최고 보물이 원통 모양에다 백금 이리튬 합금으로 만들어진 쇳덩어리라는 얘기를 지난번에 했었다. 그것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국제 킬로그램 원기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 킬로그램 원기는 애초에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흥미롭게도 국제 킬로그램 원기의 탄생 배경은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시작된다.
혁명의 소용돌이가 불어 닥치기 시작하던 1780년대 후반, 비운의 왕 루이 16세는 새로운 도량형 체제를 만들 임무를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 부여했다. 이 위원회에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위대한 화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1790년 전 프랑스 지역의 도량형을 통일하기 위한 과학아카데미의 재무관으로 임명되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세금 징수에 관여했다는 죄목으로 단두대에서 목이 달아나기 전까지 말이다.
18세기 도량형은 나라마다 달랐을 뿐만 아니라 한 나라 내에서도 지방마다 서로 달랐다. 그러다 보니 소통과 교역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했고 국가의 합리적인 행정도 방해를 받았다. 18세기 프랑스를 예로 들자면 당시 사람들은 약 800개의 이름으로 25만개나 되는 도량 단위가 쓰이고 있다고 추정했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달랐던 도량형
무질서를 타파하기 위해 과학아카데미는 새로운 길이 단위와 질량 단위를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1791년 프랑스 전국의 대학자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 "지구의 북극에서 남극까지의 거리, 즉 자오선의 2천만분의 1을 단위로 삼자"라고 정하였다. 북극과 남극까지의 길이의 2천만분의 1을 길이 단위로 '1미터'라 명명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와 함께 질량 단위에 대해서는 이렇게 정의를 내렸다. 얼음이 녹는 온도에서 물 1리터가 갖는 무게를 질량 단위로 하기로 한 것이었다. 바로 1킬로그램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정의를 내린다고 해서 과학아카데미의 일이 끝나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1미터가 얼마나 되는 거리인지, 1킬로그램이 얼마나 되는 질량인지는 말만으로는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아카데미는 1미터를 측정하는 일에 돌입했다. 1미터의 길이를 아는 것은 단지 길이 단위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1킬로그램을 알려면 물의 1리터의 부피를 재야 하는데, 그러려면 길이가 정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1792년 두 명의 천문학자가 6년간의 자오선 원정에 나섰다. 그 주인공은 장 밥티스트 들랑브르와 피에르 메생이었다. 이 두 천문학자는 프랑스 북쪽의 됭케르크에서부터 파리를 거쳐 바르셀로나를 잇는 자오선의 길이를 측량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예상했던 1년여의 기간과 달리 이들의 임무는 무려 6년도 넘게 걸렸다. 혁명의 소용돌이로 온 나라가 어수선할 때 이들은 당시 최고의 과학기술 장비를 들고 교회의 첨탑을 오르고 높은 산들을 올랐다. 이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으며 심지어 목숨을 잃은 뻔한 일도 겪었다. 이렇게 구사일생으로 얻은 결과가 바로 1미터의 길이였다.
구사일생으로 얻은 최초의 원기
들랑브르와 메생의 원정 덕분에 1799년 최초의 미터 원기와 킬로그램 원기가 백금으로 만들어졌다. 최초의 1미터짜리 자와 1킬로그램짜리 추가 만들어진 셈이었다. 이 미터 원기와 킬로그램 원기는 바로 길이와 질량의 표준이자 정의였다.
이 자와 추가 바로 1미터이고 1킬로그램이다. 이때 만들어진 표준 원기들은 19세기 동안 길이와 질량의 표준으로 쓰였다. 19세기 말 새로운 원기가 등장하기 전까지 말이다.
참고로 당시 킬로그램의 정의는 애초의 것과는 조금 바뀌었다. 얼음이 녹는 온도가 아니라 물의 밀도가 가장 높을 때인 섭씨 4도로 수정되었던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일이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나라가 혼란과 혼동에 빠져 있는데, 새로운 도량형을 만드는 게 뭐 그리 중요한 일인가 싶을 것이다.
하지만 정권은 바뀌었어도 새로운 도량형을 세우는 일에 프랑스 정부는 지원을 계속했다. 당시 과학자들은 급박한 역사적 상황을 바라보면서 영원한 빛날 새로운 표준을 세운다며 용기를 냈다. 당시 계몽사상의 과학자들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을 위한 도량형을 세운다는 데 힘을 얻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우리나라를 포함해 오늘날 전 세계 거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사용하는 미터법이다. 하지만 미터법이 받아들여지기 전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혁명 후 영웅으로 부상한 나폴레옹은 1801년 “정복은 순간이지만, 미터법은 영원하리라”고 말하면서 프랑스 전역에 미터법을 강제로 시행했다.
하지만 1812년 나폴레옹은 자신의 집권력이 약화되자 미터법을 철회했다. 그런 후 몇 년 안 되어 나폴레옹은 실각했다. 그의 운명은 미터법과 함께 했던 셈이다.
1889년 새로운 질량 정의, 국제 킬로그램 원기
하지만 미터법은 나폴레옹의 말대로 살아남았다. 1840년 프랑스에서 먼저 부활한 미터법은 1875년 17개국이 미터협약을 맺으면서 국제적인 단위체계로 발전했다. 이후 1889년 제1회 국제도량형총회에서 새로운 길이와 질량 정의가 수립됐다. 당시 최첨단 과학기술을 동원해 1879년에 만들어진 백금과 이리듐 합금의 미터 원기와 킬로그램 원기가 새로운 길이와 질량 단위가 된 것이다.
왜 새로운 원기가 새로운 단위 기준이 된 것일까? 이전의 백금 원기와 1879년에 새롭게 만들어진 원기 사이에는 질량 차이가 난다. 물의 가장 안정적인 온도는 4도가 아니라 3.984도라는 게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이 온도차는 비록 미세하긴 하나 질량의 차이를 불렀다. 이 때문에 이전 원기와 새로운 원기는 질량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원기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위한 질량의 기준이 되었다. 국제 킬로그램 원기는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지금도 국제 킬로그램 원기는 여전히 질량의 정의이다. 하지만 같이 만들어졌던 미터 원기는 지금은 쓰이지 않는다. 길이의 정의는 왜 바뀌었을까? 그런데 왜 질량의 정의는 아직도 바뀌지 않은 걸까? 앞으로도 현재의 국제 킬로그램 원기는 계속 쓰일까? 그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된다.
- 박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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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09-05-29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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