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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응용과학
공하린 객원기자
2008-03-10

아몬드 모양의 눈, 모딜리아니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행복하고 슬픈 사랑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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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길고 쓸쓸한 느낌을 주는 여인을 그린 화가 하면, 많은 사람들이 모딜리아니를 생각한다. 무엇인지 모를 몽상과 시의 세계에 젖어 있는 것 같은 그림 속 주인공들. 이러한 이유에서 모딜리아니의 삶을 과도하게 이상화한 여러 편의 소설과 희곡이 나오기도 했다. 이처럼 극적으로 구현된 모딜리아니, 혹은 그의 작품이 갖고 있는 진정한 면모는 무엇일까.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는 이탈리아 리보르노의 유대계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이탈리아 고전 미술에 뿌리를 둔 철학자 스피노자의 후손이었고, 집안 분위기도 매우 철학적이었던 까닭에, 모딜리아니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이탈리아의 고전을 가까이 하며 자랐다. 1898년 8월경 모딜리아니는 ‘심한 병(장티푸스)’에 걸려 고열에 들떠 있을 때 환영 속에서 이탈리아 미술관과 대성당을 장식한 걸작들을 보았다. 건강을 되찾은 모딜리아니는 그 영향으로 중학교를 중퇴하고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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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개방적이고 지적인 소양은 모딜리아니가 미술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모딜리아니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점묘파의 창시자인 파토리(Giovanni Fattori, 1825∼1908)의 제자인 미켈리(Guglielmo Micheli, 1886∼1926)에게 정물화와 인물화는 물론 풍경화를 그리는 법을 배웠다. 이탈리아 인상주의 화가들도 풍경을 작은 색채의 점으로 표현하였는데, 모딜리아니는 그러한 기법들을 배우면서 이탈리아 미술사의 전통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 당시 그린 모딜리아니의 작품들 중 <토스카나 풍경>은 시에나 제단 위 장식 벽의 작은 풍경화처럼 ‘이탈리아 예술의 경향’, 즉 그의 예술의 토대가 되었던 ‘아름다움과 조화가 가득한 형태’를 잘 보여주었다.

모딜리아니는 피렌체나 베네치아 등지를 여행하며 유명한 고전 미술 작품들을 두루 만났고 그 작품들이 보인 이탈리아적 특징들을 내면화 했다. 모딜리아니가 만난 작품들 중 14세기 피렌체와 나폴리 등지에서 조각가로 활동한 티노 디 카마이노(Tino di Camaino)의 작품이 유명하다. 티노 디 카마이노의 작품 <안토니오 델리 오르시 주교>이 보인 “원통형 목 위에 얼굴을 비스듬히 배치하는 구도, 장식적 디자인과 조각적 볼륨의 통합, 선을 표현함에 단순히 도형적 추상 대신에 볼륨을 구성하고 매스를 집약하며 그것의 무게까지 강조하는 모습” 등 여러 가지 조형적 측면들이 모딜리아니의 작품 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딜리아니가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며 고전 작품이 갖고 있는 감각을 익혔지만 그들의 작품만을 모방한 것은 아니었다.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에서 미술 교육을 받아 ‘이탈리아적 것’ 혹은 르네상스 이후의 조형적 전통에 익숙해 있었다. 이러한 철학적 배경과 고전에 대한 존경은 평생 모딜리아니를 지탱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그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그러나 보다 창조적이고 현대적인 예술세계를 창조하고 싶어 했던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수많은 작가들을 만나며 자신이 갖고 있는 것에 새로운 요소들을 더해 갔다.


1906년 무렵 모딜리아니가 이탈리아를 떠나 파리에 도착했을 때 새로운 미술 운동들이 유럽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 당시 파리는 유럽 전위 예술의 중심지로서 자리 매김 하고 있었고, 파리의 급진적 화상들이 재능 있는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눈여겨보고 있었으며, 평론가들이 ‘야수들’이라고 조롱하던 앙리 마티스 등 무명 화가들의 작품들이 살롱을 중심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한편 기계문명의 급속한 발달과 과학 기술을 중시하는 풍조가 만연하면서, 오스만 남작이 설계한 대로에 9,622개의 가로등과 약 50만 개의 전구가 ‘빛의 도시’ 파리의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이처럼 기존에 관습을 부수려는 욕망들이 확대되면서, 예술에서 후기 인상파에 이어 야수파, 입체파와 미래파, 표현주의, 추상미술 등이 등장했다.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분위기에 이끌려 파리에 온 것은 아니지만 ‘파리’라는 토양에서 여러 작가들을 만나며 그들의 영향 아래 자신의 개성을 살리고자 했다. 1907년 무렵 파리에서 활동하던 야수파 화가들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회화의 자율성을 찾고 있었고, 고흐는 색을 혼합하지 않고 원색을 통해 특별한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었다. 이렇듯 다양한 전위미술의 틈바구니에서 모딜리아니는 세잔의 영향이나 피카소, 막스 자콥, 아폴리네르 등을 만나며 자기만의 방식을 만들어 나갔다.

모딜리아니는 1907년 <아비뇽의 처녀들>을 내놓아 입체주의의 효시가 된 피카소의 작품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한 일화에 따르면, 어느 날 모딜리아니는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어느 수집가의 부탁으로 그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그 곳에서 피카소의 작품을 발견하였다. 모딜리아니는 수집가에게 자신이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 영감의 원천으로 삼도록 피카소의 그림을 가까이에 걸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처럼 모딜리아니는 피카소나 로트렉, 아프리카 조각 등의 작품에 매혹되어, “나의 저주받은 이탈리아의 눈이 파리의 광선에 익숙해지지 않는다.”라고 답답함을 토로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피카소처럼 아프리카 조각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피카소가 의도하는 바와 근본적으로 다르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모딜리아니는 몇 점의 풍경화만을 그렸을 뿐, 이십 년 남짓의 작품 활동을 하면서 현재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오직 ‘사람만’을 그렸다. 모딜리아니의 초상화 작품에 명시된 친구나 친지를 모델로 한 작품과 무명 모델을 그린 작품이 있다. 모딜리아니의 초기 초상화들은 ‘초상화 속 주인공의 정신세계를 집중적으로 표현하는 능력과 형태와 색채에 대한 미감’이 뛰어났기 때문에, 모딜리아니는 당시 파리 상류사회 초상화가로 성공할 수 있는 자질이 충분했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파리 상류 사회의 초상화 화가가 되는 대신에 자신만의 기법을 만들어 나갔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초상화만의 특징이 모딜리아니의 작품에서 유난히 강조되었다. 초상화는 겉으로 보이는 신체적 특징을 드러내고 인물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화가에 대한 정보도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한다. 모딜리아니는 연륜이 쌓여감에 따라 자기 나름대로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설정한 후 그것에 맞추어 실제 초상화 속 주인공의 외양을 표현했다.

그의 초상화 구도의 특징은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전반적으로 뚜렷하게 강조된 윤곽선, 우아함을 강조하는 길쭉한 신체, 정면상이나 사분의 삼 옆얼굴, 비대칭으로 놓인 아몬드 모양의 두 눈, 창문 앞이나 방 한구석에 앉아 있는 모델 등이 있다. 또한 주인공 가까이에 주인공의 존재를 확실히 알려주기 위해 둥글둥글하고 장식적인 글자가 크게 쓰여 있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파블로 피카소의 초상, 1915>의 초상을 살펴보면, 어두운 얼굴색에 목신 같은 풍모, 화면 위에 크게 씌어진 ‘PICASSO’라는 둥글둥글한 글자가 그려져 있다.

모딜리아니의 작품에 나타난 과장된 단순성이나 견고한 구체성 등은 새로운 표현양식을 추구하기보다 ‘인간상의 심리적 특성을 강조하고 개성을 창조하려는 수단’이었다. 모딜리아니는 고전적 원근법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프리카의 흑인 조각, 입체파의 기법 등을 가져왔다. 그의 여러 인물들은 그 영향으로 원기둥이나 계란형의 구(球)로 구성하여 볼륨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공간을 면으로 분해하여 추상적인 공간을 구성하려는 입체파의 지적인 시도보다 형태를 단순화시키고 곡선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표현하여 ‘인간을 전체성으로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모딜리아니는 1918년 이후 작품에서 대부분 무명 인사를 그려 인물의 익명성을 강조했다. 모딜리아니는 전쟁의 여파로 1918년 이후 남프랑스로 오기 전인 1916년 폴란드 출신 시인인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1889∼1932)와 친분을 맺은 후 재정적으로 후원하고 그의 예술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친구에 대한 보답으로 그의 초상화를 그렸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즈보로프스키, 1918>에서 즈보로프스키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책이나 판화를 파는 화상의 이미지보다 시인의 모습으로 길게 늘인 얼굴을 가진 온화하면서 성실한 ’과장된 로맨티스트‘의 모습을 갖고 있다.

그러나 파리에서 인물의 특징을 주력하여 그린 그의 작품 경향은 남프랑스에서 생활하며 건장한 소년 농부, 야윈 하녀, 사랑스러운 어린 아이, 노인 등 무명의 인사를 그리며 달라졌다. 모딜리아니는 이들 무명의 초상화에서 감성에 호소하는 방식을 고집하지 않았고 오히려 감정의 개입을 매우 자제했다. 즉 그의 후기 작품들은 인물의 개인 생활을 짐작케 하는 요소들을 의식적으로 배제하여 인물의 보편성 혹은 익명성이라고 할 수 있는 객관성을 지향하고 대상을 양식화하는 측면을 보였다.

모딜리아니는 미술에 눈뜬 이래로 평생 동안 정신적이고 서정적인 측면에서 ‘오로지 인간’만을 그렸다. 몸이 약했던 모딜리아니는 병약한 육체와 예술적 재능 사이의 불균형으로 깊은 정신적 고통에 빠져, 1914년 무렵부터 술과 마약을 남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당시 그의 작품들은 안정감과 현실 생활의 불안정함을 함께 보였다. 이에 대해 어느 평론가는 “음주, 마약, 방랑 등이 모딜리아니의 예술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쳤다고 성급하게 결론 내릴 필요는 없다. 때로는 이러한 악덕이 오히려 한 예술가의 창조력에서 하나의 보상작용이 된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즉 모딜리아니는 방종하게 살았지만 그러한 고통들을 그의 작품에 필요한 창조력의 원천으로 삼았고 그 결과 엄청난 양의 작품을 남길 수 있었다.


모딜리아니는 그와 함께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던 잔 에뷔테른의 초상화를 그리며 완성된 형태의 작품 인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초상화에 신체를 길고 우아한 곡선 형태로 표현하여 모델의 개성과 심리 상태를 완전히 배제한 정형화된 인간의 이미지가 있고, 노랑, 빨강, 파랑과 같은 원색을, 혹은 원색을 혼합하여 얻은 보색으로 표현한 모습들이 보인다. 특히 초상화가들이 인물의 인간성과 심리적 특징을 보여주기 위해 신경 썼던 눈이 모딜리아니의 작품에서 ‘비대칭으로 놓인 아몬드 모양의 눈’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모딜리아니는 눈동자가 없이 눈을 그리거나, 한쪽 눈은 제대로 그리고 다른 쪽 눈은 색으로 처리하기도 했다.

심리학자들은 모딜리아니의 작품에 눈동자 없는 눈이 등장한 이유를 “모델에게 느낀 서먹함이 모딜리아니로 하여금 눈동자를 그리지 못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항상 모델과 교감을 중시했던 만큼, 작품에서 그들이 어디를 응시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눈동자 없는 눈, 혹은 초점 없는 눈동자는 외부세계뿐만 아니라 내부 세계도 인식하고 있으며, 구체적인 현실을 떠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이상의 세계를 꿈꾸고 있는 그림 속 주인공의 이상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초 모딜리아니처럼 사람을 주제로 초상화를 그린 경우는 드물었다. 그 무렵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소외 현상이 가속화되었고, 사진술의 발명이 있었으며, 형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자 하는 예술가의 욕구가 한층 커졌다. 미술에서 인간은 그저 하나의 ‘오브제’였을 뿐이었다. “야수파는 글자 그대로 ‘야수’ 같은 인간을 그렸고, 입체파는 인간을 발기발기 찢고 뒤틀어 ‘물건 덩어리”로 취급하였다. 당시에 모딜리아니처럼 ’한 사람의 개성을 살리고 그 개성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에 매달리는 화가는 별로 없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모딜리아니가 왜 사람만을 그린 초상화에 매달렸을까?”라며 인간의 존재감을 표현한 그의 작품 세계에 많은 의문들을 던졌다.


모딜리아니가 1907년에 사용한 스케치북에 “내가 추구하는 것은 현실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현실도 아니다. 나는 무의식, 즉 인간의 본능이라는 신비를 알고 싶다.”라고 적혀 있다. 이 말은 그 당시에 널리 퍼졌던 인간의 실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의 철학에 기초한 것이다. 베르그송은 그의 저서에서 합리주의적이고 결정론적 관점과 ‘생의 도약’이라는 생명론적이고 역동적 개념을 대립시켜, “인간은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에 기초하여 자신의 생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모딜리아니는 모델의 개성을 분석한 후 그 사람의 고유한 아름다움과 세련된 인간성을 세심하게 탐구하면서 인간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생명의 증거’를 찾는 일에 매달렸던 것이다.

모딜리아니는 미술사의 흐름을 바꾼 혁명적인 작가도 어떤 미술 운동을 이끈 지도적인 작가도 아니다. 단지 그는 20세기 초 전위작가들과 나란히 작업하면서 그들의 작업 세계에 휩쓸리지 않고 독자적인 자신의 세계를 고집스럽게 지킨 작가일 뿐이다. 모딜리아니의 초상화에 대해 어느 평론가는 “모딜리아니가 그린 초상화는 어느 것이나 모델과 꼭 닮았다. 이것은 물론 내가 알고 있는 현실의 인물들과 비교해서 말하는 것이다 ... 그는 결코 디테일이나 외면적인 어떤 것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의 그림은 언제나 인간의 본성을 열어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전 시 명 :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행복하고 슬픈 사랑展
전시기간 : 2007년 12월 27일 ∼ 2008년 3월 16일
전 시 장 : 경기도 고양 아람미술관
전시문의 : 031-960-0180
사 이 트 :http://www.2008modi.com/

공하린 객원기자
저작권자 2008-03-10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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