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하면 음악이나 발레 혹은 문학이 떠오른다. 톨스토이, 도스에프스키, 차이코프스키 등 누구나 아는 대가들을 낳은 문화대국이 바로 러시아이다. 그러나 그 대가들 틈에 미술가의 이름은 낯설기만 하다. 러시아에서 미술이 발전하지 않은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러시아 태생의 칸딘스키, 샤갈을 떠올리면 그 의문이 우문임이 확실하다. 광대한 국토만큼이나 예술의 폭과 깊이를 자랑하며 칸딘스키, 샤갈 등을 낳은 러시아. 러시아 미술은 과학과 예술이라는 테두리 안에 얼마나 근접해 있었을까.
러시아 회화사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으로 트레티야코프 미술관과 러시아 미술관이 있다. 러시아 혁명 이후 국가의 강력한 지도 아래 대가들의 작품은 국외로 반출되는 대신에 주요 미술관에 전시되었다. 그 중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전적으로 러시아 미술품을 수집하는 과정들을 통해 현재 11세기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13만점 이상의 예술 작품을 소장한 거대한 미술관으로 자리 잡았다. 미술관의 국유화 이후 오늘날까지 두 미술관은 러시아 미술의 가장 중요한 중심축이자 러시아 회화의 보고로서 그 위상을 자랑하고 있다.
19세기 말 모스크바의 부유한 상인층을 중심으로 러시아의 예술 세계를 지배했던 국제적인 신고전주의를 거부하고 민족 예술 유산을 재발견하는 활동들이 일어났다. 그 중심에 있던 이동파(혹은 순회파)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경제적으로 후진국이지만 정신적으로 그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해 성립된 미술 유파였다. 이동파는 삶의 진실 추구라는 측면에서 러시아 미술의 전통을 극대화하는데 힘썼고, 그러한 활동들은 러시아 미술만의 독특한 색을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동파을 적극적으로 후원에 사람으로 수집가이자 모스크바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P.M. 트레티야코프(1832-1898)가 있다. 1890년대 말까지 러시아에서 상인들의 위치는 모스크바의 귀족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서러운 위치였다. 상인들은 공공 봉사와 자선 사업, 예술 후원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방법을 통해 천대받는 계층에서 문화적 엘리트 계층으로 변화를 시도했다. 러시아의 상인 가문에서 태어난 트레티야코프도 젊은 시절부터 사회에서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하는 방법으로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들 수집을 선택했고, 1870년대 말부터 거의 30여 년 동안 러시아의 미술품들을 지속적으로 사들여 2,000여점에 이르는 작품을 수집했다. 혁명이후 미술관의 국유화 과정에서 트레티야코프가 수집한 작품들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설립의 초석이 되었다.
러시아 미술가들 중 러시아적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가이자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다작이 전시되고 있는 작가에 일랴 레핀(1844-1930)이 있다. 레핀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아카데미에서 정식 미술 교육을 받은 후 미술아카데미의 후원으로 이탈리아를 거쳐 인상파가 유행하던 파리에서 공부했다. 파리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레핀은 주제가 지나치게 가볍다는 생각에서 인상파에 깊이 빠져들지 않았지만, 1876년 러시아로 돌아온 후 혁명 전야의 인민의 실상을 인상파의 특성인 빛, 색, 외광의 눈부심 등의 방법으로 표현했다. 그의 작품들 중 톨스토이, 무소르그스키, 트레티야코프 등의 초상화는 밝고 사실적으로 표현한 측면에서 인상파적 특징을 보여준다.
레핀은 역사의식과 현실의식에 기초한 많은 작품들을 통해 인간 내면의 본질에 대해 탐구했다. 그는 19세기 러시아의 현실과 시대정신들을 담은 작품들을 그렸는데 그의 작품 중 <아무도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가 유명하다. 이 작품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한 남자의 귀환을 그린 것으로 농노제도의 폐지 이후 피폐해진 러시아 농민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속 남자 주인공은 브나로드 운동(인민 속으로)을 외쳤다는 죄목으로 유배당한 후 어느 날 초췌해진 모습으로 집안에 들어서고 있다. 가족들은 자신의 아버지이자 남편인 그를 다정하게 맞이하기보다 두려움과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다.
<아무도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는 직접적으로 사회 상황을 반영하면서 간접적으로 인간의 심리를 세세하게 묘사한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작품은 실물 크기로 그린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로 수많은 습작과 드로잉 과정을 통해 거쳐 그린 만큼 사실적이고 사진보다 더 정확하게 개인의 심리를 묘사했다. 레핀은 이 그림에 잘 드러나 있는 것처럼 러시아의 사회악을 비판하여 제도권의 반감을 샀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동안 러시아 사회에 대해 관심 갖고 이해하려고 노력한 예술가였다. 레핀은 이러한 면에서 러시아 사실주의 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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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실주의적 접근과 다르게 러시아 태생의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는 20세기 추상미술의 시조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공부하는 중 1889년 ‘자연, 과학, 인류학, 인종학 협회’의 후원으로 북부의 볼로그다 지방으로 조사 여행을 떠났다. 그 여행길에서 그는 민속 미술에 강한 인상을 받았고, 이후 미술에 대한 열정을 채우기 위해 뮌헨에서 본격적인 작가 수업을 받았다.
칸딘스키는 초기에 러시아 민중 서사시와 러시아 중세 미술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모티브로 작품들을 그렸으나, 작품 속 실제 대상의 형상들을 머리 속에 기억할 뿐 실제 대상을 그대로 묘사하지 않았다. 칸딘스키는 일찍이 ‘하나의 감각이 자극을 받으면 다른 감각이 반응한다는 것’을 알았다. 예를 들어 하나의 장면이나 색채를 보면서 어떤 소리를 듣고, 음악을 들으면서 하나의 색채나 장면을 보는 것이다. 이처럼 공감각에 대한 천부적 재능을 타고 났던 칸딘스키는 형상들을 그대로 그리기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과 함께 어우러진 상징물로 그렸다.
칸딘스키는 1920년에서 30년대 사이에 러시아를 떠나 바우하우스에서 새 둥지를 틀었다. 바우하우스는 창시자인 발터 그로피우스의 이상을 토대로 산업디자인과 건축 분야에서 모든 창조 예술의 통합과 예술가들의 장인정신을 철저하게 훈련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칸딘스키는 일찍부터 바우하우스를 설립한 그로피우스와 교분이 있었고, 바우하우스의 교육이념과 목표를 잘 알고 있었던 까닭에 1922년 초 바우하우스에 합류했다.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의 설립 목적인 모든 개별적인 매체와 장르를 통합하고 초월해 일종의 종합을 시도하는 ‘총체예술론’을 공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칸딘스키는 모든 분야의 통합을 시도하는 지칠 줄 모르는 이론가이자 예술가로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로피우스가 칸딘스키를 바우하우스에 초빙한 이유에 대중적이지 않지만 생존 작가들 중 가장 유명한 추상화가라는 점, 비구상미술의 창시자라는 점, 1911년에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라는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이론서를 집필한 점 등이 있다. 이외에 “칸딘스키는 미술의 기본 문제를 분석하면서 물리학부터 법학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영역의 지식을 동원하여 사고한다.”는 점이 있다. 다양한 분야의 통합을 시도하던 칸딘스키는 자신이 모스크바 미술 문화 연구소에서 연구했던 교과 과정과 교수법, 즉 형태심리학 분과를 위한 교과 과정 초안을 바우하우스에서 진행되는 미술 수업의 토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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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딘스키는 회화의 근본 문제에 관한 글들을 발표하며 자신의 예술적 사고를 체계화시켜 나갔다. 그 당시 러시아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목적으로 예술의 기능과 목적에 강력한 제약을 가하고 있는 상황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에서 오직 ‘정신주의적 기형’만을 보았던 동료 예술가들의 적개심” 때문에 칸딘스키의 작품은 러시아에서 전시되지 않았다. 대신에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에서 모스크바 미술 문화 연구소에서 가져온 것들을 일부분 사용했지만, 새롭게 부상한 형태심리학 분야의 연구 결과를 포함시켜 현대 미술의 추상화 작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체계화시켜 <점, 선, 면>(1926년)이라는 글을 저술했다.
칸딘스키는 자신의 이론서에 기초하여 학생들을 지적으로 통제하면서 미술의 다양한 가능성에 눈뜨도록 가르쳤다. <점, 선, 면>에 따르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미술을 4가지 요소인 점, 선, 면, 체로 보았다면, 칸딘스키는 점, 선, 면 3가지 요소로 미술을 보았다. 그는 ‘분석드로잉과 색채와 형태의 이론적 고찰’이라는 제목으로 구성된 수업 시간에 점, 선, 면과 같은 개별적 요소들을 분석하면서 서로 간의 관계를 검토했다. 이는 형태심리학에서 곡선과 비스듬한 선의 대비적 성질을 일으키는 힘의 효과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와 관계가 깊었다.
또한 칸딘스키는 자신의 공감각 경험과 지식을 종합하여 체계화한 자신의 색채이론에 기초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칸딘스키는 괴테에서 시작하여 뉴턴, 마티스, 들로네를 거쳐 인지학자인 루돌프 슈타이너의 색채이론을 섭렵하였고, 그 결과에 자신의 공감각적 경험과 지식을 덧붙여 종합화를 시도했다. 또한 색채의 모든 요소가 음향이나 물리학과 관계, 상징 의미 등을 포괄하고 있어서 색채의 본질이 언어보다 감정의 느낌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이론에 기초하여 색채 수업 시간에 색채와 형태의 혼합 속에서 다이나믹한 음악적 특성을 감지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바우하우스 시절의 칸딘스키의 작품에 다양한 기하학적 요소가 전면에 등장한 작품으로 1923년작 <구성Ⅷ>이 있다. 이 작품에 원, 반원, 각, 직선과 같은 몇몇 기하학적 요소들이 있는데, 화면을 지배하는 가장 큰 원이 그림 왼쪽 상단에 있고 또 다른 색색의 원들이 그 주변에 있다. 또한 바둑판무늬의 격자 패턴들이 원과 반원의 자유로운 비행을 가로지르지만, 원 형태를 제지하거나 그들과 대결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칸딘스키는 그림에 음악적 요소들을 도입하여 표현하였다. <구성Ⅷ>의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는 그림의 제목으로 구성, 즉흥, 음향과 같이 음악적 용어를 사용했다. 또한 그의 그림에 마치 음악에서 각각의 음악적 요소들이 어우러져 듣는 이의 영혼을 감동시키듯이 그 물감의 조화와 대비를 원칙으로 삼았다. 이는 그림 안에서 음과 색이 조화를 이루며, 그것들이 다시 정신과 조응한다는 그의 생각을 말해준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칸딘스키는 구체적 형태의 재현에서 이탈하여, 점, 선, 면에 기초한 서로 간의 어울림을 통해 선명한 색채을 이용하여 교향악적이고 다이내믹한 추상 표현을 시도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절대불변의 법칙에 의해 사실로 간주되었던 것들이 새로운 원리에 의해 흔들리게 되는 것들을 바라본 칸딘스키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 속에서 칸딘스키는 자기만의 새로운 양식을 개발했는데, 그는 자기가 새로운 양식을 개발하게 된 요인을 “추상적인 선과 형상과 색채들의 배열 ... 한 과학적 사건이 나의 길에서 장애물을 제거해 주었다. 그것은 원자의 분열이었다. 나의 영혼에 원자의 부서짐이 마치 전 세계의 부서짐과 같았다.”라고 말했다. 또한 칸딘스키는 “우리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리 자신 스스로 발견하는 진리 이외에 어떠한 진리도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칸딘스키는 다양한 분야의 학문들을 두루 섭렵하고 경험하면서, 색채와 형태를 물리적 지각의 차원보다 인간의 영혼을 움직이고 감동시키는 관점에서 고찰한 것이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고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展은 러시아 미술의 보고로 꼽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러시아 미술관과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 19세기 말 러시아 미술계 내부에서 시작된 혁신의 산물인 사실주의 회화부터 유럽 미술계에 큰 충격을 주었던 20세기 초 아방가르드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들이 선보이고 있다.
눈에 띄는 작가의 작품으로 20세기 추상미술의 시조인 칸딘스키를 필두로 카지미르 말레비치, 레핀, 레비탄 등 러시아 근현대미술을 자랑하는 대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러시아 미술사를 훑는 91점의 끄트머리에 네 점의 칸딘스키의 작품이 있지만, 관람객들은 총체예술의 산물로서 표현된 칸딘스키의 작품, 즉 선명한 색채를 이용한 교향악적이고 다이내믹한 추상 표현을 시도한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전 시 명: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展
전시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전시기간: 2007년 11월 27일 - 2008년 2월 27일
문 의 처: 02-525-3321
사 이 트: http://www.2007kandinsky.com
- 공하린 객원기자
- 저작권자 2008-02-19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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