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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얼마 전 연구협력관계로 러시아 출장을 다녀온 바 있다. 예술의 전통을 가진 모스크바에 머물던 날, 작은 극장에서 발레 공연을 보았다. 공연은 '백조의 호수' 같은 여러 유명한 작품의 하이라이트만 모아 보여주는 옴니버스 스타일이어서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었다.
그 중 한 무대가 라벨의 '볼레로(Bolero)' 공연이었다. 처음에는 주인공인 듯싶은 무용수가 혼자 나와 현대 무용 같은 간단한 동작을 리듬에 맞춰 반복하더니 계속해서 무용수가 늘어나면서 비슷한 다른 춤사위로 진화하고 모두가 함께 춤을 추며 피날레를 장식하였던 것을 인상 깊게 기억한다.
원래 볼레로란 1780년경 당시의 유명한 무용가 돈 세바스챤 세레소가 고안한 것으로서, 악센트가 강한 3박자를 사용하여 현악기와 캐스터네츠의 반주로 한 쌍의 남녀가 정열적으로 추는 스페인 무곡(舞曲)을 총칭하는 말이다.
가장 유명한 볼레로의 작곡자인 모리스 라벨(Maurice Joseph Ravel, 1875~1937)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작곡가로 스페인 국경에 가까운 시부르에서 태어나 '세헤라자데',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 등 주옥 같은 작품을 우리에게 남겼다.
라벨의 볼레로는 스페인 풍의 느린 무곡으로 초연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당시 파리의 뮤직홀에서 유행하던 스페인-아라비아풍 무곡 중의 두 마디를 주제로 사용하여 두 도막 형식으로 악기 수를 늘리고 편성을 바꾸면서 무려 169번이나 반복되며 연주된다. 리듬과 멜로디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고 종장으로 갈수록 점점 세져가다가 끝 두 마디에 이르러서야 E장조로 조바꿈이 일어나 클라이맥스로 끝난다. 화성을 사용하지 않음에도 절묘한 관현악법으로 지루함을 느낄 수 없는 명곡이다.
자연과학은 어떤 현상에 대한 논리적 증거를 찾기 위해 실험을 통하여 지식을 적립한다. 무엇인가 새로운 형식이나 방법을 시도하면 우리는 실험적이라고 말한다. 즉, 실험이란 아무도 해보지 않은 것을 처음으로 하는 행위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실험은 당연히 성공보다 실패가 많은 속성을 가지며, 많은 반복적 실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과학적 증명도 일반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에 비하면 성공률이 낮거나 오랜 시간을 요하는 것이 정상이라 할 것이다.
생명과학은 자연과학 중에서 가장 복합적인 학문이다. 생명체에서 하나의 자극에 하나의 반응으로 끝나는 일은 없다. 호수에 돌을 던지면 한 번의 물보라로 끝나지 않고 주위에 파문을 그리며 퍼져 나가는 것과 같다.
기존의 생명과학은 처음 물보라에만 주로 관심이 있었다. 예를 들어, 당뇨병을 연구하여 보니 인슐린 대사의 문제가 한 원인인 것을 밝혀냈다. 그래서 부족한 인슐린을 만들어 환자에게 투여함으로써 많은 환자들을 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왜 어떤 사람들은 더 인슐린이 부족해도 정상 생활을 유지하는지, 어떤 사람들이 합병증에 잘 걸리는지, 어떤 사람들은 말기신부전으로 되어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아직 많은 부분을 알지 못하고 있다. 물보라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전체를 이해하기엔 역부족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요즘, 하나의 자극에 대한 물보라와 함께 파문까지의 전체적인 반응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려는 노력이 생명과학계에 나타나고 있다. 인간을 포함하여 180종이 넘는 생명체의 게놈이 밝혀졌고, 게놈에서 만들어지는 전체 단백질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도구가 개발됨으로써 기본적인 인프라가 마련되었다.
얼마 전부터 프로테오믹스라는 개념 및 방법으로 전체 단백질의 변화를 살피면서 새로운 표적을 찾으려는 시도가 시작되었고, 이제는 시스템생물학으로 발전하여 생명체에서 일어나는 유전자, 단백질 등 여러 수준에서의 역동적 변화를 체계적으로 연관 지어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다.
향후에는 다양한 생명현상을 관련 지어가면서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전체를 보면서 질병을 고치려 하는 동양 의학과 비슷하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필자가 봉직하고 있는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에서도 생명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물보라와 함께 파문도 놓치지 않는 원천기반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수없는 반복실험을 시도하면서 생명과학의 다양한 분야를 지원하고 있다.
한 사람이 복잡한 미로에 들어가서 보물을 찾으려고 한다. 그 곳에는 각종 장애물과 가짜 보물들이 있다. 그는 조심스레 걷기 시작하고 곧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다. 그 곳에 표시를 하고 다른 길로 가지만 이번에는 무너진 통나무가 길을 막아 갈 수가 없다. 다시 표시를 하고 다른 길을 찾아 나설 때 갈 수 없는 길로는 가지 않는다.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성공의 어머니인 것이다. 볼레로인 것이다. 수없이 많은 변화와 반복을 통해서 진화하고 마침내 클라이맥스라는 찬란한 보물을 맞이하게 되는 볼레로는 과학과 닮았다. 그래서 필자는 볼레로를 좋아한다.
- 강신원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원장
- 저작권자 2007-05-08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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