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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을 함께 보여주는 기계가 있다면 어떨까. 그런데 그런 기계가 실제로 국내에 있다. 이 기계장치의 오른쪽에서는 하루에 열두 번, 현재를 흐르고 있는 시간의 이름표가 나타난다.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왼쪽에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주의 천체들이 운행하는 모습을 모사한 모형이 서서히 돌아간다. 2차원의 지표면을 딛고 서서 3차원 우주공간의 운동을 관찰할 수 있다니!
전 세계 주요한 과학기술사 박물관에 전시하자며 중국 과학사학자 조셉 니덤을 흥분하게 만들었던 이 장치를 여러분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얼마든지 만나볼 수 있다. 이름하여 ‘혼천시계’, 조선 현종 10년 (1669)에 천문학 교수 송이영이 제작한 것이다.
혼천시계의 첫인상은 어떠한가?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심오해 보이는 천문기구와 크고 투박한 목재 가구’ 정도로 보인다. 그러나 그 수수한 목재 상자 안에 심상치 않은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 또한 장치 중간에 속이 들여다보이는 부분에서 쇠사슬에 매달려 있는 거대한 추를 발견했기를 바란다.
이것이 바로 혼천시계의 심장, 즉 이 시계의 동력원이며 자동시계의 동력원으로서 물의 위치에너지를 이용했던 자격루의 패러다임을 뛰어넘은 것이다. 좌 혼천의, 우 자명종시계를 거느린 모습으로 발전하기까지 조상들의 지적 열망과 고민을 담아 성장해온 혼천시계의 역사 이야기를 들어보자.
혼천의의 역사
혼천시계에서 외형적으로는 가장 눈에 띄는 장치인 혼천의. 한가운데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둥근 구와 이것을 에워싸고 있는 고리들은 마치 실제 우주 속의 어느 천체가 눈앞에서 회전하고 있는 듯한 신비감을 자아낸다. 제작자의 의도를 밝히자면, 가운데 둥근 구는 지구의 모형이며, 여섯 개의 고리들은 태양과 달과 별이 운행하는 괘도와 이것을 관찰·분석하는 데 필요한 천구상의 기준선들이다. 이것은 원래의 혼천의의 용도와는 조금 다른 것인데, 원래의 혼천의에는 사실 지구가 있는 자리에 천체관측용의 망통이 달려 있었다.
처음 중국에서 기원전 2세기경 제작된 이래 발전을 거듭해온 혼천의가 언제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기록상으로 첫 제작시기인 세종 때의 혼천의는 천문 현상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시뮬레이터이자 천체 관측 기구로서 제작되었다. 이것은 혼천의의 구조를 살펴보면 곧 알 수 있다.
혼천의 바깥쪽에 고정되어 있는 세 고리는 ‘육합의’인데 각각 ‘지평면’, ‘자오선’, ‘적도선’을 가리킨다. 이 선들의 안쪽에 있는 세 고리는 ‘삼진의’로 천구상에서 별의 운행방향인 ‘적도’와 태양이 지나가는 길인 ‘황도’, 달이 지나가는 길인 ‘백도’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안쪽에 있는 고리는 ‘사유의’이며, 천체를 관측할 때 들여다보는 망통(望筒)을 포함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구조를 통해 혼천의는 하늘의 형상을 실제적으로 재현해 낼 수 있었다.
천구상의 모든 천체들이 천구 북극과 남극을 축으로 회전한다는 것, 그리고 태양은 황도를, 달은 백도를, 별은 적도와 평행하게 회전 운행하는 실제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조가 관측에는 불편함을 가져와 관측기능은 점차 사라지고 시뮬레이터에서만 인식되면서 마침내 동력장치로 움직이는 수준까지 발전하게 된다.
관측기능에는 어떤 문제가 발생했던 것일까? 심플한 모양의 망원경이 대중적인 천체관측기구가 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선조들이 사용했던 이 화려한 관측기구의 사용법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애초에 두 기구는 사용하는 목적이 다르다. 망원경이 머나먼 곳에 위치하는 천체를 확대하여 보기 위한 기구라면, 혼천의는 천체의 위치를 파악하고 운동과 변화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혼천의를 이용한 관측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사유의에 달린 망통으로 천체를 가리킨다, 그리고 좌표계 역할을 하는 고리들에 새겨진 눈금으로 관측하려는 천체의 천구상 위치를 읽는다. 그런데 적도좌표계와 황도좌표계, 지평좌표계가 모두 하나의 중심으로 모여 겹쳐 있는 혼천의의 구조가 관측하기에는 매우 불편했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멀리 아랍에서부터 왔다.
12세기 아랍의 하비르 이븐 아플라가 만든 토르퀘툼은 좌표계들을 분리해 놓아서 보다 편리하게 관측할 수 있었고,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중국의 곽수경 적도좌표계와 지평좌표계를 분리하여 ‘간의’를 만들었다. 곽수경의 ‘간의’로부터 세종 때의 학자들 역시 ‘간의’를 만들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혼천의와 간의는 시뮬레이터와 관측기구로서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시계의 역사
혼천시계의 시계장치는 나무 상자 속에 숨어 있어서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길이 120cm, 높이 98cm, 폭 52.3cm 크기의 나무상자 속에 시계가 들어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는 것은 상자 밖으로 시간을 알리는 시패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기 때문이다. 상자를 열어 볼 수는 없지만 사진을 바탕으로 제도한 도면을 살펴보자.
보기만 해도 복잡한 심경이 되어버릴 정도로 섬세한 설계다. 그렇다면 시선을 혼천시계의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추로 돌려보자. 여기가 이 시계의 동력원, 이 시계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 시계는 자연물을 이용한 시계에서 기계시계로 넘어가는 조선 최초의 시계이기도 하다.
인간이 처음 시계를 만들었을 때는 시침도, 분침도 없었다. 자연물의 변화가 곧 시간의 흐름이었다. 기록상으로 인류의 첫 시계는 해시계다. 해는 언제나 규칙적으로 운동한다. 이것을 발견한 옛 사람들이 물체를 적당히 고정시켜놓기만 한다면 물체의 그림자도 규칙적인 모양으로 나타날 것임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면 그 다음 필요한 것은 길고 뾰족한 그림자를 만들어줄 길고 뾰족한 물체와 그림자의 위치를 새겨 넣을 판이다. 여기서 더 발전하면 계절에 따라 위치에 따라 그림자의 길이가 달라진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기원전 16~15세기 바빌로니아인들은 벌써 해시계를 만들어 쓰고 있었고 이것이 점차로 동서로 퍼져 나갔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인류는 꽤 최근까지도 해시계를 썼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해시계를 쓰기 시작했는지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맑은 날씨가 오래도록 계속되는 자연 조건 덕에 기록보다 일찍 해시계를 쓰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6-7세기 무렵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원반 모양의 해시계 일부에 해당하는 유물이 가장 이른 해시계의 흔적이다. 조선, 특히 세종 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앙부일구,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 일성정시의와 같은 정밀한 해시계에 대한 기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 후기가 되면 휴대용 앙부일구까지 나올 정도다.
고대 물시계의 이용은 해시계보다 몇 세기 늦었다. 물통에 좁은 구멍을 뚫어 물이 흘러나오도록 한 장치에서 물통 속의 일정량의 물이 흘러나와 물의 양이 늘어나는 것을 측정하거나 물통 속 일정량의 물이 흘러나가 줄어드는 것을 측정하는 것이었다. 물시계는 밤에도 시간을 측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해시계와 비교하여 밤시계라고 불리기도 했다.
또한 해시계의 부정확성을 보완하기 위해 낮에도 이용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물시계는 역시 세종 때 가장 활발하게 연구되었는데 세종 16년(1434)에 이르면 조선 왕조의 새로운 국가 표준 시계로서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13세기가 되면 유럽에서는 해나 물과 같은 자연물을 이용한 시계의 시대가 저물고 기계시계의 시대가 온다. 자연물 대신 등장한 것은 무거운 추가 하강하면서 내어 놓는 위치에너지였다. 이것을 동력으로 하여 시계의 여러 톱니바퀴들을 회전시킨다는 추동식 기계시계의 아이디어였다.
드디어 1583년 갈릴레이가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한 후, 1657년 호이겐스가 이것을 이용하여 기계시계의 시간간격의 정확성을 높여주는 탈진장치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만든 시계는 하루에 오차가 20초 이내로 현저하게 줄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추동식 시계는 마침내 조선 땅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혼천의와 추동식 시계가 만나다!
동아시아 전통의 혼천의와 유럽 전통의 추동식 자명종 시계는 조선에 건너와 우리 천문학의 맥락 속에 귀중한 양분으로 소화되고 저장되었다. 이제 바야흐로 17세기, 건국 초에 다졌던 제도와 왕권이 흔들거리기 시작하고, 때마침 기존의 천문학과 전혀 다른 패러다임의 서양천문학이 새로운 사실들을 안고 밀려 들어오자 현종 10년 (1669년) 왕은 중요한 결심을 한다. 제왕으로서 천명을 부여해준 하늘의 의지, 즉 천문을 완벽하게 읽어내고 정확한 시간을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일은 왕의 권한이자 의무였다. 그러니, 전통 천문학을 재정비하라!
이민철과 송이영에게 혼천 시계를 제작하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먼저 만들어진 이민철의 혼천시계는 수격식 혼천시계였다. 세종 때의 혼천의와 자동물시계인 자격루를 결합하여 전통을 훌륭하게 계승한 것이다. 나아가 세종 때 없었던 시보장치가 추가되고, 하늘의 형상을 재현하는 혼천의를 결합시켰으며, 혼천의 중앙의 사유의와 망통 대신 지구의를 설치했다.
이민철의 뒤를 이은 송이영의 혼천시계는 전통을 이어나가되 신기술을 접목시켜 한 단계 도약한 모습이었다. 이민철식으로 개량한 혼천의에 자명종 시계장치를 결합하여 작동시키는 혼천시계를 제작한 것이다. 송이영의 혼천시계를 움직이는 것은 시계 가운데 설치된 추 2개의 운동이다.
상상해 보자. 첫 번째 추가 중력을 받아 내려온다. 추에 연결된 사슬은 톱니바퀴를 돌리고 그 바람에 수평축이 돌면서 왼쪽으로는 혼천의를 돌리는 톱니바퀴를 오른쪽으로는 시계장치를 회전시키는 톱니바퀴를 돌리며 타종장치를 작동시킨다. 혼천의 속의 지구는 정지해 있다.
하지만 황도와 백도와 적도는 하루 한 바퀴를 돌아 일주운동을 하고 태양과 달은 황도와 백도 위를 하루 1도씩 이동하여 연주운동을 한다. 시계장치는 하루 열두 번 자·축·인·묘·진·사·오·미의 시패를 꺼내들어 시간을 알린다. 그리고 쇠공을 굴려 타종장치를 작동시킨다. 이윽고 다른 추 하나가 내려오면서 타종장치의 톱니바퀴들을 회전시킨다. 걸림막대가 풀리고 타종 망치가 내려와 종을 친다. 톱니바퀴의 모양에 따라 종 치는 횟수도 다르다. 멋지지 않은가!
복원된 혼천시계
세월이 흐르고 나라를 빼앗긴 채 살아야 했던 1930년대 초, 우리 궁 안에 있어야 할 혼천 시계는 리어카에 실려 인사동 골동품 거리를 전전하고 있었다. 기와집 한 채 가격이었던 그것을 인촌 김성수 선생이 선뜻 구입하여 보관하다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1960년대에는 조셉 니덤의 책에 찬사를 받으며 그 이름이 오르내리고, 1960년대 말 미국 스미소니언 기술사 박물관으로부터 특별 전시제의를 받으며 정밀 실측 및 복제품 제작을 요청받았었던 국보 제230호 혼천시계. 그 복원품이 최근 2005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복원품은 서울과학전시관 로비에 전시되어 있다고 하니 역시 관심 있는 분들은 언제든지 만나볼 수 있다. 하루에 5분의 오차밖에 나지 않는 수준까지 복원을 해두었다는데 웬일인지 지금은 작동되지 않고 로비 구석으로 밀려나 있다고 한다. ‘좌 혼천의 우 자명종 시계’가 함께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안타깝다. 3차원 공간 상의 움직임에 시간의 흐름까지 보여준다는 혼천시계는 어쩌면 4차원의 느낌이 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 참고도서 >
1. [우리 역사 과학 기행]. 문중양. 동아시아
2. [한국 과학사] 전상운. 사이언스북스
3. [전통 속의 첨단 공학기술]. 남문현, 손욱. 김영사
- 꿈꾸는 과학 오혜영 saintmio7@hanmail.net
- 저작권자 2007-01-18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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