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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韓紙)는 재료부터 다르다 1년생 닥나무, 펜토산이 가장 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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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5월 첫발을 내디딘 '꿈꾸는 과학'은 과학의 대중적 글쓰기와 일러스트레이션을 함께 고민하고 생각하는 글쓰기 공동체입니다. 꿈꾸는 과학은 모두가 즐거운 과학을 이야기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꿈꾸는 과학은 다양한 과학책들을 읽고 토론함으로써 비판적 사고와 과학적 상상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또한 꾸준히 과학 글쓰기를 연습함으로써 자신만의 글쓰기 스타일을 구축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퍼져나가는 꿈꾸는 과학의 소망이 다양한 계층의 독자들에게 과학의 즐거움을 전하고 이러한 즐거움들이 모여 건전한 과학문화를 만들어 나아가길 희망합니다!

[편집자 註]


한지는 일반 종이와 그 재료에서부터 차이가 많이 난다.


보통 종이가 펄프(Pulp, 여러 목재나 그 밖의 섬유 식물에서 얻는 셀룰로오스 섬유의 집합체)로 만들어지는 것에 비해 한지는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닥나무로 만들어진다. 한지를 만들 때 사용되는 닥나무는 1년생 닥나무를 11월~12월경에 베어내 사용한다. 굳이 1년생 닥나무를 사용하는 이유는 그때가 섬유가 여리고 부드러워 종이를 뜨기 좋기 때문이다. 또한 껍질에 수분도 적당하여 벗기기도 수월하다. 닥나무를 제때 베어 쓰지 않으면 섬유가 강해지고 잡티가 많아져서 종이 제작과정에 어려움이 발생해 양질의 종이를 만들어 낼 수가 없다.


또한 좋은 한지를 만드는 데는 닥나무의 식물 섬유를 구성하는 성분 간에 비율이 매우 중요하다. 닥나무 섬유를 구성하는 주성분은 리그닌(Lignin), 펜토산(Pentosan), 홀로셀룰로오스(holocellulose)이다. 홀로셀룰로오스는 종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반적인 섬유이다. 펜토산은 그 양이 많을수록 종이 섬유가 약해지고 조직이 견고하지 못하며 방충성과 약품 저항성이 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그 양이 적을수록 좋다. 그리고 종이를 만드는 데 특히 중요한 것은 바로 리그닌이다. 리그닌은 식물체의 조직을 지지하는 성분이기 때문에 종이에 리그닌이 많아지면 섬유가 딱딱해지면서 방충효과가 우수해진다. 그러나 너무 많으면 종이가 뻣뻣해지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종이를 만들 때에는 적정한 양의 리그닌을 조절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11월~12월에 베어낸 1년생 닥나무는 바로 이런 조건을 모두 충족한다. 펜토산이 가장 적고 리그닌과 홀로셀룰로오스의 비율이 가장 이상적으로 함유되어 있을 시기이다. 병충해에 강하면서도 종이에 필요한 적당한 부드러움과 강도를 유지하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셈이다.


중성지, pH 7.89의 미학


보통 종이는 산성 조건에서 제작되기 때문에 완성된 종이도 pH4.5~5의 산성을 띠게 된다. 따라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종이 자체에서 산가수분해가 일어나 종이가 변질된다(셀룰로오스는 알칼리에는 강하지만 산성에는 약하다). 이런 종이들은 자체적인 변질에 의해서 100년 이상 보존되기 힘들다. 도서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누렇게 변질된 책들 역시 산성을 띈 종이의 운명을 밟아가고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한지의 제작과정은 알칼리성 상태에서 시작된다. 보통 종이는 식물섬유를 뽑아내기 위해 절구공이 같은 것으로 빻는 등 물리적인 방법으로 펄프를 분해하는데 비해, 한지는 닥나무를 잿물에 넣어 삶아 식물섬유를 뽑아내기 때문이다. 잿물은 식물을 태워 만든 재를 물에 풀어 걸러낸 것을 말한다. 주성분은 K2CO3로 pH9~10 정도의 알칼리성을 가지며 미끈미끈해 비누와 같은 세정 효과가 있다. 따라서 잘 손질된 닥나무 껍질을 잿물과 함께 삶으면 껍질 속의 불순물은 물에 녹아 없어지고 순수한 식물섬유를 얻을 수 있다. 알칼리는 단백질은 잘 녹이는 데 반해 식물섬유에는 거의 손상을 입히지 않아 온전한 식물섬유만을 뽑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원료(‘닥죽’이라고 부른다)를 얇게 떠내기 위해 물에 풀어 띄우는 과정에서 ‘닥풀’이라는 식물에서 추출한 끈적끈적한 점성의 액체를 사용한다. 닥풀(황촉규 : Hibiscue mamihot.L)은 아욱과에 속하는 1년생 초본식물로 닥나무와 함께 한지 제조에 가장 중요한 재료 중에 하나이다. 닥풀에서 추출한 액체는 그대로 풀과 같이 끈적끈적한 점성을 가지고 있어 일종의 분산제로 사용된다. 물속에 풀어 놓은 식물섬유가 균등히 분산되게 도와주고, 종이를 뜰 때 물이 빠지는 속도를 조절하여 지질이 고르게 되도록 만들어준다.


그런데 닥풀의 주성분은 당류(saccharide)로 안정적인 중성을 띤다. 알칼리성에서 섬유를 손상 없이 뽑아낸 후, 최종적으로 닥풀에 담가 만들어낸 한지의 pH는 7.89가 된다. 이렇게 세계에서 가장 강한 중성지가 탄생하는 것이다. 중성을 띄는 한지는 화학적으로 매우 안정되어 오랜 시간 동안 변질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다. 사람은 어느 한쪽으로 크게 치우치지 않고 중도(中道)를 걸어야만 올바른 판단과 행동을 할 수 있다고 한다. 한지도 이 사실을 알았던 것일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중성의 길을 걸으며 오랜 세월을 버티는 강인한 생명력을 갖춘 한지는 가히 중성의 미학이라 부를 만하다.


전통한지의 맥을 이어야


우리 선조에게 한지는 단순히 책과 그림을 만드는 종이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한지로 만든 항아리나 물병을 본 적이 있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밥상이나 옷, 지갑, 반짇고리 등등 수많은 생활 용품들을 우리 선조들은 한지를 이용해 만들어 사용했다. 이런 한지를 이용해 다양한 공예품을 만드는 한지공예는 우리나라 특유의 전통이다. 어느 나라보다 질 좋은 종이를 만들 수 있었던 우리나라만이 가질 수 있었던 전통인 셈이다.


하지만 한지공예라는 훌륭한 전통까지 만들어낸 질 좋은 전통 한지가 현대에는 그 맥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성 때문이다. 현대 한지 역시 제작방법에서 개량된 도구나 약품을 사용해 ‘경제성’을 확보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한지 특유의 ‘보존성’이 위태로워졌다.


기계화된 장비는 물리적인 방식으로 섬유를 자르기 때문에 닥나무 섬유 특유의 질김을 약하게 한다. 또한 잿물이나 닥풀을 대신하기 위해 사용되는 화학약품은 중성지인 한지를 산성화시켜, 한지 최대의 장점마저 위협하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한지의 단가를 낮추기 위해 값싼 중국산, 타이산 닥나무와 펄프를 섞어 사용하다보니 이제는 한지를 한지라 말하기도 어려운 시점이다.

한지에 대한 소비층의 인식 역시 문제이다. 일반 대중들에게 한지란 창호지, 화선지 등으로 대변되는 질 나쁜 종이라는 인식이 대부분이다. 보통 어린 시절에도 한지는 단지 서예를 할 때나, 미술 시간에 꾸미기를 할 때 사용을 해보는 것이 전부이다.


단순히 과거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전통이 아닌 박제일 뿐이다. 때문에 분명 현대의 한지는 과거의 전통 한지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모습은 전통 한지를 어설프게 흉내를 낸 것이 아닌, 현대 제지공업과 접목하여 전통 한지의 장점을 충분히 살린 희망찬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인하면서도 수수했던 우리 선조의 생명력을 닮은 한지. 그 한지가 다시금 옛 명성을 되찾고 도약할 날을 기분 좋게 상상해 본다.


<참고자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한지 - 현암사

겨레과학인 우리공예 - 민속원

전통과학기술 조사연구(3) - 국립중앙과학관

꿈꾸는 과학 윤나오 blue-feather@hanmail.net
저작권자 2006-09-2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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