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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년을 버텨온 한지(韓紙)의 강인한 생명력 다라니경의 재질은 보통 종이가 아닌 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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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5월 첫발을 내디딘 '꿈꾸는 과학'은 과학의 대중적 글쓰기와 일러스트레이션을 함께 고민하고 생각하는 글쓰기 공동체입니다. 꿈꾸는 과학은 모두가 즐거운 과학을 이야기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꿈꾸는 과학은 다양한 과학책들을 읽고 토론함으로써 비판적 사고와 과학적 상상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또한 꾸준히 과학 글쓰기를 연습함으로써 자신만의 글쓰기 스타일을 구축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퍼져나가는 꿈꾸는 과학의 소망이 다양한 계층의 독자들에게 과학의 즐거움을 전하고 이러한 즐거움들이 모여 건전한 과학문화를 만들어 나아가길 희망합니다!

[편집자 註]


1966년 10월 14일 경주 불국사. 도굴꾼들에 의해 훼손된 탑을 해체하여 보수하던 중에 탑신의 2층에서 신라시대의 사리함이 발굴되었다. 유리병, 은제 합, 금상자 등등 역사적으로 값어치를 따지기 어려운 귀중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가 흔히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본으로 알고 있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하 다라니경) 또한 이 사리함과 함께 발견된 귀중한 유물들 중의 하나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다라니경을 설명할 때마다 ‘우리나라가 제작하고 보유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라는 수식어는 항상 따라다닌다. 또한 인쇄 상태와 경문의 서체는 우리나라가 누구보다 뛰어난 목판인쇄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연신 자랑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가려는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아찔함이 느껴져 다시 발길을 돌린다. 추정된 다라니경의 제작 연도는 8세기 초, 현재까지 대략 1200년 전, 세계 최고령의 목판인쇄물이니 그렇기도 하겠다만, 문제는 다라니경의 재질이 ‘종이’라는 데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1200년이면 웬만한 금속조각도 삭아버려 가루가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것도 서늘하고 건조한 곳에 고이고이 소중히 모셔 보관해온 것도 아니라, 돌덩어리 탑 안의 금속상자 속에서 1200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고스란히 버텨왔다는 말이 아닌가! 시간의 순리를 역행해 1200년을 버텨온 다라니경의 강인한 생명력의 비밀이 과연 무엇인지 뒷조사를 해볼 가치가 있을 법하다.


식물 섬유의 운명, 그리고 한지(韓紙, Korean paper)


‘그까짓 거 대충 종이가 1200년 정도는 버틸 수도 있는 것 아니냐’라고 반문할 사람도 있겠지만, 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나면 그런 말은 쏙 들어가 버린다. 종이는 그 재료와 제조방법에 따라 종류가 천차만별이지만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로 식물의 셀룰로오스 섬유(Cellulose fiber)를 이용해 만든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로 이런 식물 섬유를 물 속에 잘게 풀어 걸쭉하게 만든 후에 그것을 얇게 건져내어 말린 것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모든 것들을 우리는 모두 종이라고 부르고 있다.


쉽게 말하면 식물로부터 셀룰로오스 섬유를 뽑아내어 물에 풀어 놓은 후 건져 얇게 펴 말린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짐승의 가죽을 부드럽게 하여 만든 양피지(parchment)나 풀의 줄기에 압력을 가해 얇게 붙인 이집트의 파피루스(Papyrus)와 같은 것들은 모양과 용도가 같아도 종이라고 할 수 없다. 현대에는 여러 가지 합성 섬유를 재료로 종이와 같은 용도로 만들어 사용기도 한다. 하지만 종이의 정의는 어디까지나 '순수한 식물의 섬유를 원료로 한 것'이다.


세균, 곰팡이, 벌레, 습도 등등, 생명이 떠나버린 식물섬유를 위협하는 것들은 너무나도 많고 강력하여 아름드리 나무라도 자연 속에서 썩어 흙이 되어 버리는 데는 30년도 체 걸리지 않는다. 여러 가지 공정과 화학처리를 거쳐 순수한 셀룰로오스 섬유만을 뽑아내 말려 놓았다 해도 종이 역시 이런 ‘식물 섬유의 운명’을 벗어나지는 못 할 게 뻔하다.

이렇듯 종이는 천성적으로 약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예외가 있듯이 석가탑 속의 다라니경은 1200년의 세월을 버텨내었다. 그리고 다라니경이 가진 생명력의 비밀은 다라니경의 재질이 보통 종이가 아닌, 닥나무로 만든 우리나라 전통 한지(韓紙, Korean paper)였다는 것에 있다.


우리나라 전통의 종이를 ‘한지’라 부르고는 있지만, 그 의미와 범위를 정확히 구분하여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한지라는 단어에 대한 정확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고 사람마다 의견도 분분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지라는 단어는 1950년 이후부터 쓰였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는 신생어에 속한다.

그 전에는 단지 종이, 조히, 창호지, 닥종이 등으로 불렸을 뿐이다. 한지는 서양문물이 유입되어 우리의 문화 환경이 바뀌면서 새롭게 생성된 언어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서양종이라는 의미의 양지(洋紙)와 구별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현재 통상적으로 쓰이는 한지의 의미는 ‘기계로 생산한 것이 아닌 수공예적 가치를 지닌 우리나라 고유의 종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알맞을 듯싶다.


대략적인 한지 제조 과정은 [닥나무 수확 -> 껍질을 벗겨 손질 -> 잿물에 넣어 삶기 -> 세척, 일광표백 -> 방망이로 두들겨 풀어주기 -> 물에 닥풀과 함께 섬유를 풀어주기 -> 종이뜨기 -> 물기 빼기, 말리기 -> 여러 장을 겹쳐 두드려 뒷손질 해주기]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줄이고 줄여 간략하게 만든 과정이 이만큼이다.

‘닥나무를 베고, 찌고, 삶고, 말리고, 벗기고, 두들기고, 고르게 섞고, 뜨고...’ 아흔 아홉 번의 손길을 거친 후 마지막 한 사람이 백 번째로 만지다고 하여 옛날에는 한지를 백지(百紙)라고도 불렀다. 이렇듯 한지의 제작과정은 하나하나가 사람의 손길이 닿아야 하는 고된 작업이다. 1000년을 버티는 생명력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참고자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한지 - 현암사

겨레과학인 우리공예 - 민속원

전통과학기술 조사연구(3) - 국립중앙과학관

꿈꾸는 과학 윤나오 blue-feather@hanmail.net
저작권자 2006-09-21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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