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시원한 데 없나?’
해가 떨어질 때까지만 더위를 피하고 싶었던 내가 향한 곳은 서점이다. 집에서 멀지 않은 대형서점에 들어간 나는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이 책 저 책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책이 참 많기도 하다. 서점에 갈 때마다 늘 하던 생각이었지만 딱히 찾는 책 없이 뒤적이니 그 생각이 더 선명해진다. 이 책들을 찍어내려면 참 수고스러웠겠다 싶다. 출판 쪽에도 컴퓨터의 발달로 많은 시스템들이 자동화되었겠지만 그렇다 해도 방대한 양의 책들이 서점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하물며 컴퓨터가 없었던 옛날에는 어땠을지 궁금해진다. 전기도, 기계도 없던 옛날 말이다. 그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할 책들이 있었을 텐데 어떻게 같은 책을 여러 권 만들어 냈을까? 베껴 쓰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아무래도 사람이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는 것이니 잘못 쓰거나 줄여 쓴 말도 많을 것이고 시간도 너무 오래 걸렸으리라.
때는 고려시대. 목판에 좌우가 거꾸로 된 글자를 새겨 먹을 바르고 종이에 찍는 인쇄술로 많은 책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팔만대장경도 1011년(현종 2년)에 초조대장경, 1091년(선종 8년) 이후 속대장경을 간행했다고 하니 그 시대의 목판인쇄술이 얼마나 발달하였는지는 익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목판인쇄술로 찍어내었던 많은 책들과 목판은 왕실의 서고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1126년 이자겸의 난으로 모두 불에 타기에 이르렀다.
왕실은 이것을 복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송나라로부터 서적을 수입하려 했다. 그러나 이 시기 송도 금나라와의 전쟁으로 혼란기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으로부터의 불경이나 서적들의 수입이 불가능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려는 자체적으로 문화적, 지적 공백을 메워야만 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그 당시 발달했던 목판인쇄술을 이용하여 각 서적의 목판을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단시간에 많은 양의 책을 만들어 내기에 한 장 한 장을 조각해야 하는 목판인쇄술은 효율적이지 못했다. 이들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책을 효율적으로 간행할 수 있을까? 이러한 고민 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금속활자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금속활자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생길 수 있었던 것일까?
금속활자를 만드는 과정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당히 복잡한 기술이 필요하다. 어느 한 순간의 필요에 의해 뚝딱 만들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금속의 가장자리는 날카로워 종이를 찢어먹기 일쑤이고, 종이는 약해서 조금만 잘못 다루어도 쉽게 손상되며, 먹은 매끈한 금속 표면에는 먹히지가 않아 글자를 찍어도 알아볼 수가 없기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 조상들은 금속활자를 만들기 위해서 그 당시까지 축적되어 온 지식과 기술력을 한데 모아야만 했다.
조상들은 청동기 시대부터 금속을 녹여 무기나 생활용품을 만들고 사용해 왔다. 그러한 금속 주조법은 후대에까지 이어져 내려와 고려에 이르러서는 삼한통보(三韓通寶, 1097), 해동중보(海東重寶, 1097), 해동통보(海東通寶, 1097)와 같은 동전들도 만들어졌다. 조상들은 이렇게 동전을 주조하던 방식과 활자를 혼합하여 금속활자를 고안해 냈다고 생각된다.
‘복’활자의 경우처럼 구리와 주석이 주로 들어간 합금을 놋쇠라고 하는데 이것은 순수한 금속들이 갖는 활자로서의 결함을 효과적으로 제거해 활자의 구성 금속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즉, 활자면에 묻을 먹에 의해 손상을 입기 쉬운 금속은 피해야 했고 녹일 때 쉽게 끓고 더디게 굳어야 매끈한 글자면을 얻을 수 있었으며 금속이 너무 강하지 않아 줄 등으로 다듬기가 수월해야 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갖춘 것이 바로 놋쇠였기 때문에 이것은 활자의 재료로 널리 이용되었다.
금속 못지않게 중요했던 재료가 바로 종이였다. 조상들은 신라시대 때부터 닥나무 껍질을 벗겨서 종이를 만들어 이용하였다. 이것이 계속 전해져 내려와 고려시대 때에 닥종이는 중국에서 널리 알려지고 수출의 주요 상품일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이러한 닥종이는 종이 질이 질기고 흡수력이 뛰어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딱딱한 금속활자를 찍어도 잘 찢어지지 않았고 먹이 잘 묻어나서 인쇄에 매우 좋은 재료였다. 조상들은 금속과 종이를 만드는 기술을 모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 조상들은 우수한 기술을 바탕으로 금속활자를 제조하고 그것을 실용화하였다. 그러나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은 1900년대 초중반까지는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처음 고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1927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열린 “책(Livre)"이라는 도서전람회에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줄여서 『직지심경』)이 대중들 앞에 선보이기 시작하면서 이 서적에 대한 고증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이 서적은 1377년 우왕 3년에 만들어진 금속활자본이라는 것이 확인되어,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금속활자본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인쇄출판문화가 이렇게 앞섰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의 근대적 출판문화의 뿌리는 우리 조상의 것에 있지 않다. 한국의 근대적 출판문화는 우리보다 늦은 서구의 인쇄술을 받아들인 일본을 거쳐서야 시작된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타났던 것일까?
게다가 조상들은 목판 인쇄가 예술적으로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금속활자 인쇄는 아무리 활자의 크기와 높이를 맞춘다고 하여도 약간 높낮이가 달라 종이에 찍었을 때 먹이 글자마다 고르게 묻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에 비해 목판 인쇄는 하나의 판에 조각을 하는 것이므로 굴곡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종이에 찍었을 때 더 선명하고 깨끗했으며 줄도 잘 맞았다.
결국 우리 조상들은 오랫동안 금속 활자를 불경 간행과 그 밖의 국가와 관련된 서적 발간에만 한정적으로 사용하였다. 처음 고려 때 금속 활자가 만들어진 것도 국가적 필요에 의해서였고 이것은 조선 시대에까지 넘어와서도 지속되었다. 그로 인해 민간인이 판매 목적으로 간행한 책을 일컫는 방각본의 출판이 처음 시작된 것은 조선조 중기, 즉 16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고, 이마저 금속활자 인쇄가 아닌 목판인쇄로 이루어졌다. 결국 우리는 개화기에 이르러서야 일본을 통해 근대적 활판인쇄술을 받아들임으로써 민간의 금속활자 인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앞에 든 차이점들에 의해서 우리나라와 서양은 인쇄술의 발전 양상이 다르게 나타났다. 인쇄술의 다른 발전 양상은 우리의 근대적 인쇄술이 서양으로부터 들어와 시작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그들의 인쇄술보다 더 앞선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자부심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 더군다나 최근에 들어서는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고안하는 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한국으로부터 얻었다는 주장까지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다.(존 M. 홉슨의『서구 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작가 서문 중에서)
단순히 우리나라가 최초로 만들었다고만 알고 있던 금속활자. 활자의 재료만 나무에서 금속으로 바뀐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금속활자를 알아갈수록 나타나는 새로운 사실들이 나를 놀랍게 한다. 지금껏 나는 조상들의 과학적 우수성은 잘 알지 못한 채 서양의 과학적 가치관만 쫓으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잿더미가 된 목판에서 피어난 새로운 활자의 창조. 조상들은 시대에 굴하지 않고 그들의 찬란한 과학 문명을 통하여 큰일을 이루어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과학 유물, 금속 활자. 이를 통하여 그들의 의지와 인내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 꿈꾸는 과학 3기 이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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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06-08-03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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