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장마가 끝나고 그렇게도 기다리던 해가 빛난다. 우중충한 날씨 탓에 우울했었는데 햇빛이 쨍쨍 나니 기분마저 좋아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짜증이 밀려온다. 습도가 높은 데다 해까지 내리쬐니 체감 온도가 급격히 상승하고 불쾌지수도 덩달아 올라가는 것은 당연지사. 집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더위는 쉽게 가실 줄 모른다. 그렇다고 에어컨을 켜자니 혼자 있는 집에서 전력 낭비가 너무 크다.
‘어디 시원한 데 없나?’
해가 떨어질 때까지만 더위를 피하고 싶었던 내가 향한 곳은 서점이다. 집에서 멀지 않은 대형서점에 들어간 나는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이 책 저 책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책이 참 많기도 하다. 서점에 갈 때마다 늘 하던 생각이었지만 딱히 찾는 책 없이 뒤적이니 그 생각이 더 선명해진다. 이 책들을 찍어내려면 참 수고스러웠겠다 싶다. 출판 쪽에도 컴퓨터의 발달로 많은 시스템들이 자동화되었겠지만 그렇다 해도 방대한 양의 책들이 서점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하물며 컴퓨터가 없었던 옛날에는 어땠을지 궁금해진다. 전기도, 기계도 없던 옛날 말이다. 그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할 책들이 있었을 텐데 어떻게 같은 책을 여러 권 만들어 냈을까? 베껴 쓰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아무래도 사람이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는 것이니 잘못 쓰거나 줄여 쓴 말도 많을 것이고 시간도 너무 오래 걸렸으리라.
이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익히 배웠던 그것. ‘금속활자’. 그렇지. 서양의 구텐베르크보다 200년이나 앞서서 우리 조상들은 금속활자를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 조상들의 과학 기술에 대한 얘기를 할 때면 국사선생님께서는 빼놓지 않고 금속활자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금속활자가 왜 발달된 우리 기술이었는지는 배운 기억이 없다. 단순히 서양보다 200년이 앞섰기 때문에? 우리의 인쇄술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금속활자인데... 막상 아는 것이 너무나도 없다. 도대체 금속활자가 무엇일까?
때는 고려시대. 목판에 좌우가 거꾸로 된 글자를 새겨 먹을 바르고 종이에 찍는 인쇄술로 많은 책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팔만대장경도 1011년(현종 2년)에 초조대장경, 1091년(선종 8년) 이후 속대장경을 간행했다고 하니 그 시대의 목판인쇄술이 얼마나 발달하였는지는 익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목판인쇄술로 찍어내었던 많은 책들과 목판은 왕실의 서고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1126년 이자겸의 난으로 모두 불에 타기에 이르렀다.
왕실은 이것을 복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송나라로부터 서적을 수입하려 했다. 그러나 이 시기 송도 금나라와의 전쟁으로 혼란기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으로부터의 불경이나 서적들의 수입이 불가능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려는 자체적으로 문화적, 지적 공백을 메워야만 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그 당시 발달했던 목판인쇄술을 이용하여 각 서적의 목판을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단시간에 많은 양의 책을 만들어 내기에 한 장 한 장을 조각해야 하는 목판인쇄술은 효율적이지 못했다. 이들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책을 효율적으로 간행할 수 있을까? 이러한 고민 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금속활자이다.
활자는 활판 인쇄에 사용하기 위하여 작은 장방형의 나무나 금속 등의 여러 가지 재료에 문자, 숫자, 기타 기호 등을 한 자씩 조각 또는 주조해 놓은 것을 말한다. 즉, 책을 찍어낼 때에는 해당하는 활자들을 모아 판을 짠 뒤에 종이에 원하는 장수만큼 찍어내고 사용 후에는 분리하여 보관하였다. 그 다음 다른 장을 찍을 때 다시 여러 활자를 조합하여 찍어내는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각 장마다 겹치는 글자도 일일이 새겨야 했던 목판인쇄보다 훨씬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활자 중에서도 금속활자는 목판활자나 진흙활자보다 마모가 잘 되지 않고 썩거나 모양이 변형될 걱정도 없어 보관을 장기간 할 수 있었으므로 그 효율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금속활자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생길 수 있었던 것일까?
금속활자를 만드는 과정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당히 복잡한 기술이 필요하다. 어느 한 순간의 필요에 의해 뚝딱 만들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금속의 가장자리는 날카로워 종이를 찢어먹기 일쑤이고, 종이는 약해서 조금만 잘못 다루어도 쉽게 손상되며, 먹은 매끈한 금속 표면에는 먹히지가 않아 글자를 찍어도 알아볼 수가 없기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 조상들은 금속활자를 만들기 위해서 그 당시까지 축적되어 온 지식과 기술력을 한데 모아야만 했다.
조상들은 청동기 시대부터 금속을 녹여 무기나 생활용품을 만들고 사용해 왔다. 그러한 금속 주조법은 후대에까지 이어져 내려와 고려에 이르러서는 삼한통보(三韓通寶, 1097), 해동중보(海東重寶, 1097), 해동통보(海東通寶, 1097)와 같은 동전들도 만들어졌다. 조상들은 이렇게 동전을 주조하던 방식과 활자를 혼합하여 금속활자를 고안해 냈다고 생각된다.
조상들은 금속을 이용할 때 그 쓰임새에 따라 서로 다른 금속 원소들을 다양한 비율로 조합해 사용하였다. 활자가 동전으로부터 유래하였다는 추측의 근거 또한 합금의 성분비에 나타났다. 개성의 개인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고려시대 ‘복’ 활자의 금속 구성 성분을 통해 나타난다. ‘복’ 활자의 금속 구성 성분은 구리 50.9, 아연 0.7, 주석 28.5, 납 10.2, 철 2.2%로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금속 구성은 동전을 부어 쓰는 데 더 알맞다고 하며 실제로 해동통보의 성분과 거의 같은 것으로 알려진 것이다.
‘복’활자의 경우처럼 구리와 주석이 주로 들어간 합금을 놋쇠라고 하는데 이것은 순수한 금속들이 갖는 활자로서의 결함을 효과적으로 제거해 활자의 구성 금속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즉, 활자면에 묻을 먹에 의해 손상을 입기 쉬운 금속은 피해야 했고 녹일 때 쉽게 끓고 더디게 굳어야 매끈한 글자면을 얻을 수 있었으며 금속이 너무 강하지 않아 줄 등으로 다듬기가 수월해야 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갖춘 것이 바로 놋쇠였기 때문에 이것은 활자의 재료로 널리 이용되었다.
금속 못지않게 중요했던 재료가 바로 종이였다. 조상들은 신라시대 때부터 닥나무 껍질을 벗겨서 종이를 만들어 이용하였다. 이것이 계속 전해져 내려와 고려시대 때에 닥종이는 중국에서 널리 알려지고 수출의 주요 상품일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이러한 닥종이는 종이 질이 질기고 흡수력이 뛰어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딱딱한 금속활자를 찍어도 잘 찢어지지 않았고 먹이 잘 묻어나서 인쇄에 매우 좋은 재료였다. 조상들은 금속과 종이를 만드는 기술을 모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활자가 발명되고 찍을 종이가 있어도 이것을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게 하려면 활자의 자국을 나타낼 물감이 필요했음은 당연지사다. 조상들은 목판 인쇄에 송연묵을 이용했다. 이것은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과 아교를 섞어서 만든 먹으로 흔히 숯먹이라고도 한다. 고려의 송연묵 또한 닥종이와 더불어 중국에 수출되기도 할 만큼 유명하였다. 그러나 이 송연묵은 금속활자 인쇄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매끈한 금속 표면에는 물먹이 아닌 기름먹이 잘 묻었던 것이다. 그들은 송연묵 대신 오동나무 기름이나 삼나무 기름 등을 태운 그을음과 아교를 섞어서 만든 먹(기름먹, 참먹이라고도 하였다)인 유연묵을 이용하여 금속활자를 인쇄하였다. 이것은 종이에 쉽게 번지지도 않았으므로 금속활자 인쇄에 알맞았다.
이렇게 우리 조상들은 우수한 기술을 바탕으로 금속활자를 제조하고 그것을 실용화하였다. 그러나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은 1900년대 초중반까지는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처음 고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1927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열린 “책(Livre)"이라는 도서전람회에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줄여서 『직지심경』)이 대중들 앞에 선보이기 시작하면서 이 서적에 대한 고증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이 서적은 1377년 우왕 3년에 만들어진 금속활자본이라는 것이 확인되어,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금속활자본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인쇄출판문화가 이렇게 앞섰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의 근대적 출판문화의 뿌리는 우리 조상의 것에 있지 않다. 한국의 근대적 출판문화는 우리보다 늦은 서구의 인쇄술을 받아들인 일본을 거쳐서야 시작된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타났던 것일까?
조상들은 금속활자 인쇄보다 목판 인쇄를 더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우리의 말이 만들어지기 이전인 고려 시대에는 당연히 중국의 문자인 한자를 우리의 문자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자는 글자 자체가 뜻을 가지고 있어서 글자 수가 매우 방대하다. 실제 중국인들은 평생 그들의 언어를 공부해도 죽을 때까지 모르는 글자가 있을 정도라 한다. 이것은 금속 활자로 글자들을 한 자씩 만들어 놓는 것이 큰 의미가 없음을 의미한다. 활자는 겹치는 글자를 또 조각해야 하는 수고스러움을 덜기 위함인데 글자 수 자체가 방대하면 활자를 만들든지 목판을 만들든지 간에 똑같이 수고스러운 것이다.
게다가 조상들은 목판 인쇄가 예술적으로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금속활자 인쇄는 아무리 활자의 크기와 높이를 맞춘다고 하여도 약간 높낮이가 달라 종이에 찍었을 때 먹이 글자마다 고르게 묻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에 비해 목판 인쇄는 하나의 판에 조각을 하는 것이므로 굴곡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종이에 찍었을 때 더 선명하고 깨끗했으며 줄도 잘 맞았다.
결국 우리 조상들은 오랫동안 금속 활자를 불경 간행과 그 밖의 국가와 관련된 서적 발간에만 한정적으로 사용하였다. 처음 고려 때 금속 활자가 만들어진 것도 국가적 필요에 의해서였고 이것은 조선 시대에까지 넘어와서도 지속되었다. 그로 인해 민간인이 판매 목적으로 간행한 책을 일컫는 방각본의 출판이 처음 시작된 것은 조선조 중기, 즉 16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고, 이마저 금속활자 인쇄가 아닌 목판인쇄로 이루어졌다. 결국 우리는 개화기에 이르러서야 일본을 통해 근대적 활판인쇄술을 받아들임으로써 민간의 금속활자 인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에 비해 독일을 비롯한 유럽은 인쇄술이 시작된 15세기 중엽부터 곧바로 민간인 중심의 상업적 출판을 활성화시켰고 그로 인해 독자 수와 출판량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것은 인쇄 기술의 발달을 가져와 빠른 인쇄술의 성장을 보이게 되었다. 게다가 서양의 문자는 기본이 알파벳으로 한 자 한 자가 뜻을 가지지 않은 기호에 불과하다. 즉, 서양은 A부터 Z까지 26자만 만들어 놓으면 더 이상 글자에 해당하는 활자를 조각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특징의 문자를 가진 서양인들에게는 금속활자가 목판 인쇄보다 탁월하게 높은 효율성을 가졌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금속활자 인쇄술이 더욱 빠르게 발전하였다.
앞에 든 차이점들에 의해서 우리나라와 서양은 인쇄술의 발전 양상이 다르게 나타났다. 인쇄술의 다른 발전 양상은 우리의 근대적 인쇄술이 서양으로부터 들어와 시작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그들의 인쇄술보다 더 앞선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자부심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 더군다나 최근에 들어서는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고안하는 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한국으로부터 얻었다는 주장까지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다.(존 M. 홉슨의『서구 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작가 서문 중에서)
단순히 우리나라가 최초로 만들었다고만 알고 있던 금속활자. 활자의 재료만 나무에서 금속으로 바뀐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금속활자를 알아갈수록 나타나는 새로운 사실들이 나를 놀랍게 한다. 지금껏 나는 조상들의 과학적 우수성은 잘 알지 못한 채 서양의 과학적 가치관만 쫓으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잿더미가 된 목판에서 피어난 새로운 활자의 창조. 조상들은 시대에 굴하지 않고 그들의 찬란한 과학 문명을 통하여 큰일을 이루어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과학 유물, 금속 활자. 이를 통하여 그들의 의지와 인내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 꿈꾸는 과학 3기 이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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