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극 장면: 암행어사로서 비밀스럽게 여행 중이던 주인공과 일행들. 하지만 그들은 실수로 자신들의 정체를 들키고 말았다. 정체를 알게 된 한 벼슬아치는 비밀리에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주인공은 별 수 없이 초대에 응하기는 했지만 그 벼슬아치의 부담스런 환대가 내심 의심스럽다. 조심스레 소매 속에서 은(銀)젓가락 한 쌍을 꺼내들어 음식 속에 찔러 넣어본다. 그 순간 경직되는 주인공의 표정! 은젓가락이 새카맣게 변한다! 이렇게 암행어사 일행을 독살하려는 음모가 드러나고 숨 막히는 추격전이 시작된다...
상투적 묘사이긴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에서 한번쯤은 봤을 법한 익숙한 장면들이다. 그리고 이런 장면에서는 어김없이 은수저가 나타나 우리의 주인공을 독살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준다.
금과 은은 쉽게 구부러지고 마모되기 때문에 식기 재료로는 적합한 금속은 아니다. 그러나 은은 오래 전부터 숟가락, 젓가락 등의 식기를 만드는 재료로 애용돼 왔고, 현재도 일반 가정집에서 몇 개씩은 사용되고 있다. 서양에서도 은으로 식기를 만드는 풍습이 있다. 서양의 최고급 식기는 보통 은접시, 은잔이 아니던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은으로 식기를 만드는 것은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은으로 식기를 만들어 왔던 이유는 은으로 독을 유무를 알아낼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얼핏 보면 미신인 듯하지만,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로부터 많이 사용된 독약 중에는 비상(砒霜, arsenic trioxide)이 있는데, 냄새가 없는 흰색 물질로 아주 독성이 강하다. 또한 소량으로도 계속 섭취하게 되면 중독 돼 소화기장애·결막염·피부의 색소 침착 등을 일으키다가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다. 영화나 사극의 독살 장면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 비상이다. 그런데 비상의 주요성분은 웅황(雄黃,As2S3), 계관석(鷄冠石,AsS), 독사(毒砂,FeAsS)와 같은 비소와 황(S)의 화합물이다.
은은 공기 중이나 물 속에서 비교적 안정적이지만, 황(S)이나 황화수소(H2S)와는 반응을 잘 일으켜 검은색의 황화은(Ag2S)으로 쉽게 변한다. 따라서 음식물에 비상 성분이 들어가게 되면 비상 속의 황(S)과 은수저가 반응해 검게 변하게 된다. 이런 특성 때문에 은수저가 독(비상)을 검출하는데 쓰이게 된 것이다. 은수저로 계란을 먹게 되면 수저가 검게 변하기도 하는데 이것 역시 계란의 노른자에 들어있는 황 성분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4Ag + 2H2S(황화수소) + O2 = 2Ag2S(황화은, 검은색) + 2H2O
<자료 1> 황화은의 생성반응
단지 귀한 것만을 선호했다면 금수저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양반가나 궁중에서는 그 당시 주로 사용됐던 독(비상)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으면서도 품격을 지킬 수 있는 은수저를 애용했고, 그 풍습이 현대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실제로 은과 반응하는 독은 소수이기 때문에 은으로 독의 유무를 밝혀내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고 보면 은만큼 재미있는 금속도 없다. 은은 종교적, 주술적인 면에서도 효과를 발휘한다. 옛 사람들은 은으로 만들어진 장신구를 갖고 있으면 잡귀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상투가 풀어지지 않도록 사용한 장신구인 동곳도 은으로 만들면 잡념이 생기지 않는다고 해 옛날 선비들이 애용하기도 했다. 독과 반응하는 현상에서 비롯된, 은이 독을 정화시킨다는 이미지가 위와 같은 주술적 믿음을 낳은 셈이다
또한 옛날부터 은은 약제로써 많은 신뢰를 받아왔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대부터 은으로 침을 만들어 사용했고 은가루를 한약재로 사용했다 한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은가루는 성질은 평하고 맛은 맵고, 오장을 편안하게 하고 심신을 안정시키며 경계증(놀람증)을 멎게 한다고 나와 있다. 본초강목(本草綱目)도 은을 몸에 지니면 오장이 편하고 심신이 안정되며 사기를 내쫓고 몸을 가볍게 하여 수명을 길게 한다고 적고 있다. 실제로 몇몇 감염에는 은을 이용한 향토요법도 전해오고 있다. 다재다능, 팔방미인 이라는 수식어는 은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최근에는 은이 최신기술인 나노기술(NT)과 결합하여 ‘은나노’라는 신조어를 만들며 대중들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세탁기, 청소기, 정수기 등등 건강과 직결돼 있는 제품에서 은나노라는 수식어가 쏟아져 나왔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은나노의 효능, 효과에 대한 과학적인 검증이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제품들이 인기를 끈다는 사실은 옛날부터 내려온 은에 대한 믿음이 꽤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은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과 최첨단 기술인 나노기술, 거기에 귀금속인 은의 귀족적인 이미지까지 효과적으로 어우러져 매력적인 광고 효과를 낸 것이다.
이렇게 은(銀)은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에서 현재까지 우리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있다. 그 때문일까? 문득 우리나라에서 은이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은(銀)은 금, 철, 구리, 주석과 함께 오금(五金)이라 불리며 예로부터 널리 사용돼 왔다. 때문에 다른 금속들과 마찬가지로 은 역시 종교, 생활용품, 술병과 무기에 이르기까지 우리 생활에 친숙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느껴진다. 금(金)은 그 화려한 색깔과 희귀함 때문에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왕관, 장신구, 불상을 만드는데 뿐만 아니라 다른 금속의 도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공예품의 재료가 됐다. 구리(銅) 또한 놋쇠를 비롯하여 주석(朱錫)과 함께 합금의 형태인 청동으로 많이 사용됐다. 물론 철(鐵) 또한 말할 필요 없이 가장 널리 쓰였던 금속이다
그에 비하면 은제 유물은 그 갯수는 훨씬 적어 보인다. 실제로 그간 여러 박물관을 다니면서 본 유물들을 떠올려 봐도 금, 구리, 주석, 철로 만들어진 유물들은 많지만, 이상하게도 은으로 만들어진 유물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금과 함께 대표적인 귀금속인 은으로 만들어진 유물의 갯수가 이렇게 적다는 것은 의외의 일이다. 단순히 비싸기 때문이라면 오히려 금으로 만든 유물들이 더 적어야 할 것이 아닌가? 더구나 오늘날의 은은 노점상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흔한 것이 아니던가.
현재의 모습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될 일이지만, 그 이유에는 속내가 있다. 옛 선조들이 은을 채취하는데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었던 것이다. 은이 금과 함께 그 존재와 가치가 오래 전부터 알려져 왔던 금속이지만, 이용 면에서는 금보다 크게 떨어진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순수한 형태의 Ag 상태인 자연은(Native silver)으로 산출되는 양이 자연금보다 적었고, 두 번째로 은 광석으로부터 사용가능한 은을 얻기가 매우 힘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금속들에 비해 상당히 까다로운 정련과정을 거쳐야만 은을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자연에 존재하는 은 광석에서 순도 높은 은을 뽑아내는 은 제련법이 은을 활용하기 위한 핵심 기술이었다. 이 때문에 고대에서는 은이 금보다 더 귀중하게 취급된 사회도 있었다. BC 3600년 무렵의 이집트 법률에 의하면 금과 은의 가치비율은 1:2.5 정도였다고 하니 순도 높은 은을 얻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동방에서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좋은 은이 많이 나는 나라로 알려져 있었다. 신라의 은은 질 좋기로 유명해 중국과 일본으로 많이 수출됐다. 일반 백성들까지 은 세공품으로 머리와 옷 장식을 할 만큼 생산량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17세기 무렵 우리나라에서 은이 채굴되는 곳은 68곳이나 있었으며, 그 중에서 함경도 단천의 은 광산이 제일 유명했다. 함경도 단천이 은 광산으로 주목 받은 데는 이유가 있다. 은 광석을 많이 캐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순도 높은 은을 제련해 낼 수 있는 고유한 핵심기술인 ‘단천연은법’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천연은법은 우리나라에서 독자적으로 발명된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으로 1503년(연산군 9) 김검동(金儉同)과 김감불(金甘佛)이라는 기술자들에 의해서 개발됐다. 이들은 본래 궁중의 금은 세공에 동원된 기술자들로 단천에서 채굴되는 아연광에 포함돼 있는 은을 제련하기 위해 연구를 하고 있었다. 단천의 은 광산에서 채굴되는 은은 아연광과 혼합돼 있었기 때문에, 아연광으로부터 순도 높은 은을 분리해 내는 제련 기술이 질 좋은 은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던 것이다.
이 기술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자세히 기록되어있고, 19세기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서종>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돼 있다.
[먼저 은을 포함한 광석을 채취한다. 노(爐) 아래에 조그마한 구덩이를 파고 뜨거운 불을 먼저 깔아 둔다. 그리고 그 위에다가 아연 덩어리를 깔고 은광석을 펼쳐둔다. 사방에 불티가 남아있는 재를 덮고 소나무로 덮는다. 부채를 가지고 불을 지피면 불길이 일어나는데 아연이 먼저 녹아내리고 은광석은 천천히 녹는다. 그러다가 아연 녹은 물이 끓어오르면 갑자기 은광석이 갈라지고 그 위로 아연이 흘러나온다. 이때 물을 뿌린다. 그러면 은은 응고되면서 아연과 분리 된다. 다시 재 속에 있는 아연에 불을 가하면 재를 떨어버리면 아연도 분리할 수 있다.]
단천연은법은 은과 아연의 녹는점, 끓는점의 차이와 녹아있는 상태의 비중분리를 이용한 건식제련법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끓는점과 녹는점이 비슷한 두 금속을 분리해 내는 동시에 순도를 높이는 이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오랜 동안의 관찰과 실험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들의 노력으로 개발된 단천연은법은 함경도 단천을 더욱 활발한 은산지로 만들었다. 그 덕분에 조선은 일본과 중국의 중계 무역을 통해 많은 국부를 쌓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뛰어난 금속제련기술이 있었지만 우리에게 은은 역사적으로 슬픈 귀금속이다. 양인 김감불과 노비 김검동은 단천연은법을 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천민이라는 이유로 그 이름이 역사 속에 묻힐 뻔 했다. 게다가 이 기술이 빛을 본 곳은 정작 조선보다 일본이었다. 조선에서 전수받은 제련 기술로 일본의 은 생산은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한 일본은 '뎃포(鐵砲)' 라 불리던 조총을 받아들여 임진왜란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품질 좋은 은이 생산된 덕분에 왜란 이후 명이 조선을 도왔으니 그 은혜에 대해 보답을 해야 한다며 명나라는 우리나라에서 엄청난 양의 은을 추징해 가고는 했다. 그리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백성에게 돌아갔다.
아무리 뛰어난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다 해도 경직된 정책과 사회 분위기에서는 그 빛을 보지 못하기 마련이다. 누군가 ‘현재는 과거의 재현’이라고 말했던가? 고고한 은빛에 비치는 실루엣이 현재의 우리 모습과 겹쳐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지금도 우리나라의 은제공예품들이 박물관 한 귀퉁이에서 화려하지만 슬픈 빛을 발하고 있다.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 싶을지 한번쯤은 고민해 봐도 좋은 일인 듯하다.
- 꿈꾸는 과학 윤나오
- blue-feather@hanmail.net
- 저작권자 2006-07-26 ⓒ ScienceTimes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