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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응용과학
꿈꾸는 과학 김민지
2006-07-20

옛 선비들의 명품, 먹(墨) 먹 속에 버무려진 장인의 땀과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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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십 평생 벼루 열 개의 바닥을 밑창내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는 추사 김정희 선생은 ‘서가의 으뜸은 먹’이라고 했다. 지금은 초등학교 서예시간에나 구경할 법한 물건이지만 우리네 선비들에게 먹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자 귀중한 보물이었다. 48만 원짜리 금테 두른 몽블랑 만년필을 양복 안주머니에 꽂고 다니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우아한 손동작으로 만년필을 꺼내는 어느 교수의 자부심은 어쩌면 먼 옛날 선비들의 문방구 사랑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먹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옛 도시인 나라(奈良)에는 정창원이라는 왕실의 보물창고가 있다. 그곳에 옛날 먹 14자루가 보관돼 있는데 그 중 두 자루가 신라에서 만들어진 먹이라 한다. 두 자루의 먹은 일본에 먹과 종이 만드는 법을 전수했다는 고구려 승려 담징이 영양왕 12년, 곧 서기 610년 3월에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가지고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국과의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고려 때의 먹은 중국과 일본 고객들에게 사랑 받는 효자상품이었다. 중국의 먹과 견주어 손색이 없을 정도의 우수한 먹을 만드는 장인인 ‘장력강’의 이름은 한반도와 그 일대를 떠들썩하게 했다고 한다. 조선 말기에는 황해도 해주와 평안도 양덕에서 많은 먹을 만들었는데, 특히 해주 먹은 중국과 일본에도 수출됐고 양덕 먹은 향기가 좋기로 유명했다. 서울의 먹골, 묵정동 또한 과거에 먹을 많이 만들던 곳이다.


먹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먹이란 것이 명품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어숙권(魚叔權)의『고사촬요(攷事撮要)』에 있는 우리나라의 조묵법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물 9근에 아교 4근을 넣고 불에 녹인 다음 순수한 그을음 10근을 넣어 잘 반죽한다. 이것을 다른 그릇에 옮기고, 남은 물 1근을 적당히 뿌려 가면서 잘 찧는다. 다음에 깊숙한 방에 평판을 깔고 습한 재를 한 치 정도 깔고 종이를 덮는다. 그 종이 위에 먹을 옮겨 놓고 다시 종이로 덮고 위에 다시 습한 재를 한 치쯤 덮는다. 그대로 3일을 두었다가 각 장을 바르게 네모로 자른다. 자른 먹 위에 마른 재를 한 치쯤 덮고 2,3일 지난 후 꺼내어 으슥한 방 평판 위에 놓고 여러 차례 뒤집어 가며 말린다.”


간단한 소개 뒤에 숨겨진 어마어마한 제작과정이 보이는가? 어숙권의 글을 따라 먹 제작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내어 보자.


먹의 주된 재료는 ‘순수한 그을음’이다. 그을음은 전자 현미경으로 봐야 겨우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만한 작은 크기의 탄소알갱이로, 먹의 색을 검게 하는 주성분이다. 물질이 연소될 때 산소가 부족하거나 필요보다 낮은 온도가 주어지게 되면 불완전 연소가 일어나는데 이때 그을음이 발생한다.


먹을 만들 때는 기름이나 소나무를 태워 생기는 그을음을 이용한다. 오동나무 씨앗 기름이나 삼씨기름 등 식물성 기름을 태워 나온 그을음으로 만든 먹은 ‘유연먹’, 소나무의 송진을 태워 나온 그을음으로 만든 먹은 ‘송연먹’이라 한다. 요즘에는 중유나 경유, 크레오소트유, 혹은 피치나 콜타르 등으로부터 그을음을 채취하기도 하는데 먹 중에서도 가격이 싼 대중적인 것의 대부분은 이 공업연을 원료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을음으로 만든 먹은 광물성 유연먹이라 부른다.


유연은 기름을 넣은 질그릇에 심지를 담가 불을 붙인 후 그 등불의 불꽃 끝에서 10cm 정도 높이에 접시를 씌워 얻는다. 그을음 입자의 크기는 심지의 굵기로 조절할 수 있는데, 가는 심으로 태우면 입자가 고운 그을음이, 굵은 심으로 태우면 불꽃도 커서 입자가 큰 그을음이 된다. 불을 붙여 놓고 한참을 기다리면 접시에 고운 그을음이 소복하게 쌓이는데 이것을 조심스레 새의 깃털로 쓸어 담아 먹으로 만드는 것이다.


소나무에서 나오는 송연은 유연보다 채취 방법이 훨씬 어렵고 그 양도 적어 가격이 비쌌다. 우선 나이 많은 소나무를 골라 줄기에 도끼로 고랑을 파내고 송진이 배어나오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족히 1년은 걸린다. 송진은 갈색을 띤 황색 수지로 오늘날 테라핀유와 니스를 만들 때 사용된다. 송진이 충분히 배어나오면 소나무를 장작만한 크기로 잘라 아궁이 속에 넣어 태운다. 아궁이는 장지 같은 것으로 막아 공기가 잘 통하지 않도록 해 불완전 연소가 일어나도록 한다. 이렇게 하면 그을음 자체에 고온이 가해지지 않기 때문에 부드럽게 응집된 입자의 그을음을 얻을 수 있다. 375Kg의 소나무를 태워야 고작 10Kg의 송연을 모을 수 있다고 하니 옛날 묵장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순수한 그을음을 충분히 모으고 난 뒤에 해야 할 일은 ‘아교와 함께 잘 반죽하는’ 것이다. 탄소로 이루어진 그을음은 본래 물에 녹지 않는데 이것을 물에 개어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교다. 아교란 간단하게 말하면 ‘동물성 풀’로서 동물의 가죽이나 뼈, 또는 물고기의 부레를 푹 삶아 얻는다. 흰 쌀가루 반죽에 쑥 가루를 넣고 버무리면 초록빛의 쑥떡이 되는 것처럼 아교의 끈적끈적한 성질이 따로 흩어져 있는 그을음을 한데 뭉치도록 해준다.


온도가 18℃ 이하로 낮아지면 아교는 딱딱하게 굳고 틀 속에서 건조된 먹은 우리가 자주 봤던 반듯한 네모 모양을 갖추게 된다. 딱딱하게 굳은 먹을 벼루에 갈면 그을음이 아교와 함께 미세한 알갱이로 갈려 물과 섞인다. 붓에 먹물을 묻혀 글을 쓰면 종이 섬유의 사이사이에 알갱이들이 스며들어가게 되고 종이의 면에 알갱이가 부착되어 검은 글씨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아교의 점성은 알갱이를 부착시키고, 글씨가 마르고 나면 먹색에 투명한 느낌을 살려준다.


이 대목에서 어숙권이 『고사촬요』에 공개하지 않은 장인의 비법은 ‘향’이다. 지금 당장 눈을 감고 ‘먹의 냄새’를 떠올려 보시라. 은은하게 코끝에 감도는 그 향은 사실 먹 자체의 냄새가 아니다. 먹의 주성분인 아교는 본래 비릿하고 역한 냄새가 강하다. 그 냄새를 감추기 위해 사향, 용뇌(향을 내는 나무의 이름이다.) 등의 천연 향료들을 첨가했던 것이다. 우리가 초등학교 때 문구점에서 샀던 그 먹에서 나던 냄새는 안타깝게도 화학적으로 제조한 인조향료의 냄새다.


이제 ‘순수한 그을음’을 ‘아교와 함께 잘 반죽’한 먹은 최상품이 되기 위한 마지막 ‘건조’의 과정만을 남겨두고 있다. 먹이 건조되는 동안 아교는 습기를 머금었다, 내놓았다 하면서 점차 숙성된다. 아교는 콜라겐을 주성분으로 하는 단백질의 일종이므로 고분자 사슬이 물속에서 잘게 나누어지는데(이를 가수분해라 한다) 3~5년 정도가 지나면 적당히 분해돼 아교의 점도가 글씨를 쓰기에 알맞은 정도로 약해진다. 적어도 3년은 묵혀 두어야 명품계에 명함을 내밀 수 있다.


먹 반죽이 끝나면 그것을 배나무로 만든 틀에 넣고 눌러 네모난 모양을 만든다. 틀에서 바로 꺼낸 먹은 겉면도 부드럽고 속도 축축하여 휘청휘청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특히 먹이 차가운 겨울 공기를 쐬면 곧 금이 가서 갈라지거나 구부러져 버린다. 방금 태어난 먹은 잠시 재 속에서 지낸다. 풀을 태워 만든 흡수력이 좋은 재를 사용해서 먹의 수분이 천천히 흡수 되도록 하는 것이다. 행여나 금이 갈세라 정성스럽게 매일같이 새 재로 갈아주기를 한 달 정도 되풀이해야 티 하나 없이 매끄러운 새까만 먹이 탄생한다.


60~70% 정도 마른 먹은 곶감처럼 짚으로 싸서 천정에 매달아두고 마지막 숙성의 과정을 거친다. 제대로 만들어져 잘 보관된 먹은 100년 이상의 수명을 가진다고 하니, 과연 장인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명품을 탄생시킨다 하겠다.


“문방(文房)의 네 가지 보물은 모두 선비에게 요긴한 것인데, 그 중에서도 오직 먹 만들기가 가장 어렵다...어묵(御墨, 임금이 사용할 먹) 5천정을 만들어 올려야 했는데, 기한이 늦어도 봄까지는 바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급히 공암촌(孔巖村)에 이르러 백성들을 다그쳐 송연(宋煙, 소나무 그을음) 백 곡(斛)을 채취하게 하고 솜씨 좋은 장인을 모아 몸소 독려해서 두 달 만에 끝마쳤다...이후로 먹을 보면 비록 한 마디 작은 것이라도 천금처럼 중히 여겨져 감히 소홀히 볼 수가 없었다.”


『파한집(破閑集)』에서 먹을 만드는 과정을 직접 감독했던 이인로(李仁老)가 쓴 글이다. 그을음을 온통 뒤집어 쓴 채 먹 만드는 것을 구경했던 그는 이후 작은 먹 하나도 천금처럼 여기게 됐다고 한다. 그는 먹 속에 함께 버무려진 장인의 땀과 노력을 볼 줄 알게 된 것이다.


앞으로 서예가의 글씨를 감상할 기회가 있다면 우리도 한번쯤 생각하자. 종이 섬유 사이사이에 깃든 탄소 알갱이들이 얼마나 어렵게 모아진 것인지. 인사동 골목길을 걷다 상점 한 켠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먹을 보게 된다면 한번쯤 떠올려보자. 그 먹 속의 아교가 얼마나 오랜 세월 물기를 머금었다 내뱉었다 하며 숨쉬었을지.


또 초등학교를 다니는 조카의 책가방 속에서 먹 한 자루를 발견했다면 이제 우리도 한번 아는 척 해보자. “음, 이거 송연묵인가? 냄새가 좋군. 먹은 말이야, 단단하면서 가볍고 벼루에 갈면 부드럽게 잘 갈릴 뿐 아니라 찌꺼기가 적어 먹색이 맑고 붓이 잘 내리며 은은한 묵향이 배어나오는 게 좋은 거야.”

꿈꾸는 과학 김민지
deadend116@empal.com
저작권자 2006-07-20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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