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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응용과학
꿈꾸는 과학 오혜영
2006-06-01

카오스를 담은 포석정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으며 즐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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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5월 첫발을 내디딘 '꿈꾸는 과학'은 과학의 대중적 글쓰기와 일러스트레이션을 함께 고민하고 생각하는 글쓰기 공동체입니다. 꿈꾸는 과학은 모두가 즐거운 과학을 이야기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꿈꾸는 과학은 다양한 과학책들을 읽고 토론함으로써 비판적 사고와 과학적 상상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또한 꾸준히 과학 글쓰기를 연습함으로써 자신만의 글쓰기 스타일을 구축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퍼져나가는 꿈꾸는 과학의 소망이 다양한 계층의 독자들에게 과학의 즐거움을 전하고 이러한 즐거움들이 모여 건전한 과학문화를 만들어 나아가길 희망합니다!

[편집자 註]



여기는 우리나라 수학여행 일번지 경주. 한국수학여행협회에서 제안한 필수코스를 따라가던 한 무리의 고등학생들이 멈춰선 곳은 웬 구불구불한 석재 수로 앞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단일 폐곡선을 이루고 있고, 시작점과 끝점이 만나고 있어”라고 안경 낀 학생 A가 말한다. 사방이 경치 좋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데다 물결치는 듯 혹은 뭉게뭉게 구름 피어나는 듯 우아한 그 석재 수로가 어떤 감흥을 줄 법도 한데, 웬일인지 학생들은 제법 비탄에 잠긴 얼굴이다.


수백 년 전 이곳을 방문했던 15세기의 학자 조위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겨 이 유적에 대한 유감을 표시했다.


我願天公令鬼守

留與後人鑑此石


하느님이시여 귀신을 시켜

이 돌 홈을 지키게 하여

뒷사람들에게 보여 주소서

노는 사람들의 끝을

거울로 삼도록


그런데 노는 사람들의 끝이라니? 친구의 질문에 학생 A의 안경이 다시 한 번 반짝인다. “이곳이 통일 신라가 최후를 맞이한 장소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애왕이 백제의 견훤이 쳐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이곳에서 주지육림에 빠져 있었거든.”


이 학생들은 어떤 유적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 ‘나라를 망하게 한 나쁜 유적’의 대명사인 이것은 사적1호인 ‘포석정(鮑石亭)’이다.


역사란 항상 승자의 손에서 쓰여 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최후의 승자인 고려가 기록한 신라의 역사를 그대로 믿을 수 있는 것일까? ‘나쁜 유적’으로 주민들까지 꺼림칙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포석정은 교과서에서도 보잘 것 없는 취급을 받고 있지만 이것이 정당한 일인지는 한 번 생각해 볼 문제다. 최근 들어 일부 역사학자들 간에 포석정은 호국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곳이며 경애왕은 신라의 마지막 순간에 제사를 드리러 그곳으로 행차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포석정의 구불구불한 수로를 흐르는 물의 움직임에 호기심을 갖고 연구하던 과학자들 역시 포석정의 새로운 면모를 밝혀내고 있다. 그것은 포석정이 유체역학적으로 만만치 않은 과학 유물이라는 것이다.


비운의 역사가 고소했던지 일제가 특히 잘 보존하려고 애썼다는 포석정. 이 포석정의 과학적 탁월성을 밝히는 일은 어쩌면 이 ‘나쁜 유적’의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데 한몫할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역사가 씌운 주홍글씨를 떼어내고 치우치지 않은 눈으로 편견 없이 포석정을 탐구해보자.


먼저 포석정의 모습을 머리에 그려보자. 학생 A의 건조한 감성은 포석정을 ‘구불구불한 단일폐곡선’이라고 묘사했지만, 신라인들은 포석정이 마치 ‘전복 껍질’같다고 생각했다. 포석정(鮑石亭)의 포(鮑)자가 ‘전복 포’자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거대한 전복은 동서로 긴축이 10.3미터, 폭은 약 7미터 정도 되는데 수로의 길이만 따지면 약 22미터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수로 입구에는 커다란 돌거북이 버티고 앉아 폭 약 30센티미터, 깊이 22센티미터의 수로에다가 입으로 물을 뿜어내었다.


이 수로는 어디에 사용되었던 것일까? 신라인들은 포석정의 돌아 흐르는 물길 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으며 즐겼다고 한다. 이러한 행사를 ‘유상곡수’라고 한다. 유상곡수는 원래 중국의 명필 왕희지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다만 신라의 유상곡수와 다른 점은 중국의 것은 자연의 물가에서 시작됐다는 점이다. 포석정을 만든 신라인도 자연의 물길을 재현하고 싶었던지 꿈틀꿈틀한 물길 모양이 물고기라도 몇 마리 살고 있을 것 같이 자연의 물길과 쏙 빼닮았다. 동양의 자연친화적인 생각이 잘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서양에 포석정과 같은 구조물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수로는 기하학자가 출장 와서 컴퍼스로 그린 듯이 반듯한 원 모양일 것이다. 가운데에는 중력에 역행하며 솟아오르는 분수라도 하나 있을 법하다. 그들의 건축은 늘 적극적으로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만약 시를 지어보겠다고 지필묵을 들고 앉았다 해도 오래 참지 못하고 시끌벅적한 토론을 한판 벌였을 것이다.


자, 이제 우리네의 유상곡수 장면을 상상해보자. 우아한 곡선의 수로에는 멀리 상류의 안골샘물에서 끌어 온 투명한 물이 맑은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있다. 굽이굽이 수로가 몸을 비트는 곳마다 사람들이 지필묵을 내려놓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자세히 보니 그들은 신라의 왕과 그 신하들이다. 이 때 한 사람이 수로 입구에서부터 향긋한 내음 가득한 술잔을 띄워 보낸다. 둥실 둥실 떠가는 술잔이 어디 가서 닿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윽고 신하들은 하나 둘 물이 건네는 술잔으로 목을 축이고 일필휘지로 시 한 수를 완성한다. 마음에는 웅대한 산수를 품고 있지만 그들의 손은 파르르 떨린다. 다음 술잔이 오기 전에 시를 완성해야만 하는 것이다. 아, 그러나 한 신하가 미처 시를 완성하기 전에 다음 술잔을 받고 말았다. 벌주로 연거푸 세 잔을 마신 그의 얼굴이 붉어진다. 취해서일까, 부끄러워서일까.


그런데 이 유상곡수의 장면에는 오류가 있다! 과학자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찾아낸 것은 과연 포석정에서 이 유상곡수가 가능한가 하는 문제였다. 중국이나 일본의 곡수들과는 달리 포석정은 꽤 작은 규모인지라 술잔이 2~3분 만에 수로를 다 빠져나가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사언시나 오언시를 짓는 것은 그야말로 이백과 두보에게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에 대한 신라인들의 문제해결 방법은 독특했다. 사실 포석정의 비밀은 그것이 우둘투둘한 전복껍데기 모양이라는 데 숨겨져 있다. 그 구불구불 휘어진 부분에서 술잔은 맴돌기도 하고 잠시 멈추기도 하면서 흘러가는 것이다. 이렇게 술잔의 즐거운 유랑이 끝나는 데에는 7~10분 정도의 시간이 걸리며 이제는 이백과 두보가 아닌 누구라도 시 한 편을 멋들어지게 적어 내려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술잔이 사람 앞에서 맴돌게 되는 것일까? 마침 한국과학기술원의 장근식 교수가 포석정의 모형을 만들어 수행한 실험 결과와 컴퓨터를 이용한 시뮬레이션을 통하여 포석정의 유체역학적 특성에 대하여 분석해보았다. 그는 포석정에서 물의 흐름은 근본적으로 비정상 난류 유동을 하여 확실한 회돌이 현상, 쉽게 말해 소용돌이 현상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술잔은 이 회돌이를 타고 술내음에 벌써 취한 신하들 앞에서 누군가 도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빙글빙글 맴돌았던 것이다.


회돌이가 일어나게 하라! 이것이 포석정 건축에 주어진 과제였다. 이러한 신라인들의 문제해결 방식은 공학적으로 매우 독특한 경우이다. 회돌이 현상이 일어나면 유체가 주로 흐르는 패턴과 다르게 난류가 발생하여 주 흐름과 충돌을 하고 그 충돌면에서 에너지가 분산되는 특징을 보인다. 그 때문에 실용적인 면에서는 대부분 회돌이가 일어나지 않게 설계하려고 고심한다. 예컨대 오일파이프 속의 난류는 오일의 흐름을 방해하고, 우주선의 액체연료 탱크 내의 회돌이 현상은 에너지를 분산시키며, 비행기 날개 위의 난류는 이륙을 방해하므로 이런 경우에는 난류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관건인 것이다.


그러나 포석정은 오히려 회돌이 현상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비대칭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또한 초반부 회돌이와 후반부 회돌이는 서로 다른 조건하에 있기 때문에 수로의 구조도 다르게 만들었다고 하니 신라인들이 가지고 있는 유체의 이동에 대한 지식이 대단한 수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서양의 이론물리학에서는 이 '난류'라고 하는 것이 아주 유서 깊은 문제라는 것이다. 순조로운 유체의 흐름이 갑자기 나선형 흐름과 소용돌이로 바뀌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에너지가 급격하게 대규모 운동에서 빠져나와 소규모 운동으로 흩어지는 일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이것은 너무도 복잡한 문제였고 거의 알 수 없는 문제처럼 보였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양자역학자인 베르너 하이젠 베르크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두 가지 문제를 하느님께 물어보겠다는 말을 꺼냈다. 하나는 상대성이 생기는 이유, 다른 하나는 난류가 생기는 이유였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내가 생각할 때 하느님은 첫 번째 문제에는 해답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 이론물리학자들은 유체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단, 이상적인 유체를 가정하고 그것이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영역에 대해서만 말이다. 그래서 조용히 움직이는 흐름의 경우에 한해서 기술자들이 그것을 계산할 수 있는 실용적인 기술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좀 더 솔직해져야 했다. 이상유체는 실제가 아니다. 자연에서 실제의 유체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그 대답은 카오스의 영역에 속한다. 생각해보면 카오스는 모든 곳에 존재하며 자연의 본질이다. 카오스는 복잡하고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는 자연의 모습에도 질서가 내재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 질서는 비선형적이어서 안타깝게도 어떤 현상의 결과는 예측 불가능하다. 게다가 초기조건에 대단히 민감해서 처음에 약간만 다른 조건에서 시작해도 결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달라질 수 있다. 포석정의 난류도 카오스의 산물이다. 술잔을 띄우면 그것이 누구 앞에 가서 맴돌 것인지 미리 예측할 수 없는 것도 포석정을 흐르는 물의 운동이 카오스적이기 때문이다.


신라인들은 자연의 본질인 카오스를 포석정 물길을 통해 극적으로 재현해냈다. 그들도 서양인들처럼 실용적인 기술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난류를 이해하는 그들만의 방법, 즉 카오스를 보는 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포석정 이전과 이후에 유체역학을 이용한 유적이 남아 있지 않으니 이것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을 것 같다. 그러나 역시 신라인들이 무언가 ‘알고’ 있었으리라고 상상해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학생 A가 고개를 든다. 포석정의 과학이야기는 건조한 그의 감성도 뭉클하게 할 정도로 흥미로웠다. 이제 포석정이 새롭게 보인다. 학생 A는 또다시 그의 안경을 반짝이며 조위의 시를 고쳐지어 나지막하게 읊조리기 시작한다.


하느님이시여 선녀를 시켜

이 돌 홈을 지키게 하여

뒷사람들에게 보여 주소서

고대 과학의 훌륭함에

넋을 잃도록



<참고자료>

-과학으로 푸는 우리 유산 - 국정 브리핑

-[KISTI의 과학향기]술잔을 띄워라~ '포석정'

-책 <카오스 - 현대과학의 대혁명, 제임스 글리크>

-책 <역사스페셜 3, KBS역사스페셜 제작팀> - 2. 포석정은 놀이터가 아니었다.



사진 출처

http://www.visitkorea.or.kr/ya/gg/yagg_mp0.jsp?i_seqno=2114&mode=p

http://tour7942.com/pub/tour_info.html?act=detail&iCode=61&re_vars=YWN0PWxpc3Q=

꿈꾸는 과학 오혜영
saintmio7@hanmail.net
저작권자 2006-06-01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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