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4번 출구에서 곧장 걸어 나가면 신기한 풍경과 마주치게 된다. 온통 직육면체인 고층빌딩이 늘어선 도심 속에, 뜻밖에도 날개 같은 지붕을 산뜻하게 얹은 우리 전통 목조 건축물이 고고하게 앉아 있으니 말이다.
지난 3월 3일, 100년 만에 그 문을 활짝 열어젖힌 우리나라 국보 1호 숭례문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앞에서 시공간이 교차하는 듯한 아찔한 느낌이 들게 한다. 그것은 참으로 복잡한 심경을 자아내게 하는 풍경이어서, 어느 순간은 현재와 과거의 단절을 확인하고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가 하면, 또 어느 순간에는 현재와 과거가 어느덧 하나의 풍경으로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봄나들이 나온 시민들도 저마다의 감상을 실어 카메라 셔터를 누르거나 눈 속에다 풍경을 담느라고 분주했다.
숭례문은 주변의 마천루들에 비교하여 우뚝한 맛은 없지만, 그 일대의 분위기를 압도하는 기품과 위엄이 있다. 그 기품은 큰 새가 두 날개를 펼친 것 같이 장중한 느낌의 지붕과, 처마와 공포에 입혀진 아름다운 단청에서 느껴지는 고고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또한 그 위엄은 태조 7년인 1398년에 완성된 이후로 600년 넘게 이 자리에 존재하면서 쌓아왔던 역사의 무게감에서 나오는 것일 터이다. 혹은 조선의 도성을 둘러싸는 성곽의 사대문 중에서도 정문의 역할을 했던 당당한 역사에서 묻어 나오는 것이리라.
옛날, 중국과 일본의 사신들도 숭례문을 통하여서만 도성 안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이 모든 이유들과 함께 다음의 역사적 사실도 생각해볼 만하다. 600년 전, 그러니까 숭례문을 지어 올렸던 조선 초기는 고려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이상적인 왕도국가를 꿈꾸었던 신흥사대부의 정신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시기였다. 이러한 조선 선비의 개혁정신과 초심이 숭례문 건축철학에도 배어들어서 단순하면서도 위엄과 기품 있는 아름다움을 쌓아 올렸던 것이다.
숭례문을 샅샅이 살펴보는 과정은 마치 그것을 두 손으로 번쩍 들어 큰 붓으로 구석구석 먼지를 털어내는 작업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처음 보았을 때는 기념엽서의 사진을 보는 것처럼 낯선 느낌이었지만 세세하게 살펴보고 나면 처음과는 달리 보인다. 추녀마루 위의 재미있는 모양의 용두와 잡상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다시 전체를 향해 올려다 보니, 두 눈 가득 들어오는 숭례문의 아름다운 풍채가 친근한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이 건축물을 대하면서 떠오르는 자연스러운 의문들을 쏟아낼 때다.
석축 중앙부에 무지개처럼 단아하게 열린 홍예문. 이것을 그냥 사각형으로 만들었다면 돌을 구하고 쌓기가 더 쉽지 않았을까? 사각형은 균형 잡힌 모양이기도 하고, 큰 돌을 정확한 대칭인 곡선으로 다듬어야 하는 석공의 수고로움까지도 덜 수 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면 무지개 모양의 곡선은 큰 돌 하나를 힘겹게 다듬어낸 것이 아니라 아래위가 거의 직선에 가까운 곡선으로 되어 있는 쐐기 모양의 작은 돌들을 어깨 맞대듯 배열해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아치라는 건축기법이다. 쐐기형의 돌을 반원형으로 놓으면 돌은 서로 밀어내느라고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위에서부터 무게가 걸리면 밀어내는 힘이 더욱 긴밀해져서 오히려 강도가 더해진다. 위의 무게는 아치의 양 끝에 집약되어 있어서 가느다란 기둥으로도 받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구조인 것이다.
이번에는 처음 들었던 생각대로 중앙통로를 사각형으로 만든다고 생각해보자. 이 경우 비어있는 공간의 윗부분에 얹는 석재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긴 막대 모양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때 막대의 위로 막대한 하중이 실릴 것이며 막대는 수직방향으로 가해지는 힘에 약하기 때문에 사각형의 중앙통로는 아치보다 훨씬 불안정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아치는 미학적으로도 아름답고 역학적으로도 지혜로운 일석이조의 훌륭한 건축법이다.
다음 질문. 지붕아래를 수많은 공포(貢布)들로 겹겹이 장식한 이유는 뭘까? ‘공포’는 우리 목조건축물을 볼 때 흔히 가장 먼저 눈이 가곤 하는 지붕 밑의 화려한 구조물인데, 기둥 위나 기둥 사이에 조형적인 재료들을 짜 맞추어 댄 것이다. 숭례문은 기둥 사이에도 공포가 촘촘히 대어져 있으니 다포(多包)양식의 건축물이다. 역사시간에는 공포를 장식이나 건축양식 구분의 요소로만 취급해 왔는데, 사실 공포는 장식의 목적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 가옥의 지붕은 기와로 이루어져 있다. 기와 자체도 무거울 뿐 아니라 기와를 얹히기 위해 사용되는 서까래와 흙의 무게도 만만치 않아서 지붕의 전체 무게는 굉장히 무거워진다. 이것을 몇 개의 기둥만으로 지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때 공포가 지붕의 무게를 기둥과 벽으로 분산시켜 지탱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공포는 또한 앞으로 내민 처마를 안정되게 받치는 역할도 한다. 이처럼 공포 역시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겹쳐서 배열한 조각 형태에 따라 미학적으로도 아름다운 장식물일 뿐만 아니라 역학적인 기능까지 갖추고 있는 것이다.
숭례문의 현판은 왜 세로로 걸려있는 것일까? 대부분 전통목조건물의 현판은 가로로 걸려 있는데 말이다. 사실, 이것은 풍수지리적인 처방에 따른 것이다. 조선왕조의 철학적, 정치적 배경은 유학에 있지만 민간신앙이자 자연관으로서 옛 고려의 개국부터 뿌리 깊게 자리를 잡아 온 것은 풍수지리사상이었다. 옛 사람들은 자연의 변화무쌍함을 만물이 기(氣)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특히 땅의 기인 지기(地氣)를 음양오행과 주역의 논리로 체계화한 것이 풍수지리사상이다.
한반도의 풍수지리사상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나, 고려 초에는 도선에 의해 독자적인 풍수이론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것이 숭례문의 현판을 세로로 걸게 한 ‘비보사상(裨補思想)’이다. 비보사상에 따르면 땅의 지기를 인간의 삶과 조화되도록 하려면 주어진 땅의 지기에 의지해서 살아야 할 뿐만 아니라 나무를 심거나 가산(假山)을 만들고 사찰과 탑 등을 만드는 것, 즉 비보(裨補)해야 한다.
숭례문 현판에 얽힌 사연인즉 이러하다. 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에는 옛날부터 크고 작은 화재가 자주 일어났는데, 풍수지리에 따르면 이것은 궁궐 정면에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관악산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불을 불로써 제압하기 위해 불이 타오르는 풍수적 의미의 문자인 ‘숭례(崇禮)’를 이용했다. 숭(崇)자는 불꽃이 위로 타오르는 듯한 모양이고, 례(禮)는 오행으로 화(火)이며 방위로는 남쪽을 나타낸다고 한다. 또한 글자를 가로로 쓰는 것보다 세로로 쓰면 화기가 더 강해진다고 하여 숭례문의 현판은 특별히 세로로 걸리게 된 것이다.
숭례문 현판에 대한 비보사상의 처방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재미는 있지만 설득적이지는 않다. 풍수지리에 대한 여러 책을 저술한 한동환 씨에 따르면, 이것은 풍수지리가 땅과 자연의 이치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다소 은유적·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하므로 현대과학의 엄밀한 서술양식과 비교해 소박하게 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검증되지 않은 지식이 너무 맹목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풍수지리의 기본 생각은 마음에 든다. 풍수지리는 만물이 정기로 연결되어 있어서 땅이 살아야 사람도 살 수 있다는 논리를 펼치며 이 양자가 존속할 방법을 조화와 균형에서 찾고 있다. 반면 서양인들은 환원적인 시선으로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분리하여 보았다. 그리고 환경오염의 위기를 맞이하고서야 제임스 러브록이 그의 저서 「가이아」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지구를 ‘살아 있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보아야 한다며 그들의 시각에 수정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풍수지리의 자연관은 우리가 앞으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나가야 할지에 대한 하나의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어느덧 제 품안에 담지도 못할 만큼 훌쩍 커버린 도시에서, 100년 만에 그 시민들에게 자신을 열어 보일 수 있었던 숭례문은 어떤 감상에 젖어 있을까? 그 감상을 함께 나눌 여유가 없을 만큼 나도 스스로 떠올린 어떤 생각에 시달리고 있었다. 600년 전 숭례문을 지어올린 기술자들을 지금 만난다면 그들이 나에게 제일 보여주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길 지혜의 산물, 어쩌면 전통과학기술의 핵심이기도 한 무언가가 숭례문에도 있지 않을까?
평소에 눈치 채지 못했던 그것을 발견해내고 싶어져서 그 주위를 셀 수 없이 빙글빙글 돌았다. 아치모양의 홍예문과 다포양식과 세로현판을 찾아냈지만 아직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분명히 우리 전통과학과 유물에 대한 내 안목이 부족한 탓일 것이다. 사실 그래서 더 기대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긴 과학문화유물 답사의 일정을 마치고 다시 숭례문을 찾아오면, 그 때는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 꿈꾸는 과학 오혜영
- 저작권자 2006-04-0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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