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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응용과학
객원기자 공채영
2005-12-11

예술이 아닌 예술, 이집트 미술 그림에서 찾는 과학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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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인들은 살아 있는 신으로 여기던 지배자들의 안락한 삶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것은 3000년 동안 변함없이 지속되었던 거대한 이집트의 건축물과 예술품들에 잘 그려져 있다.


이집트인의 주술 사상의 근저에 카(ka), 즉 생명의 힘은 영원하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와 같은 믿음은 죽은 자의 영혼이 계속 머무를 수 있는 장소인 무덤에 모아졌다. 무덤에 안치된 시체들은 극도로 발전한 방부 처리기술에 의해서 정교한 화학처리 과정을 거친 후에 보관되었다. 예를 들어 1881년에 왕들의 미라 40여구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 말라붙은 피부, 치아, 머리카락이 아직도 존재하는 람세스 2세의 미라도 있었다.


이집트인들의 주술사상은 그들의 예술품에 잘 나타나 있다. 이집트인들은 어떤 사물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표현하고자 할 때 아름다움이 아니라 완전함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그림에 들어가야 할 모든 것을 아주 분명하게 표현하는 엄격한 규칙과 영원한 보존을 미술가의 과업이라고 여겼다. 그것은 그들이 예술에서 추구한 몇 가지 특징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이집트인들은 현실 세계의 생동감보다 사후세계의 영원한 삶을 중시했기 때문에 인체가 좌우로 평형을 이루는 부동성에 역점을 두었다. 그것은 인체의 중앙선을 기준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는 정면성의 법칙으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이집트인들은 대상을 상세하게 표현하기보다 대상의 본질적인 면을 강조했다. 그것은 나중에 Ka가 돌아와서 식별할 수 있도록 얼굴표현을 제외한 모든 부분들을 생략하는 방식으로 이상화되었다. 마지막으로 이집트인들은 하나의 고정된 시점보다 여러 시점에서 대상을 파악해 눈에 보이는 그대로 묘사하기보다 대상을 완전하게 표현했다. 즉 이집트인들은 인물의 특징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 부분을 각각 떼어서 분리한 후 다시 종합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추구했다. 이렇듯 이집트인들은 초상화와 조각상의 인체를 엄격한 공식에 따라 묘사했다.


<헤지레의 초상>은 이집트인들의 생각이 인체의 표현에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머리는 측면에서 볼 때 가장 쉽고 정확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옆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사람을 볼 때 가장 먼저 눈을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그림은 측면 얼굴에 정면에서 바라본 눈이 그려져 있다. 또한 이집트인들은 양쪽 발의 시각화를 가장 어려워했는데, 이 그림은 엄지발가락에서 위쪽으로 연결되는 발의 윤곽선을 분명하게 그렸다.


또한 <네바문의 정원>은 이집트인의 엄격한 규칙을 잘 보여준다. 나무들의 생김새와 특징은 측면에서 보았을 때 명확하고, 연못의 형태는 위에서 보았을 때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집트인들은 나무는 측면에서 본 것처럼, 연못은 위에서 내려다 본 것처럼, 연못 속에 있는 물고기와 새들은 옆모습에서 본 것처럼 그려서 모든 사물의 특징들을 잘 볼 수 있도록 했다.


이집트 색채는 회화적 구성요소들을 선별하는 상징적 견석의 모방원리에 따랐다. 이집트의 고유한 채색염료들은 염료 자체가 도발적이거나 어두침침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예를 들어, 흰색은 피부 색조를 교정해 주었고, 빨간색은 뺨에 생기를 돌게 하였으며, 푸른색은 이마를 강조했다. 유혹과 외모를 위한 색조 이외에 신성을 나타내거나 검정과 초록색처럼 생명의 색채를 대신하는 색들도 있었다.


이집트인들이 추구한 색채에 대한 지식은 장인들의 전통을 통해서 구전되었다. 이집트 신선의 서기들은 수학은 계산이나 측량조사를 위해서, 천문학은 달력의 작성이나 점성술적인 예언을 위해서, 그리고 의학은 병을 고치고 악령을 몰아내기 위해서 그것들을 일상적인 업무과정으로 기록했다. 하지만 그들은 화학기술이나 야금술이나 염색법 등의 지식에 관해서 기록하지 않았다. 야금술이나 염색법 등은 장인의 전통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별개의 전통, 즉 경험을 통해서 구전되었다.


기원전 1100년 무렵의 이집트의 한 기록을 보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하고 있다. “어떤 중노동도 하지 못하도록 부디 마음을 단단히 먹고, 평이 좋은 관리가 되기 바란다. 서기가 되면 손으로 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명령도 내릴 수 있다. 나는 아궁이 옆에서 악어와 같은 손으로 일하는 주물공을 알고 있는데, 그 녀석에게 구더기보다 더 고약한 냄새가 난다. 나는 여태까지 관청의 위원으로 임명된 대장장이가 있었다는 말을 들은 일도 없고, 사절로 임명된 주물공을 만난 적도 없다.” 이 기록은 당시 성직자와 장인의 전통 사이에 장벽이 존재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서로 접촉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위치는 고정되어 버렸고, 이후 새로운 것들은 창조되지 않았다.


이집트의 장인과 성직자 사이의 단절은 이집트의 미술 양식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집트 양식은 엄격한 규칙들에 따라서 구성되었는데, 모든 미술가들은 여러 규칙들을 어려서부터 배워야만 했다. 정확한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만이 가장 뛰어난 미술가로 추앙되었고, ‘새로운 것’, ‘독창적인 것’은 수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남녀의 좌상, 신의 모습을 엄격한 규칙에 따라서 그렸고, 또한 상형문자의 형상과 상징을 명확하고 정확하게 써야만 했다. 예를 들어, 인물의 크기가 신분에 따라서 달라지는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즉 파라오는 거인처럼 묘사된 반면, 시종들은 난장이처럼 그려졌다.


그런데 신왕조의 18대 왕조의 왕인 아멘호테프 4세(일명 아크나톤)와 투탕카멘 왕은 이집트의 엄격한 규칙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이집트는 외국과 교류가 활발해지고, 아크나톤의 종교개혁 등의 사회적 배경 속에서 변하기 시작했다. 아멘호테프는 왕의 얼굴이 법칙에 의해 그려지던 것을 파괴하고 인간적이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하도록 했다. 예를 들어 투탕카멘의 황금옥좌 등받이에 새겨져 있는 <투탕카멘 왕과 그의 처>를 보면, 투탕카멘의 새끼발가락이 널리 행해진 방식에서 벗어나 있다. 그리고 왕과 왕비의 크기와 피부색은 원래 다르게 표현되었으나, 이 작품은 같게 그려졌다.


고대 이집트에서 수많은 이미지들은 주술적 목적에서 무덤을 장식하는 요소였지 구경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이집트인들은 무엇이든 비평할 수 있는 사람들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철학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고 대중들의 관심이 정치적 토론에 모아지면서 이미지도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이것은 예술이 아닌 예술에서 새로운 예술로 태어나는 배경이 되었다.

객원기자 공채영
저작권자 2005-12-11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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